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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라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우리는 하나님이 타락을 허용하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죄악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거리트 슈스터  |  Marguerite Shu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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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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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가스펠 프로젝트
Global Gospel Project


신문기자가 G. K. 체스터턴에게 세상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체스터턴이 내놓은 답변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그는 부패한 정치인이나 전쟁 중인 국가의 해묵은 갈등, 혹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들의 탐욕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길거리 범죄나 부당한 법, 부적절한 교육의 문제도 그냥 지나쳤다. 환경 문제라든가 지구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도 그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사회의 구조악이 제도 속에 깊숙이 침투한 것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세상의 문제는 무엇인가? 체스터턴은 단 두 마디로 대답했다. “바로 나입니다.”

열정을 가지고 자아를 실현하라고 교육받은 세대들이 좋아할 만한 대답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실패와 약점에는 결국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좋은 유전자를 타고 나지 못했거나, 부모의 양육방식에 문제가 있었거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산수 문제를 틀렸다고 창피를 준 선생님 때문에 수학에 아예 흥미를 잃어버렸을 뿐이다. 이런 이유들은 모두 우리 잘못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친구들보다 딱히 더 못났던 것도 아니다. 가끔 나쁜 짓을 하는 패거리에 끼는 것이 사는 데 훨씬 더 편했다. 우리는 안 좋은 상황에 대해 수많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모든 거짓말이 나름의 진실을 담고 있듯이 우리 변명에도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겨 있긴 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자신에 대해 거북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어떤 식으로 합리화하든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준뿐 아니라 자신의 기준에도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사실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 해도, 우리 삶의 끝에는 피할 수 없는 위협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죽음은 우리가 이룬 모든 것과 수많은 변명을 종식시킬 것이다. 우리 중에 누가 자신이 죄가 없다고 확신하며 최후의 심판에 임할 수 있겠는가?

아마 체스터턴의 답이 맞을지도 모른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나며 살아가면서 죄성을 나타낸다는 ‘원죄’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독교 교리라고 말했다. 범죄자든 성직자든 누구나 죄를 짓는다. 이런 씁쓸한 결론이 사실이면 이 세상이 악으로 가득찼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 우리는 죄를 짓는가?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떻게 죄가 하나님이 선하게 만드신 세상에 들어와 만연할 수 있는가? 이 중요한 질문에 성경은 이론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는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성경이 답을 내놓지 않듯이 말이다). 다만 성경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관한 설명은 창세기 23, 즉 두 번째 창조 기사에 등장한다. 첫 번째 창조 기사인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것을 기뻐하시며 인간에게 특권과 책임이 있는 중요한 자리를 맡기신다. 두 번째 기사(첫 번째 기사보다 먼저 쓰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는 우리가 경험하는 깨어진 세상을 그리며 창세기 1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그림을 제시한다. 로마서 5고린도전서 15에서 바울은 이 두 번째 기사를 타락의 교리와 연결한다. 바울은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일이 에덴동산에서 그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맨 처음의 잘못은 뒤이어 일어나는 모든 일에 흔적을 남긴다. 아담의 죄는 이후의 모든 인류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바울은 이 광범위한 죄와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원죄가 이어지는 것이나 악한 사람들을 탓하지 않는다. 심지어 죄와 죽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 죄와 죽음을 지적하고 로마서 11:32에서 다시 언급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동시에,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 예고한다). 어찌됐든 하나님의 결정으로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를 물려받았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람이 불순종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죄인이 아닌데 죄인으로 여겨진다고 볼 수는 없다(롬5:12). 처음부터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성품 때문에 선한 것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변명거리가 다 없어지고 나면, 우리가 악을 행한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외면했던 것처럼 불가사의한 일로 남는다. 우리가 당면하는 모든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정직한 설명일 것이다.

창세기는 왜 에덴동산의 타락이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왜 뱀이(사탄이라 하는 유혹자가) 하나님을 배반했음에도 에덴동산에 들어오게 하셨는지도 전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창세기는 죄의 속성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겉으로 보기에 하찮은 유혹의 대상을 생각해 보라. 세상을 타락시킨 원인이 고작 열매 하나라니! 존 밀턴의 「실낙원」에서 사탄은 이 사건을 타락한 천사들이 비웃는 일로 묘사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 않은가? 임신한 십대는 남자친구와 가진 단 한 번의 관계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다. 에이즈에 감염된 마약 중독자는 “딱 한 번만 해봐. 아마 좋아하게 될 거야”라는 속삭임에 단 한 번 넘어갔을 뿐이지만, 실제로는 그가 좋아하든 않든 상관없이 마약에 손을 댄 순간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오래된 한 유명한 조각상은 하와가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뒤로 슬그머니 손을 뻗어 열매를 잡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때로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른 척한다. 또한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사소한 잘못과 작은 일탈 때문에 목표에서 멀어진다.

유혹에 넘어가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선 에덴동산 ‘출입금지’라는 처벌이 너무 과한 조치는 아닌지 의심한다. 이 의심은 계명의 핵심과 출입금지를 명하신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한다. 율법주의가 선한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면서 결국에는 그분의 실제 계명들까지 경시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와는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타당성에 의구심을 품었기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창3:3).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의심하면서 불순종이 정말 위협적인 결과를 낳을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면 이런 의심은 이해할 만하다. 아담과 하와가 죽지 않을 거라던 뱀의 주장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으니까. 죽음이 암처럼 소리 없이 다가오긴 했지만, 분명 그들도 곧바로 죽지는 않았다. 불신이 영혼의 숨통을 끊어놓을 만큼 전이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가 지연되었다고 해서 취소된 것은 아니다. 의사가 시한부를 선고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죽기 전까지 자신의 몸을 혹사할지도 모른다. 죄의 결과와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고 오랫동안, 아니 어쩌면 평생 동안 우리의 영혼을 혹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불신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

유혹의 또 다른 결정적인 요소는 자만심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의 탐험에 제약이 필요한가, 하는 의심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를 잘 표현한 만화가 있다. 에덴동산에서 애플 컴퓨터에 매료된 한 여인에게 뱀이 이렇게 말한다. “물론 그분은 너에게 그걸 만지지 말라고 말했지. 그러면 너는 그분이 가진 모든 지식을 갖게 될 테니까.” 성경의 뱀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는 어떤 선한 동기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옹졸한 질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과학적인 시도에 넘어서는 안 되는 어떤 선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금지 명령은 사악하고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가진 압제자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발상일까?

어쨌든 우리는 창세기 이야기에서 그러한 선이 절대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절정에 달한 인간의 자만심을 보여주는 최근의 예는, 힉스 입자를 “신의 입자”라 부르는 사람들이다(이들은 수많은 진지한 과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우리는 ‘지식’은 높이 평가하지만, ‘지혜’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하고, 그 무엇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만화에서는 한 천사가 손에 번갯불을 쥐고 하나님께 “지구를 멸망시킬까요?”라고 묻는다. 하나님은 그를 말리면서,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알아서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한다.

창세기 3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다. 사소한 선택, 불신, 자만심은 창세기 기사와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중요한 측면이다. 이 세 가지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왜 하나님은 애초에 그러한 상태를 허락하셨는가? 도대체 왜 뱀을 등장시키셨는가? 신학자 칼 바르트의 질문처럼, 왜 문을 열어놓고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을 세우셨는가? 왜 문을 닫아두시지 않은 것인가?

바르트는, 문이 열려 있지만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 뜻에 기꺼이 우리를 맞추고, 피조물의 의무를 다하여 기꺼이 순종을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납득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왜일까?

하나님이 중심에 계신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자신의 역작 창조와 타락(대한기독교서회 역간)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본회퍼는 선과 악을 아는 나무, 즉 금지된 열매가 달린 나무가 왜 다른 데도 아닌 에덴동산의 한가운데 있었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중심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경계 바깥쪽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 능력의 한계를 제한하시는 분도 아니다. 규칙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라 믿는 율법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경계를 지키는 분도 아니다. 그분은 중심에 계신다. 만일 하나님이 그저 경계 바깥쪽에 머무시는 분이라면 우리의 중심은 비어 있었을 것이다. 즉 삶을 구성하는 참된 중심이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하는 관계가 우리를 전적으로 다스릴 때 우리는 진실로 자유로워지고 경계가 필요 없어지는 것이다. 대신 경계를 강화하려 하고 경계를 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수록 우리는 중심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에덴동산의 나무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을 꾀어낼 목적으로 고안된 악의적인 덫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우리 생각과는 다른) 참된 그분과 교제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에 대해 말해준다. 완전한 지혜로 선과 악을 정의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그 지혜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은혜와 자비가 담겨 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온전히 자유롭게 순종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또한 아무 문제도 없는 세상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는 존재로 살아갈 자유도 없다. 우리는 타락했으며 피조세계는 아담과 하와의 잘못(그리고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저주받고 있다.

하지만 끝없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중심으로 계속 돌아간다면, 우리와 이 뒤집힌 세상을 구원하실 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로마서 8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을 준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우리는 그날을 기다린다. CT

마거리트 슈스터 풀러신학교에서 설교학과 신학을 가르치는 해롤드 존 오켕가 석좌교수

Marguerite Shuster, "The Mystery of Original Sin" CT 2013:4; CTK 2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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