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는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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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 승인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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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누구든지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진정한 의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장 17절


“받는 것보다 나누어 주는 것이 더욱 복될 뿐 아니라 훨씬 쉽다”고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는 말한다.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쉽다. 그럴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베풀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만들어 놓으신 인적 자원 센터를 활용한다.

어떤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격려의 말을 건넬 때면, 우리는 우리가 거룩한 땅을 거닐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눈물조차도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다. 그가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이며 그의 고통에 우리도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이 소중한 사실을 우리의 눈물이 그에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만함으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베푸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또 우리는 누구에게 언제 얼마나 베풀지 결정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 물론 그런 결정을 할 때 늘 실수를 한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온통 관심을 쏟고,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다.

이미 충분히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이 나눠 주고, 주려 있는 사람들에게는―그 주림이 단지 따뜻한 칭찬 한 마디일지라도―인색하다. 우리는 무엇을 주면서, 받는 사람이 정말 받기 싫을 정도로 온갖 생색을 낸다. 우리의 나눔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누어 주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당신이 항상 받는 사람의 입장에만 서 있어야 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스스로 수동적이라 느낄 것이다. 항상 누군가를 의지해야 하고, 주고 받는 것을 따져 보면 늘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걱정들을 한다. “낯선 사람에게 목욕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아프면 어떡하지?” “전신마비가 오면 어떡하지?” “정말 끔찍한 죄를 지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까지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병들거나 망하면 어떡하지?”

코소보 사태가 한창이던 무렵, 코소보의 아이들이 자기 부모들을 보면서 얼마나 비참한 현실을 목격했는지 우리는 뉴스를 통해 보았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들이 집에서 내쫓겼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군인들에게 끌려가거나, 군화로 짓밟히는 것을 보았다. 자기 부모가 폭력과 욕설과 저주로 모욕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쫓겨난 코소보 난민들은 며칠을 걸어서 이미 포화 상태가 되어 버린 난민 캠프에 도착했다. 난민 캠프에서 사람들은 모두 목마름과 극한 피곤에 지쳐 있었고 캠프는 악취를 풍겼다. 이런 처지에서 부모는 자기 아들딸에게조차도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비참함을 경험했다. 아이들은 자기 부모가 자기네와 똑같이 줄을 서서 배급을 받는 것을 보아야 했다.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남에게 의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쓴 책에서 스코트 호지(Scott Hoezee)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의존은 그것이 어떤 형식이든 오명을 달고 있다고 지적한다. 복지 원조에 의존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당신이 아는 그리스도인 중에 몇 명이나 다른 집사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기뻐하고 교회 구제 헌금 받기를 원하겠는가? 대외의존 선언(Declaration of Dependence)을 하고서도 국민에게 애국심을 호소할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다시 생각해 보지만, 우리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되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쉽다는 것 또한 잘 이해하고 있다. 주는 사람에게는 능력이 있다. 주는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주는 사람은 은혜를 베풀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시며 하신 말씀에 더욱 놀라게 된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를 봐라. 하나님 나라는 이 아이들과 같은 이들에게 주어진다. 너희는 아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는 것처럼 받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를 결코 가질 수 없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수세기에 걸쳐 많은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감상적으로 해석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만이 갖고 있는 미덕에 관한―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그런 것들도 가끔 있다―설교를 듣게 되는 본문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 대해 그저 감상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제임스 브리치(James Breech)가 지적한 것처럼, 예수님은 어린아이들도 추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곤경을 자초한 어린아이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적도 있다. 같이 놀던 동무들이 서로 이렇게 불평한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눅 7:32).
 

여기서 보듯이 예수님은 아이들이 아주 순진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특별하다 말씀하지 않으신다. 어린아이들을 신뢰하는 눈길조차 찾아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아기(infant)를 위해 축복하실 때―누가는 여기에 어린 아기라는 단어를 쓰지 않지만― 그분이 보고 계시는 것은 도움이 너무나 많이 필요한 아이다. 어린 아기는 아주 많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다. 이처럼,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어린아이들은 낮은 자들이었다. 그들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아이들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와 같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누가복음 18장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비유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낮추신 콧대 높은 바리새인과 하나님이 높이신 낮은 세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우리가 낮은 자리에 있으니 어린아이들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1세기의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그때에는 “계획된” 아이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아이들을 위한 가정을 원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그저 밥이나 축내는 입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아이가 염소 젖을 짜거나 포도나무에서 수확을 하려면 수년을 먹여야 했다. 이런 어린아이를 보시며 예수님은 사회 구조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을 보셨던 것이다.

조엘 그린(Joel B. Green)은 1세기 어린아이들은 줄 만한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천한 대우를 받았다고 적는다. 그들은 마을의 번영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은 외양간을 세우거나 우물을 팔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하루 종일 드러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는 젖은 기저귀뿐이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어린아이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교훈이 하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들을 지명하신 이유는 그들이 “받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을 만들어 내는 재주는 없다. 하지만 받는 데는 최고다. 만약 젖꼭지나 손가락을 어린 아기에게 내민다면 주저 없이 입을 벌릴 것이다.

 

건강한 아이는 음식으로부터 필요한 영양분을 얻을 줄 안다. 그리고 사랑을 통해 사랑으로 영양분을 얻을 줄 안다. 이것은 아주 유익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점에서 정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우리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받는 데는 절대적으로 취약하다. 우리는 의존하기를 싫어한다. 우리는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선물을 기쁨으로 받지 못하고 갈수록 더 냉소적인 자세를 취한다.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가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누가 우리에게 선물은 주면 우리는 도리어 그들을 다그친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누군가 피아노를―또는 어떤 악기든―잘 연주했다고 칭찬을 하면 우리는 자신을 깎아 내린다. “아니에요, 오늘은 정말 못했어요.” 이렇게 우리는 선물이나 칭찬을 받지 않는다. 선물을 마다하며 선물하는 이를 무례한 이로 간주한다. 이것은 사실상 칭찬하는 이에게 “제 연주를 칭찬하신 것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셔서 그러신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듯 받는 것에는 너무나 서툰 우리다. 마을이나 학교에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기증자를 비판하는 것이다. 정말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가졌던 것을 잃어버렸다. 옛적에 우리는 그 무엇도 비판 없이 받을 줄 알았다. 그리고 받은 것으로 살아 나갈 줄도 알았다.

어린아이들은 미식축구의 와이드 리시버(Wide Receiver: 미식축구 경기 중 던져진 공을 받아야 하는 이들-역주) 같다. 튼튼한 팔을 가진 쿼터백이 와이드 리시버를 향해 공을 던질 때, 멈춰 서서 이의를 제기하는 선수는 없다. “잠깐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사람이 나에게 던지는 이유가 정말 무엇입니까?

나는 이번 쿼터에 공을 만져 보지도 못했어요. 왜 이제 와서 공을 받아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와이드 리시버는 자신에게 오는 패스만을 통해 살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받을 수 있는 패스란 패스는 모두 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메시지도―의존은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의구심을 쌓아 가지 않고―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와이드 리시버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실 수도 있다. 평화와 정의가 가득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있으며 또한 이 세상의 저편에 있다. 어느 쪽을 택하든,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 예수님은 그 나라를 가깝게 하셨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임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린아이처럼 이것을 받아서 어른처럼 우리 자신을 그 나라에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 모든 것―손과 입과 마음과 영혼―을 열어 받아들이고 하늘나라의 보물을 다른 사람들과 창조물이 활짝 꽃필 수 있도록 돕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조차도 예수님을 만질 수 있을까 해서 그분께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다가오는 그들을 보고 제자들은 근엄하게 막아섰다. 하지만 예수님은 되레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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