믿음은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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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혼자가 아니다
  • 임범진
  • 승인 201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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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따라올 수밖에 없는 그것은

 

   

나는 1993년에 대학에 입학해 1999년에 졸업했다. 이 시기는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본격적인 침체기로 들어서던 때였고, 바꾸어 말하면 선교단체들의 캠퍼스 전도 열정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때였다. 당시 캠퍼스 전도를 열심히 하던 선교단체들의 공통된 특징은, 사영리나 다리 예화와 같이, 사람은 죄인이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순차적으로 설명하고, 그 자리에서 믿음의 결단을 하도록 유도하는 전도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영접기도’는 영생과 영벌을 가르는 결정적 순간이자 한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별하는 절대적 잣대였다.

나 역시 나름 열정 있는 기독 학생이었기에 당시 선교단체의 표준에 따라 전도하고 일대일 양육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던 중 이런 전도와 양육 행위를 회의하게 만드는 일을 경험했다. 영접기도를 하고 구원의 확신이 심기어 성장하고 있다고 믿었던 동기가 어느 날 “난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영접기도를 따라 한 것일 뿐 사실은 신자가 아니다”라고 자백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선교단체의 지도자급 형제가 내게 해준 말은 그보다 몇 배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 “범진 형제, 그런 이야기에 낙심한다면 범진 형제가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거야. 아무리 그런 말을 하더라도 영접기도를 했기 때문에 어쨌든 구원받은 거야.” 이때부터 나는 그간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선교단체의 ‘복음’을 의심해보기 시작했고, 이는 몇 년 후 그 단체와 가르침에서 멀어진 중요한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전도 방식과 구원에 대한 이해는 선교단체만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청년 사역으로 유명한 교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대학생 선교단체의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사용했고 이런 현상은 교단 간에 큰 차이가 없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전국 규모의 교사 강습회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보급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법 역시 선교단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흰색 카드와 검은색 카드를 보여주면서 어느 쪽에 속하고 싶냐고 물어본 후 흰색에 속하기 원한다고 답하면 영접기도를 따라 하게 하는 전도였다. 강사는 성공률(?)이 무려 98%에 이른다고 했다. 흥미롭게도 그 강의를 들은 지 정확히 20년이 지난 올해, 현재 출석하는 미국 한인교회에서 다시 한 번 그 전도법 강의를 들었다. 인종차별을 의식해서 흰색과 검은색을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이라는 말로 바꾸었을 뿐 성공률에 대한 보증까지 완전히 똑같았다.

 


육적 그리스도인? 영적 그리스도인?

전도 방식은 그 교회나 단체가 가진 구원론을 반영한다. 위에서 말한 전도법과 그 배경이 되는 구원론은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에서 개발해 유행한 것이다. 가장 큰 특징이자 문제점은 믿음이라는 말의 정의가 이전의 기독교가 이해한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믿음은 지적·감정적·의지적 요소의 총화이며, 사람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만한 지식이나 능력이 없기 때문에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와 대조적으로, 20세기 중후반 미국의 대중적 복음주의 기독교의 다수는 믿음을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하겠다고 결단하는 행동으로 축소했다.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면 믿는다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 된다. 영접기도를 따라 하기로 결단만 하면 구원을 얻기에 충분한 믿음을 가진 것이다. 한 번 영접기도를 한 사람의 구원 여부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자신도 평생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미국에서 유래한 현대 복음주의 기독교(달리 지칭할 말이 없어 이렇게 쓰지만 복음주의 교회 중에서 위와 같은 구원론을 가진 교회를 가리킨다)와 전통적 기독교의 구원론의 차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믿음을 결단의 결과로 보는 입장과 기적적인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 중 어느 입장에 서 있는지에 따라 신자의 ‘행위’에 대한 이해가 극명하게 달라진다. (필자는 개혁주의의 전통에 서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다른 전통을 따르는 분들은 개혁주의적 시각을 전통적 기독교라 일반화하는 것을 불편해하실 수도 있겠으나 내가 아는 한 정상적인 개신교의 어떤 신학 전통도 구원을 얻는 믿음이 순전히 자신의 결단에서 나온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통적 기독교라고 칭하는 것이 그리 잘못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대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는 신자를 두 부류로 구분했다. 영접기도를 하고 구원에 이르렀으나 그 이상 발전이 없는 사람을 육적 그리스도인(carnal Christian), 거기서 더 성장해 신자다운 삶의 변화와 행위가 나타나는 사람을 영적 그리스도인(spiritual Christian)이라고 명명했다. 이렇게 둘로 나눈 것은 실제 그들의 사역 속에서 전통적인 그리스도인의 정의로는 담을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무수히 생겨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젊은 날 한때 전도자와 함께 영접기도를 따라 했으나 그 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심지어 교회에 출석조차 하지 않는 이 사람들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전통적 기독교는 이들을 불신자로 간주하는 것이 그 사람들을 위해 안전하다고 생각한 반면, 현대 복음주의는 이들을 구원받은 신자로 간주하고 육적 그리스도인이라 명명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그 어떤 행위를 그리스도인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특히 강조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은 구원받은 이후 뒤따르면 바람직한 선택사항이지 필수요소가 아니다. 회개 역시 행위의 일종이기 때문에 구원 자체와는 관련이 없다. 심지어 배교하더라도 그것은 겉모습일 뿐 그의 구원은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그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자 율법주의다.
 

행위는 구원받은 표지다

이에 반하여 전통적 기독교는 행위를 강조한다. 물론 이 행위는 구원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행위는 구원을 가져오는 데 어떤 역할도 하지 않지만, 변화된 행위는 그 사람에게 구원이 진정으로 임했음을 보여주는 표지다. 믿음은 거듭남이라는 초자연적 기적의 결과이고, 따라서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갖게 된다. 변화된 성향은 필연적으로 변화된 행위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믿음과 행위는 따로 떼어 생각하거나 별개의 단계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내용이 1980년대 이후 미국 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 논쟁’의 핵심이다. 전통적 구원론을 견지하는 이들에게는 ‘주재권 구원파’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20세기식 새로운 구원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값없는 은혜파’(Free Grace)라 명명하고는 ‘주재권 구원파’의 주장을 행위 구원론과 동일시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이런 전략이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먹혀들었는지, 개혁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이 나서서 ‘주재권 구원파’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마이클 호튼 등이 공저한 「그리스도 주」(Christ the Lord: : The Reformation and Lordship Salvation)는 개혁주의 진영이 초기에 ‘주재권 구원파’에 대해 가졌던 의심과 의혹을 해소하고 지지에 이르는 과정을 잘 설명해준다) 현재 미국 복음주의 설교자와 대중은 ‘값없는 은혜파’를 지지하는 경향이 우세하다
 

 

은혜 넘치는 한국의 교회들

우리나라에는 이 논쟁과 연관된 책들이 이미 다수 번역되어 있지만(‘값없는 은혜파’에 해당하는 서적은 일부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펴낸 전도와 양육 교재가 대표적이다. ‘주재권 구원파’에 해당하는 서적은 「참된 무릎꿇음」(살림 역간)을 비롯한 존 맥아더의 저작들과 안토니 후크마 등의 책들이 있다), 교계에서 이 문제가 본격적인 논쟁으로 발전한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값없는 은혜파’의 구원론이 교파를 초월하여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이는 아마도 한국 교회가 전도를 통한 성장을 제일 목표로 삼고 있는 중에 ‘값없는 은혜파’의 방법론으로 무장한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전도의 열매를 거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확한 통계 자료는 존재하지 않지만 영접기도라는 행위에 성도들이 거의 맹목에 가까운 신뢰를 보인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현재 한국 교회 성도의 상당수는 ‘값없는 은혜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구원론에 대한 논쟁은 단순히 신학 논쟁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각각의 구원론이 신자의 행위에 대해 현저히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구원론은 결국 신자의 행실이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물론 ‘값없는 은혜파’가 불경건한 삶을 조장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신자가 죄 가운데 거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바울과 같이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대답을 하면서도 죄에 대한 민감성에서는 ‘값없는 은혜파’와 ‘주재권 구원파’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둘 다 신자와 죄는 어울릴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후자는 만일 신자라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죄 속에 거할 경우 자신의 구원을 다시 점검하라고 가르친다. ‘값없는 은혜파’를 따를 경우, 비록 도덕률 폐기론이라는 극단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신자의 행실에 대해 교회가 바른 권징을 시행할 동기가 심각하게 약화된다.

한국 교회의 도덕성이 일반 사회보다 못하다는 지적과 이를 뒷받침하는 실례들이 줄줄이 터져 나오고 있다. 교회뿐 아니라 사회를 황망하게 만드는 일련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접하면서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이 다각도로 제시되고 있다. 어느 한 원인으로 현재 한국 교회의 어지러움을 모두 다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흔히 제기되는 분석 중 하나인, 한국 교회가 그간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만 치중하고 이를 삶 속에 실천하는 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의 원인으로 삼는 분석에는 과연 그러한지 의심하는 입장이다.

‘값없는 은혜파’의 구원론이 대중화되는 과정을 볼 때 한국 교회 안에 실용성에 근거한 평가만 있을 뿐 무엇이 올바른 교리인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 교회의 대중이 지지하는 구원론 체계에서는 필연적으로 신자의 행실에 대한 강조가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행위구원론 역시 함께 경계해야

‘주재권 구원파’를 지지하고 이들의 구원론(사실은 전통적 기독교의 구원론)이 현대에도 더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으로서 이 논의를 진행할 때 있을 수 있는 몇 가지 위험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진리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올바른 성경 해석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단지 실용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주재권 구원론을 검토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도덕성이 떨어졌다. 실천이 부족한 것 같다. 그러니 실천을 강조하는 새로운 교리를 찾아내자”라는 식의 접근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구원론에 대한 탐구는 순전히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구원론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구하다 보니 그 결과 신자의 행실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고 한국 교회의 도덕적 수준이 높아질 수도 있는 것이지 그 반대의 순서로 진행된다면 ‘값없는 은혜파’가 효율적 전도를 위해 구원론을 변형시킨 것과 똑같은 오류를 반복할 수도 있다. 둘째, ‘값없는 은혜파’가 도덕률 폐기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위험성이 잠재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재권 구원파’는 율법주의/행위구원론을 주의해야 한다.

사실은 ‘주재권 구원파’의 구원론이야말로 행위로 얻는 공로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교리다. 은혜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믿기로 결단할 능력도 없다는 마당에 다른 어떤 공로가 개입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값없는 은혜파’가 상대에게 행위구원론자라는 혐의를 지속적으로 씌운 덕분에 ‘주재권 구원파’의 입장을 그와 같이 이해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행위구원론이 한국 교회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주재권 구원론에 관심을 갖는 것보다는 차라리 ‘값없는 은혜파’로 남아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만, 이 믿음은 홀로 있지 않는다(We are justified by faith alone, but not by a faith that is alone).” 아마도 루터의 말일 것이다. 길 잃은 한국 교회가 다시 기억하고 회복해야 할 경구라 생각한다.

 



임범진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이며, 주 연구 분야는 신장과 장기 이식의 병리.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부흥과개혁사 역간)를 비롯하여 몇 권의 기독교 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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