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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가장 잘 아신다하나님의 부성을 표현할 때 그분의 본질적인 속성이 잘 전달된다
사이먼 챈  |  Simon 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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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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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가스펠 프로젝트
Global Gospel Project

난 40년간 하나님을 지칭하는 전통적 용어는 줄곧 비난을 받아왔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전통적 용어 대신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면서도, 하나님을 지칭하는 남성적인 단어들, 특히 아버지 같은 단어를 신학 용어에서 빼야 한다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또한 교회가 좀 더 포용적이 되려면 남성 중심적 언어를 남성과 여성 모두를 배려하는 언어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한쪽 특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을 표현하려면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의 특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의 밑바탕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용어들은 단지 하나님의 인간적 특성을 묘사하는 것이며, 이는 특정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성경 전반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남성적 이미지는 고대 부권제 사회를 반영한다. 비평가들은 성경의 종교가 여성을 해치거나 지배하는 신념과 제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던 가부장적 가치를 흡수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학이 여성의 경험에 기초해 여성에게도 설득력 있는 종교로 재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 포용적gender-inclusive 언어는 수십 년간 주류 개신교와 자유주의 가톨릭의 주요 관심사였다. 일부 복음주의자들도 이 문제를 고려하기 위해 적절한 타협점을 찾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성경과 기독교 전통 안에서 하나님을 남성적 언어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들어낸 것인가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표현하는 데 여성적 이미지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자녀들을 보호하고 위로하시는 모습으로 자주 그려진다(사66:12-13, 호11장).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어머니로는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경 기자들이 속한 당시 문화와 비교해볼 때 이는 독특한 현상이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여신 숭배 문화가 일반적이었고, 여신 숭배 문화가 아니라도 최소한 남성신을 보완하는 역할로 여신이 존재했다. 가나안의 아세라, 이집트의 이시스, 바빌론의 티아마트가 그 예다. 하나님을 남성으로 묘사하는 문화가 가부장제를 반영한 것이라면, 논리적으로 여신 숭배는 모권제 사회를 반영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여성이 우월한 위치에 있거나 최소한 남성과 평등한 사회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도 여신을 숭배하는 많은 사회가 여성을 억압한다. 한 예로 힌두교의 여신 칼리를 숭배하는 사회를 보면 여성에 대한 대우가 결코 낫지 않다. 심지어 칼리 신자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본성에 거스르는 신의 개념에 굴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대로 두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가나안의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유독 우상숭배를 맹비난했던 이유는 백성들이 끊임없이 그런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성fatherhood이라는 이스라엘의 사상은 고대 세계의 일반적 경향에 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사상은 이스라엘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아래 있었던 오랜 역사의 결과였을 것이다. 교회는 이스라엘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기독교의 독특한 신론을 발전시켰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부성은 두 가지 분명한 개념을 전달한다. 첫째, 그것은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를 가리킨다. 이는 사도신경 서두에서 말하는 내용과 같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바울의 저작들에서도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흔히 등장한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신다. 이는 훗날 교회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나온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심으로써 예수님은 삼위일체 교리의 시작점인 성부와 성자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나타내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늘 아버지’라 부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이를 통해 그분이 영원부터 성부와 누리셨던 사랑의 관계는 오늘날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이들에게로 이어진다(롬8:15).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이며, 상호 간의 사랑과 존경이 그 특징이다. ‘아버지’라는 용어는 이 같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친밀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많은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남성적 은유 자체가 여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성경의 용법과 잘 맞지 않는다. 하나님의 남성적 이미지가 오로지 ‘남성적’ 속성만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54:5-7은 하나님을 남편으로 묘사하면서 멀어진 이스라엘을 향해 ‘큰 긍휼’(전형적인 ‘여성의’ 속성)로 다시 돌아오기를 요청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사49:13 참고). 아버지라는 용어가 배제하고 있는 것은 여성적 속성이 아니라, 수많은 고대 종교들에 나타나는 신의 이미지, 즉 냉담하고 비인격적 존재라는 개념이다.

둘째, 아버지라는 은유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나타낸다(사64:8, 말2:10).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5) 아버지라는 한 단어 안에는 상반된 속성, 즉 피조물을 사랑하는 동시에 다스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이 함께 담겨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이스라엘과 고대 근동 문화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공통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세상을 자신과 분리된 것으로 지으셨다고 보는 반면, 근동 사회에서는 어머니라는 은유로 세상을 낳은(세상은 신의 본체의 연장이 된다) 모신mother-goddess을 표현한다.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 세상이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고 실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개념을 함축함으로써 기독교의 창조 교리를 손상시킨다. 따라서 아버지라는 개념은 올바른 창조 교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기독교 이야기를 다시 쓰다
하나님의 부성이 피조물에 대한 통치와 친밀하고 깊은 사랑을 암시한다면, 성 중립적인 용어는 그러한 개념을 전달할 수 없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기독교 이야기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 이야기는 단순한 예화가 아니다. 그것은 일반 원칙이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예화가 아니다. 그런 이야기는 일단 원칙을 이해하고 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기독교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실제로 형성하는 것이다. 신학자 조지 린드벡의 말을 달리 표현해보면,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이야기 속으로 흡수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삼위일체 정체성이 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부 하나님,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에게 그분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이야기를 짧게 줄인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그분은 성부, 성자, 성령이다. 루터란 신학자 로버트 젠슨의 말을 인용하자면, 하나님의 정확한 이름은 성부, 성자, 성령이다. 기독교적 경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할 때 진짜 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다른 수많은 수식어(‘긍휼한’, ‘자비로운’, ‘사랑하는’, ‘전능한’ 등)를 붙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기독교적 계시의 하나님을 다른 일신교의 신과 충분히 구분하지 못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무시한다면, 기독교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변질된다.

진보적인 생각을 지닌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역설적이게도 무슬림들은 이 문제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최근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진 알라 논쟁에서 불거진 일이다. 일부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레이어 성경을 번역할 때 하나님을 알라로 표기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진한 무슬림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우려는 신학적으로 타당하다. 알라는 신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호칭이지만(아라비아어의 El과 같은 것) 시간이 흐르면서 무슬림들 사이에서 고유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호칭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는 알라와는 별개로 나름의 신학적 가치를 지닌다. 알라라는 호칭이 유대교 및 기독교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슬람교와 독특하게 결부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을 칭하는 고유의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 교회는 전례 중에 이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다름 아닌 이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형용사를 갖다 붙인다 해도 일반적인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무슬림의 정체성을 제대로 분리하지 못한다. 유대인이나 무슬림 역시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은혜롭고 긍휼이 많으며 거룩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형용사는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을 다 합쳐도 삼위일체의 이름이 되지는 못한다. 무슬림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보고 특별한 연관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예배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 교회뿐이다. 하나님의 신적 부성이 약화될 때, 교회는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동시에 드러나는 두 가지 속성
아버지라는 말을 포기하는 것은, 기독교 이야기의 본질에 커다란 구멍을 남기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말을 포기한다면, 신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이해하고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라고 가르치는 많은 교회의 예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고교회파high-church 전통을 따르는 예배에는 모든 참석자들이 특정한 신조를 낭송하거나 함께 읽는 순서가 포함된다. 하지만 부성에 관한 표현이 사라진다면, 이런 공적 낭송을 할 때 두 가지 이상의 역설적인 용어를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호칭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를테면 “전능하신 아버지”와 같은 이름 말이다.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이 표현은 가톨릭교회에서 성찬 기도를 맺는 노래로 사용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성공회의 <대안예식서>Alternative Service Book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 표현하며, 성찬 기도에서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늘의 왕, 전능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이라 부른다.

신학자 고든 래스롭은 이런 병렬이 하나님의 신비를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으로, 거룩하면서도 친밀한 것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라 동시에 두 가지 속성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대의 전례에서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 혹은 “자비로운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병렬적 표현이 사라질수록 예배는 신성한 신비의 감각을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너무 먼 곳에 계시다거나, 아니면 너무 친절하시다고 느끼게 된다.

성 차별적 언어를 없애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은 하나님을 칭할 때 남성대명사 사용을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계속 반복하거나 ‘그, 그분 자신의, 그분의’라는 단어 대신에 ‘하나님 자신의’라는 어색한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부 보수 개신교도들도 이러한 혁신에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칭대명사 사용을 제한한다면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을 경시하게 될 것이다. 아직 ‘기독교적’ 담론이 지배적인 서구사회에서 이런 주장은 그나마 쉽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언급할 때 서구인들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떠올린다. 하지만 “많은 신과 많은 주”(고전 8:5)가 있고 비인격적인 궁극적 실재를 믿는 아시아에서는 인격적인 용어로 하나님을 이야기해야 한다. 미미한 도의심이 다칠까 두려워 그런 필요성을 외면하는 것은 불행한 일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러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특히 기독교 이야기가 재연되는 전례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버지는 문화적 제약을 받는 용어가 아니라 신적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타당한 이름이다. 그 이름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그의 아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정의되는지 보여준다. 교회의 정체성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삼위일체의 정체성은 위기에 처해 있다. 포용적 언어를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얻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신학적 대가를 요구한다. CT 

사이먼 챈 싱가폴 트리니티신학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이며 전례의 신학Liturgical Theology: The Church as Worshiping Community의 저자

Simon Chan, "Father Knows Best" CT 2013:7/8; CTK 2013:11

[수정:2015.02.15] [게시:201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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