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우울증을 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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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우울증을 가르다
  • 박총
  • 승인 202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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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아빠가 우울증에 걸렸단다."

난여름의 일이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이후 네 아이를 힘겹게 느끼는 날이 부쩍 늘었다. 이전엔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들의 존재가 부담이 되진 않았는데 마음의 병을 앓고 난 뒤론 아이들에게 짓눌리는 자신을 보곤 한다. 아이들의 존재가 공포로 다가올 때의 마음은 참담함 그 이상이다.

얼마 전부터 다시 상태가 악화되던 터에, 동네 병원에서 늦깎이 간호사로 일하는 안해의 근무 일정이 꼬여서 나흘 연속으로 거의 혼자 네 아이와 지지고 볶았다. 오늘도 새벽 여섯 시부터 일어나서 혼자 열여섯 시간 연속으로 애들을 봤다.

아침 일찍 동네 솔밭공원으로 나들이 가고, 맛난 찬을 세 가지나 해서 점심을 먹일 때까진 좋았다. 이때만 해도 아이들을 기쁘게 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몸을 앞서나갔다. 그런데 그 뒤로 날은 더운데 몸은 지치고 애들의 존재가 점차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특히 막내는 종일 칭얼거리는데 나중엔 아주 미칠 것 같았다. 애들이 입을 열어 말만 해도 듣기가 싫었다.

참다 참다 마침내 양쪽 머리를 감싸 쥐고 지금부터 다들 조용히 하라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안 그럼 죽여버릴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는 애들이 너무나 놀란다. 사실 내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평생 입에 올려본 적이 없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갔다.

마음의 병으로 인해 괴로운 건 나 하나로 족한데 애들에게 이런 커다란 상처를 주다니, 죄책감에 눌려 더는 살고 싶지가 않았다. 큰애 해민이는 몇 달 전부터 압바한테 장난을 쳐도 잘 웃지 않고 늘 표정이 어둡다며 볼멘소리를 하곤 했다.

둘째 화니는 저번에 딸기 이모 집에 자러 갔다가 이모에게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압바가 한번은 엄청 서럽게 울었다며 염려를 털어놨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애들에게 죽여버릴 거라는 막말까지 했다. 부엌 찬장에 넣어둔 우울증 약을 다시 꺼내 먹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숨겨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 막내를 제외한 셋을 모아놓고 압바가 올 들어 이상해지지 않았냐고 운을 뗐다. 내 분노와 말에 대해 정식으로 용서를 구한 다음 압바가 마음에 병에 걸려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달라고, 또 기도해달라고 했다. 큰애는 내가 우울증에 걸려 있던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맘이 착잡했다.

듣는 내내 근심스러운 표정을 하던 화니는 이야기를 마치자 내게 꼭 안긴다. 맘이 여리고 정 많은 우리 딸은 “압바, 어떡해…” 하고 울먹이면서 내 팔뚝에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린다. 눈물이 고여 내 소매로 흘러내리는데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다. 어찌어찌해서 애들을 달래고 재운 다음 잠자리에 누웠지만 어쩔 수 없는 불면의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방학 중에도 계속되는 방과 후 교실에 가야 하는 화니가 밥을 안 먹고 울고 있다. 압바가 무섭단다. 학교 가는 길에 자기를 죽이려고 칼 들고 좇아올 것 같다고 한다. 그 말이 또 내 가슴을 벤다. 또 눈물이 난다.

셋째를 유치원에, 넷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서 화니 손을 잡고 나란히 학교에 갔다. 딸의 두려운 맘을 풀어주고 싶었고, 나 스스로도 집에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부러 그랬다. 도서관에서 방과 후 교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집에 오는 길에도 손을 잡고 걸었다. 어떻게든 딸아이의 마음을 밝게 해주고 싶어서 “시냇물에서 놀래?” 했다.

압바도 같이 들어가잔다. 물에 발을 담그고 물결을 거슬러 삼각산 쪽으로 한참을 올라가는데 우리 딸, 언제 울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좋아한다. 슬슬 화니 혼자 노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나는 물 밖으로 나와서 도서관에서 읽던 책장을 마저 펼쳤다.

구원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나비 한 마리가 내 가슴과 책 사이의 한 뼘 정도 되는 그 공간을 중력을

무시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유유히 지나갔다. 그 하늘하늘한 날갯짓이 이내 가슴을 ‘스윽’ 가르며 지나간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고름 같은 커다란 덩어리가 물컹하고 쏟아진다. 스올에 잠긴 영혼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순간 마음이 벅차서 눈물이 흘렀다. 그때였다. 시냇가의 화니가 날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 것은. 나도 눈물을 훔치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화니야, 집에 가서 점심을 먹자. 된장찌개 넣고 싹싹 비벼서 점심을 먹자." CTK
 


박총 네 아이의 압바이며  「밀월일기」(복있는사람), 「욕쟁이 예수」(살림), 「내 삶을 바꾼 한 구절」(포이에마) 등을 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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