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딸이 아들이 교회를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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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딸이 아들이 교회를 등졌다
  • 캐런 스왈로 프라이어 | Karen Swallow Prior
  • 승인 201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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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믿음을 떠나 방황할 때, 우리는 큰아들과 아버지 중 누구처럼 행동하게 될까 혹시 우리 역시 탕자인 것은 아닐까

 

   

23세인 대니얼 스미스는 2008년 시더빌대학교에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었으나 내면은 탕자에 가까웠다. 몇 가지 핵심 교리와 관련된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친구나 교수들에게 하나님과 지옥,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가 연출한 암울한 장면 등에 대해 솔직한 질문을 던지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전형적인 선한 그리스도인 학생으로 보였을 겁니다. 저는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열심히 노력했고요. 하지만 내적으로는 완전히 신앙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대니얼은 고백한다.

같은 학교 신입생이었던 스티븐(가명)은 기독교 대학이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그의 카리스마와 행동력, 믿음에는 전염성이 있어서 대니얼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독서 취향과 철학적 성향이 비슷했습니다. 신입생답게 항상 의기양양했고, 꼭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죠.” 대니얼은 말한다. 2학년이 되면서 두 사람은 룸메이트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해 초 스티븐 어머니의 건강에 문제가 발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기암 판정이 떨어졌고,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도 전에 스티븐은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의 투병 중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진부하고 천편일률적인 반응에 스티븐은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분노했다. 어머니가 소천하고 나자 스티븐은 명상과 동양 신비주의에서 위안을 찾았다. 졸업반이 되자 스스로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신앙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대니얼은 스티븐을 보면서 인생과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미셸 스터레이스-아코르시의 남편인 24세의 리(가명)는 기독교를 떠나면서 가족과도 멀어졌다. 미셸에 따르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문제가 많았지만 네 자녀를 키우는 동안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두 사람은 뉴욕주 북부의 숲과 연못이 있는 동네에 커다란 집을 짓고 살았다. 주일이면 온 가족이 교회에 갔고, 아이들은 기독교 학교에 다녔으며, 식사 시간은 물론이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그런 가족 기도 시간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어느덧 48세가 된 미셸은 남편과 이혼 후 새롭게 자리 잡은 서부 해안의 한 공동주택에 앉아 그날의 일을 털어놓는다. “우리 가족은 저녁식사 전에 늘 함께 손을 잡고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밤(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던 리가 실직을 한 직후였는데) 리가 가족들과 손을 잡지 않으려 했어요. 아이들이 어리둥절해하면서 아빠에게 빨리 기도하자고 재촉을 했지요. 결국 가족과 손을 잡기는 했지만, 남편은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남편의 내면에 뭔가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죠.”

리는 순식간에 다음 단계,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교회에 가면 설교 시작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나마 교회 출석조차 거부했다. 미셸과 아이들이 즐겨 듣는 음악을 비웃기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다가 어느 순간 의기소침해지는 등 변덕을 부리는 남편 때문에 집안은 편할 날이 없었다. “화를 내거나 우울해하거나 둘 중 하나였어요. 물론 하나님은 계속 거부했죠.” 미셸은 말한다.

막내 에즈라는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일을 떠올린다. “저는 아빠가 구원받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어요. 그래서 제발 함께 회개 기도를 드리자고 간청했죠. 제가 계속 졸라대니까 결국 차 안에서 저와 함께 회개 기도를 드렸어요.” 그러나 이런 영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리는 교회 출석과 가족의 기도 생활을 완전히 중단했다. 그러고 몇 년 후에는 가족을 떠나버렸다.

물론 떠나지 않고 가족과 함께 지내는 탕자들도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공유해온 믿음을 어느 날 갑자기 저버린 배우자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2009년 가을, 앨리스 라이트는 웨스트버지니아주에 있는 자기 집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때 남편 제이슨이 심리치료사와 상담을 마치고 돌아왔다. 몇 분 동안 간략히 상담 내용을 설명하더니 제이슨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앨리스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던’ 사람은 바로 제이슨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어요. 저와 처음 데이트를 시작할 무렵에는 성경대학을 다니며 예배 인도를 돕고 있었죠. 그의 진실한 신앙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더 확고하고 열정적으로 보였으니까요.” 앨리스는 설명했다.

찬양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 된 앨리스와 제이슨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이후 함께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생활을 했다. 그리고 네  자녀를 믿음 안에서 양육했다. 그런데 결혼생활 12년 만에 제이슨이 갑자기 무신론자라고 선언한 것이다.

“저는 겁에 질렸죠.” 앨리스은 말한다. 두 사람은 2주일 동안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앨리스는 울기만 했다. 제이슨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과의 결혼생활을 원하지 않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제이슨은 제이슨대로 앨리스가 믿음이 없는 남편과 결혼생활을 유지할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곁에 머물렀다.

결혼생활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후에도, 두 사람은 가족과 교회, 그리고 자녀의 문제를 함께 공유했다. 4년이 흐른 지금도 제이슨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로 남아 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앨리스는 최근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아직도 예상치 못한 감정들이 저를 괴롭힙니다. 지금도 주일 예배 때 예전에 남편과 함께 부르던 찬양이 흘러나오면 외로움을 느낍니다. 문제가 생겨도 남편에게 함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지 못할 때는 낙심이 되다가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과 인생의 여정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춘기의 방황을 넘어


샌드라(가명)의 사연은 성경 속 탕자 이야기와 많이 닮았다. 샌드라의 딸은 어린 시절 신앙심이 돈독한 아이였다. “제니퍼(가명)는 예배를 인도하고 친구를 전도하고 성경을 읽고 선교 여행을 준비하는 등 청소년부 일을 도맡아 했어요.” 샌드라는 말한다.

그런데 10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옷차림과 귀가 시간, 집안 규칙 등과 관련해서 계속 부모와 충돌하더니 그 상태가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사춘기의 반항 정도로 생각했다. 보수적인 중서부 지역에서 홈스쿨링으로 자녀를 교육하는 샌드라와 남편은 주변의 다른 가족들보다 자녀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보니 샌드라는 제니퍼가 율법 중심적인 기독교 문화에 반발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부모와 말다툼을 벌이던 제니퍼가 ‘세상’은 부모님 말씀처럼 나쁜 곳이 아니라고 대들기도 했다. 그러고는 부모님께 그걸 증명해보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까지 제니퍼가 했던 어떤 결심보다 진지하고 확고해 보였어요. 여섯 살 때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했던 일도 포함해서요.” 샌드라는 털어놓는다.

18세가 된 제니퍼는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 방의 짐을 전부 챙겨서 나가버렸다. 샌드라는 제니퍼가 떠나버린 텅 빈 방에 멍하니 서 있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서랍은 전부 열려 있었고, 옷장은 텅 비어 있었으며, 침대 시트까지 깨끗이 벗겨져 있었다. “마치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어요.” 그때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샌드라가 말한다. 창밖으로 제니퍼가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오늘 밤 어디서 자려는 것인지, 그 낡은 차를 몰고 어디까지 가려는 것인지 샌드라는 알 수 없었다.

크리스틴(가명)은 어느 날 문득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큰아들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크리스틴은 네 살 때부터 하나님을 믿었다. 기독교 학교와 기독교 대학에 이어 신학교에 입학했다. 남동생 네이선은 아홉 살 때 처음 믿음을 고백했다. 크리스틴에 따르면 “네이선은 늘 화려하고 통속적이고 값비싸고 재밌는 것”에 끌렸다. 피츠버그 외곽에 있는 학교에 다니던 시절, 기독교 어린이 뮤지컬인 <앤츠힐바니아>Antshillvania[성경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 등을 이용하여 개미군락의 생활과 안토니라는 개미의 불운을 보여주는 뮤지컬]를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네이선은 화려한 언변으로 주인공 개미를 개미집에서 꾀어내는 잠자리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모든 관객이 네이선의 “타고난 연기력”에 찬사를 보냈지만, 두 남매는 연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네이선의 성격과 딱 맞는 배역이었다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네이선은 정말 재치 있고 매력이 넘쳤어요. 모두 네이선의 친구가 되고 싶어 했죠. 네이선은 늘 성경에서 ‘어리석은 자들’이라 부르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크리스틴이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왔을 때 네이선은 본격적으로 ‘어리석은 자들’과 어울려 다니고 있었다. 부모님은 크리스틴의 학교생활이나 학업 성적에 대해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이 네이선의 문제에만 매달렸다. 네이선은 매일 늦은 시간까지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고, 방에서는 포르노그래피가 나왔다. 크리스틴은 네이선의 방황이 안타깝고 슬펐지만, 동생이 그렇게까지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데 대해서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의식을 버려라


2011년 <종교와 사회 저널>Journal of Religion and Society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그리스도인 1/3이 평생 한 번은 기독교를 떠난다. 소위 “떠난 사람”, “역개종자”, “전그리스도인”등으로 불리는 이런 사람들은 교인 감소를 겪고 있는 다양한 교파들의 새로운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여론조사자와 블로거들은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로 신앙에 대한 지적 고민, 교회 리더들의 부도덕하고 불관용적 태도, 극심한 고통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교인들이 신앙을 버리는 일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최소한 누가복음 15:11-32에서 예수가 말한 탕자의 비유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탕자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떠난 탕자를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뒤에 남아 가족과 신앙 공동체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은? ‘동생’이 떠난 후에 아버지와 함께 남아 있는 나머지 2/3를 위한 신학적이고 실용적인 조언은 현재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한 아버지와 그의 두 아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탕자가 자녀든, 형제나 배우자든, 부모든, 친구든 이야기의 핵심은 동일하다.  P. C. 에니스 주니어가 <목회자 저널>Journal for Preachers에서 “주기적으로 탕자의 비유에 대해 설교를 해야 한다.…부활절 이야기나 크리스마스 이야기처럼 탕자의 비유도 복음의 정수를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반복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황급히 달려 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를 대변한다. 분개한 큰아들은 예수가 그 이야기를 하실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바리새인을 연상시킨다. 탕자의 비유는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에서 실제 탕자와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 나 큰아들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존재가 결합된 복합적인 반응을 보일 확률이 높다.

미셸과 앨리스, 샌드라, 크리스틴의 고뇌는 아버지의 사랑을 반영한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큰아들과 같은 엄격하고 정확한 판단으로 기울기 쉽다. 사실 공평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공평과 정의라는 가치를 가볍게 여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보면 연약한 인간은 반항, 낭비, 음탕 같은 탕자의 품성을 미워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방탕한 사람을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다.

헬무트 틸리케는 지금은 고전이 된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에 대한 주석에서 큰아들이 분노한 이유는 아버지의 후한 환대가 ‘비경제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마 20:1-16)에서도 볼 수 있듯이 뒤늦게 도착한 자가 아침 일찍 나와서 일한 자와 동일한 대접을 받는 것은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혜를 원하지만 솔직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은혜와 정의가 조화를 이루기를 바란다.

제이슨이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블로그에 공개한 후, 앨리스가 제이슨을 교회에서 마주치게 될까 두려워한 것이 바로 그런 경제적인 태도였다. 그녀는 교인들이 그녀의 진보주의를 지적하며 남편이 신앙을 버린 것이 그녀의 진보주의 혹은 그녀 자신 때문이라고 비난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치 그녀가 남편을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그 사건 이후 처음 맞는 주일 예배 직전 앨리스는 빈 방에 혼자 숨어 있었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앨리스는 잔뜩 긴장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가만히 그녀에게 다가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꼭 안아주었다. 앨리스는 그것이 “내게 꼭 필요한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고백했다.

일부 교인들은 앨리스가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변증론을 갈고 닦으면 남편을 다시 교회로 인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앨리스의 노력에 따라 남편이 믿음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한테 자꾸 뭔가를 해결하라고 요구하면 불안해져요. 상처도 받게 되고요. 가장 위대한 의사는 예수님이에요. 그분은 우리가 결코 할 수 없는 방법으로 탕자를 회복시켜주시죠.” 앨리스는 말한다.

“탕자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탕자가 떠난 것이 자신들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도 전적으로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죠.” 콜로라도주 포트 콜린스에 있는 팀버라인교회의 교육 목사인 제프 루카스는 말한다. 스스로를 ‘탕자 친화적 교회’라고 부르는 팀버라인 교회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나 믿음의 주변에서 방황하는 전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사역하고 있다.

우리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탕자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다보면 부당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샌드라는 그런 죄책감으로 여러 해 동안 고통받았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옷차림 때문에 제니퍼와 벌였던 말다툼을 떠올리던 샌드라는 두 사람의 문제가 패션 이상임을 깨달았다. “그런 다툼을 통해 제가 제니퍼의 인격을 공격한 것이 문제였죠.” 샌드라는 말한다. 상담은 샌드라가 큰아들의 역할을 포기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책임이다. ‘완벽한 부모’가 된다고 해서 자녀도 완벽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벽한 아버지가 있었지만, 인류 최초의 반항아가 되었다.

“이번 시험을 통해 인생의 진실을 많이 깨달았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하나님에 대해 배운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제니퍼가 하나님께로, 그 아이의 원래 모습으로, 그리고 가족에게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는 일만 제외하고요.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또 선하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세요. 제니퍼도 사랑하시죠. 기다림이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샌드라가 말한다.

반면에 크리스틴의 부모는 아직 그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부끄러운 마음에 아직 교인들에게 네이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네이선은 기독교 대학에서 퇴학을 당하고 집을 떠나 몇 년 째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고 있다. 「현대의 탕자와 회복의 길」Engaging Today's Prodigal의 저자인 캐럴 바니어에 따르면 불행히도 그런 식의 비밀 유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제 기능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

바니어는 목회자의 딸로 태어나 13년 동안 무신론자를 자처하다 극적으로 신앙을 회복한 사람이다. 그녀는 탕자에 대한 강연을 하기 위해 한 강의실에 들어섰던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청중이 굉장히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 낯선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 그 강의실 안의 모든 사람이 느끼는 동일한 감정, 즉 수치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족 안에 탕자가 있는 사람들은 쉽게 속내를 털어놓지 않습니다. 상대의 반응이 두렵기 때문이죠.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인 탕자를 판단하고 무시하고 배척할까봐 염려합니다. 사실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바니어는 말한다. 하지만 지원을 받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큰아들’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는 일은 중요하다. 교인들과 상황을 공유하는 일은 탕자의 회복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그것은 “한번 시도해볼 만한 적극적인 방법이자, 당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확실히 개선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이라.”

 

자비심과 적의


그러나 교회도 탕자나 탕자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어떤 사역을 제공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앨리스는 탕자의 아내로서 가장 곤란한 일 중 하나는 남편 문제가 교인들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말한다. “남편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편에게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게 됩니다.”

미셸에게는 교회와의 관계보다 전남편과의 관계가 더 문제다. 확실히 그녀는 큰아들의 분노, 아니 그 이상의 분노를 느낄 만한 상황에 있다. 그러나 분을 품을수록 그녀의 상처만 더 커질 뿐이다. 아이들은 엄마도 자신들처럼 아버지를 ‘잃어버린 영혼’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장남은 집안 행사가 있을 때 아버지와 아버지의 새 여자친구를 초대하기도 했다. 미셸도 조금씩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남편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일깨워주었죠.” 지금은 남편 없는 삶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만약 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고 가족과 화해하려 한다면, “저는 탕자 이야기의 아버지처럼 행동할 겁니다. 몇 번이고 두 팔 벌려 집으로 돌아온 걸 환영해줘야죠.”

제프 루카스 목사에 따르면 이런 적의 섞인 자비심은 일정 부분 ‘거룩한 백성’인 복음주의자들의 유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특별한 기독교 전통과 ‘교회는 망가진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조화시키는 방법을 모른다. “우리는 교회는 순결한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는 신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악에 맞서기 위해 자주 인용하는 바울 서신의 구절들은 역설적이게도 그런 죄악들이 이미 초대 교회부터 교회 안에 만연해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루카스는 지적한다. 현대 교회가 1세기의 교회와는 다를 거라고 기대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면서 큰아들의 역할을 하는 대신에―사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비난함으로써 아버지의 권위를 찬탈하고 있었다―자신을 탕자와 동일시해야 한다. 아버지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 아버지의 은혜를 받는 존재 말이다. “우리는 자신이 탕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받고 있는 아버지의 은혜를 탕자와 나누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강박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루카스는 촉구한다. 루카스에 따르면 우리는 관대하게 은혜를 베풀 자격이 없다. 우리 역시 절실히 은혜가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목사이자 기업가인 롭 파슨스 역시 같은 의견이다. “서구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탕자들의 절반이 아직도 교회 신도석에 앉아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귀향이란 교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돼지우리 안에서 탄식하던 탕자처럼 자신의 죄를 깨닫고 절망하는 일이다. 큰아들은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은 채 계속 죄를 짓고 있었다.” 「탕자의 귀향」Bringing Home the Prodigals의 저자인 파슨스는 지적한다. 큰아들 역시 “모든 면에서 자신의 동생만큼이나 ‘귀향’이 필요한 존재였다.”

대니얼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신실했던 룸메이트 스티븐의 의심과 방황을 목격하면서 대니얼의 마음은 더욱 하나님을 향했다. “스티븐의 반항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제 신앙은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대니얼은 고백했다. 고뇌하는 스티븐의 모습을 보면서 대니얼은 스스로 자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대니얼과 스티븐은 여전히 룸메이트로 지냈지만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지난해에 졸업을 하고 나서는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신앙이 굳건해진 대니얼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신학을 가르치고 싶어 한다. 룸메이트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던 스티븐이 방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대니얼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불가능을 위한 기도


교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든, 아버지의 밭에서 일을 하든,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전적인 사랑이 필요하다. 큰아들도 탕자만큼이나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한 존재다. 헬무트 틸리케에 따르면 우리는 큰아들의 태도를 “점잖은 속물근성에 불과”하다고 일축하기 쉽다. 그러나 자비로운 아버지는 “큰아들의 삶을 내면에서, 마음의 관점에서 보시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큰아들의 분개를 힐책하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는 “온전히 나를 믿고 따르는 자는 신뢰할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이 반짝인다. 틸리케는 경탄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얼마나 광대한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태도와 행동을 포용하고도 남는다.”

‘방탕’prodigality이라는 개념의 중심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놓여 있다. ‘탕자’라고 번역되는 ‘prodigal’(방탕한)이라는 단어에는 ‘다량의’, ‘아낌없는’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작은아들에게 적용될 때처럼 ‘낭비하는’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도 전달하지만 ‘과도한’, ‘풍성한’, ‘호화로운’ 같은 긍정적인 의미도 전달한다. 따라서 하나의 단어가 작은아들과 아버지라는 양극단의 존재에 모두 적용될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방탕을 뛰어넘는 풍성함을 보여준다. 작은아들이 떠날 때와 돌아올 때 아버지가 보여주는 한결같은 사랑은 ‘과도한’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과거의 과오도 현재의 이해관계도 철저히 외면한 조건 없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마음껏 낭비할 자유를 허락하면서도 모종의 회유, 설득, 협박을 통해 탕자를 지혜로운 삶으로 복귀시키려는 시도조차 없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끊임없이 기도하며 무한히 인내하는 사랑이다.

크리스틴이 남동생을 사랑하는 방법도 이와 비슷하다.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와 있던 어느 날 밤, 크리스틴은 또 귀가 시간을 어기고 밤늦게 돌아온 네이선이 부모님과 말다툼을 벌이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베개를 덮어쓰고 귀를 막아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여름 내내 계속된 다툼이었다. 물론 그 전 해 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날 밤, 크리스틴의 뇌리에 얼마 전 대학 집회에서 들은 연설의 내용이 떠올랐다. 연사는 불가능한 일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학생들을 독려했다. 크리스틴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전등을 켜고 머리맡에 있던 기도 일기를 펼쳤다. 그리고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세 가지 기도제목을 적었다. 그중 하나가 네이선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그 후로 10년이 흘렀다.

현재 크리스틴은 한 기독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매일 수업에 들어가기 직전 그녀가 한 번씩 들여다보며 자신을 점검하는 거울 가장자리에는 다양한 사진들이 꽂혀 있다. 그녀의 시선이 가장 자주 머무는 곳인 거울 오른쪽 위 귀퉁이의 사진 속에는 잘생긴 흑인 남성과 크레올 여성, 그리고 구릿빛 피부에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작은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 속 남자는 동생 네이선이고 여자는 네이선의 부인, 그리고 작은 소녀는 크리스틴의 하나뿐인 조카다. 매일 아침 그 사진을 볼 때마다 크리스틴은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온다. 네이선은 아직도 탕자의 여정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터무니없고 불가능해 보이는 기도를 드린다.

많은 신학자들이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요구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바란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필요했던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하면, 탕자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도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던 탕자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우리도 모두 탕자들이다. CT

 



캐런 스왈로 프라이어 리버티대학교 영어학과 교수이자 「운명적 만남: 내 영혼의 문학」Booked : Literature in the Soul of Me의 저자다. 해석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노예폐지론자 한나 모어Hannah More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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