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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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삼위일체
  • 허영진
  • 승인 201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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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스트레스」 탁석산 | 창비 | 248쪽 | 2013년 5월
   

‘행복’(幸福)이란 조어는 야릇하다.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라는 뜻의 ‘행’과 ‘복, 복을 받다’라는 뜻의 복이 만났다. 행복의 사전적 정의 역시 ‘행’에 가깝다. 뭔가 야릇하다.

이 책에 따르면 행복이란 말은 공리주의의 시조인 제레미 벤담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happiness)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생겨났다. 원래 운이 좋다는 뜻이었던 ‘happiness’를 오늘날의 행복 개념으로 처음 사용한 것이다. 일본인들이 이를 옮기면서 ‘행’과 ‘복’을 묶어 행복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기실 만들어진 지 200년 정도 된 신조어인 셈이다.

그런데 행복이 공리주의에서 비롯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행복을 ‘최대’라는 물리적 수사로 치장하면서 측정 가능한 것이 돼버렸다. 더 큰 문제는 소비자본주의와 결합한 데 있다. 소비자본주의의 힘이 센 체제에서는 개인의 자유는 결국 소비할 자유로 귀결된다. 이렇게 되니 행복은 무엇을 소유했는가로 정해진다. 큰 집, 큰 차, 사치성 소비재, 좋은 직장 등이 행복의 기준이 돼버렸다. 소유하기 어려운 행복의 조건들이 바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행복 스트레스’를 낳는다.

저자는 행복을 정의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정의한다. 행복은 복잡미묘한 개념이고 무엇보다 계량화할 수 없다. 긍정심리학의 권위자인 연세대 서은국 교수는 ‘행복의 영순위는 관계’라고 말한다. 행복은 구매나 소유 같은 외적 조건으로 누릴 수 없다고 말한다. 탁석산도 마찬가지다. 행복의 조건이라고 ‘신화화’된 소유를 통해서는 행복을 절대 누릴 수 없다고 강조한다.

책은 행복의 단위가 삼분돼 있다고 말한다. 나와 이웃, 이웃의 확장인 사회다. 잘 수행한 개인과 예의를 지키는 이웃,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고 평등한 사회가 행복의 구성 단위란다. 내가 아무리 많이 가지고 행복해도 내 이웃이, 내가 속한 공동체가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복을 개인의 소유나 마음가짐으로 환원하는 현실에 빗대보면 색다른 분석이다.

색다르다고 했으나 기독교 공동체에서 최고가는 율법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아닌가. 이미 기독교 공동체는 ‘관계’를 율법의 지위에 두고 있다. 문제는 교회에 만연한 기복 신앙이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하늘이 주신 행복을 말하면서 관계가 아니라 소유나 조건에 방점을 찍어왔다.

책에 소비에트대백과사전의 행복의 정의가 나온다.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최대의 내면적 만족으로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과 자기 삶의 목적 실현에 부응하는 존재 상태에 대한 인간 정신의 의식.” ‘소비에트에서 나왔다는데 어쩜 이리 성경적이람’ 하면서, 과연 이런 행복이 소유 같은 조건을 통해 올까 싶다. 절로 체머리가 흔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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