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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현대 동화들디스토피아 이야기가 10대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힘은 어디에
엘리사 쿠퍼  |  park73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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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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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에 또다시 디스토피아 시즌이 돌아왔다. 11월 1일에는 올슨 스캇 카드의 공상과학 영화 <엔더스 게임>이 개봉했고(국내 개봉은 12월 31일/역주), 그 3주 뒤에는 수전 콜린스의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국내 개봉은 11월 21일/역주)가 지난해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에 맞먹는 흥행 성적을 노리며 극장에 걸렸다. <판엠의 불꽃>은 2012년 미국 내에서 세 번째로 높은 수입을 올렸다. 요즘 흥행작들을 보면 세계의 종말이나 종말 이후에 대한 어두운 이야기가 대세인 듯하다. <판엠의 불꽃>은 <어벤져스>와 <다크 나이크 라이즈>의 뒤를 이어 4억 8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그런데 최근의 디스토피아 작품들에는 더 암울한 반전이 숨어 있는데, 영화의 주인공과 피해자들이 모두 아이들이라는 점이다. 이 아이들은 성인 수준의 폭력을 저지르고 목격한다. 그래서 스티븐 킹은 <헝거게임>의 원작 소설을 평하면서 “영화 제작자들이 이 작품에 PG-13등급(13세 이하 어린이들에게 엄격한 주의와 지도가 요구되는 영화/역주)을 받으려고 기를 쓰는 모습을 한번 지켜보자”고 말했다.

어쨌든 <헝거게임>은 2012년에 개봉한 1편과 올해 개봉하는 속편 모두 PG-13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열혈 팬들조차 이 작품의 폭력적인 장면들은 부모의 신중한 판단을 요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런 팬의 한 사람인 매리 폴스는 온라인판 <타임>에 올린 “<헝거게임>을 볼 때 여덟 살 난 아들을 데려가지 않은 이유”라는 글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유전자 조작 개들이 영화 속 악역을 몇 시간이고(책으로는 4쪽이 넘는다) 물어뜯는 부분을 인용했다. 결국 “너덜거리는 살덩어리만 남은 내 원수가 신음소리를 내고…복수심이 아니라 불쌍한 마음에 나는 그의 두개골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다.”

폴스는 자기 아들이 잠들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침대 발치에 있는 애완견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잘 자, 강아지야! 이 책 읽고 나서도 난 우리 강아지 계속 키울 거예요. 그래도 괜찮죠?”

새로운 디스토피아 문학의 출현
문학평론가 카터 카플란은 조너선 스위프트가 1726년에 발표한 「걸리버 여행기」 이후로 우리에겐 늘 다양한 형태의 디스토피아가 존재했다고 말했다. “어둡고 염세적이며, 때론 피해망상과 경악과 히스테리를 반영하는” 디스토피아 문학은 “세상이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를 그린다.”

레브 그로스먼이 <타임>에서 지적했듯, 존 크리스토퍼가 1967년에 발표한 ‘트라이포즈 시리즈’로 인해 이 디스토피아는 새로운 지지층을 얻게 됐다. 그로스먼은 “그전까지만 해도 그런 유의 소설은 성인용에 국한되었지만, 1960년대 후반 이후로는 인류의 비극적 미래를 다룬 책들이 더 어린 층을 왜곡해 그려내기 시작했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작품에 청소년들이 등장하면서 더욱 인기를 끌었다. 서점과 도서관 관계자들은 디스토피아가 남성과 여성, 책벌레와 베스트셀러 추종자들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먹히는 것을 알게 됐다. 「엔더의 게임」(루비박스 역간)과 ‘헝거게임 3부작’(북폴리오 역간) 같은 책들은 원래 십대를 위해 쓰였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많은 독자들이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 장르 때문에 힘들어하는 유일한 집단은 학부모들이다.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부모들은 별로 존경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칠게 보이려 애쓰는 아이들의 입에서는 비속어가 쏟아지고, 성을 암시하는 말과 각종 편견이 난무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디스토피아 작품들을 비판하는, 비교적 피상적인 이유들이다. 한층 더 깊이 들어가보면, 이 이야기들이 겉보기보다 더욱 충격적이고 잠재적 영향이 큰 것을 알게 된다.

「캣칭 파이어」와 「엔더의 게임」은 둘 다 파괴에 대한 기억과 공포에 사로잡힌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캣칭 파이어」는 내전을, 「엔더의 게임」은 외계인 침공을 배경으로 한다. 「엔더의 게임」을 보면, 사디스트적인 전투학교에서 여섯 살짜리 앤드류 ‘엔더’ 위긴 같은 아이들을 모집한다. 사람들은 이 아이들의 기술로 외계인의 다음 공격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런 세계에서 아이들은 원치 않는 영웅이요, 원치 않는 구세주요, 궁극적으로는 원치 않는 희생양이 된다. 이 점은 청소년들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아동과 10대들이 세상을 구하는 모습을 좋아해서 이런 이야기들을 즐겨 읽는다는 주장을 보다 복잡하게 만든다. 헝거게임 3부작을 통틀어 어른들은 자기들 싸움에서 주인공 캣니스를 노리개 삼아 나라를 좌지우지한다. 엔더 역시 그를 교묘하게 조종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군대의 희생양이 된다.

실제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아이 같은 순수함에 대한 반직관적 동경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엔더의 게임」에 등장하는 가슴 아픈 내용 중에 이런 장면이 있다. 엔더의 소대장 딩크는 도서관에서 ‘어린이’라는 단어를 찾아봤다고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린이가 뭔지 좀 알게 됐는데, 우린 어린이가 아니에요. 어린이는 때로 질 수도 있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죠. 아이들은 군대에 있어서는 안 되고, 사령관도 아니랍니다. 40명이나 되는 다른 아이들을 지배하지도 않죠.…우리는 사실 어른이 되려고 애쓰고 있는 거예요.” 저자는 이 이야기가 궁극적으로는 “어린이, 즉 거의 극복 불가능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약함의 아이콘”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이 이 책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는 이 이야기가 반영하고 확인해주는 자신들의 약함을 보기 위해서라는 이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슬그머니 등장하는 신앙

어떤 의미에서 디스토피아 이야기들은 종교 서적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디스토피아 서사는 신앙의 위로가 눈곱만큼도 없는 세계를 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엔더의 부모는 세속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비밀리에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고, 성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여주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어준다. 그러나 이런 책들에서 종교는 희미하고 비밀스러운 과거의 기억일 뿐이다. 엔더의 친구 알라이가 그의 뺨에 입맞춤을 하며 ‘살람’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내뱉자 엔더는 어머니가 자기가 잠든 줄 알고 기도해주던 일을 떠올린다. 엔더는 그들의 몸짓을 “감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성스러운 선물”로 본다.

이런 책들의 어두운 분위기 그 자체-책의 전제는 물론, 비극에 가까운 냉혹한 결말까지-가 결국, 책의 주인공과 독자 모두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존재를 필요로 함을 시사한다. 이 책들은 “하나님 없는 세상을 과연 견딜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어쨌든 그들이 사는 세계도 우리가 사는 세계와 그리 멀지 않다. 영화 <헝거게임>에는 무장 병사들이 단상에서 추첨을 기다리는 아이들 주변을 지키는 장면이 나온다. 1940년대 머리모양과 복장을 하고 있는 고요하고 긴장된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가족과 아이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내몰리던 그때가 떠오른다. 우리가 디스토피아 이야기를 부적절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만 취급한다면, 인간이 사실은 남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도, 소위 대의명분이란 것을 위해 아이들을 희생하면서도, 말없이 조용히 서 있을 수 있는 존재임을 잊는 셈이다.

진지한 책
어렸을 적에 우리 집에는 그림 성경 동화가 한 권 있었다. 그 책에는 아기자기한 만화나 예쁜 수채화가 아니라 끔찍한 그림들이 가득했다. 아벨이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피가 흘러나오는 장면, 결박당한 삼손이 성전 벽을 무너뜨릴 때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표정, 솔로몬의 부하가 한 손에는 벌거벗은 갓난아기를, 다른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어명을 기다리는 모습 등.

그림이 썩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성경이 진지한 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됐다. 성경은 그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우리에게 어려운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질투와 교만과 거짓말의 대가가 무엇인지 경고해주었다. 또 상상으로라도 이런 유혹들을 떠올리는 것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었다.

디스토피아 세상에는, 모든 것이 왜곡되었지만 사랑만은 그대로 남았다. 캣니스와 여동생 프림. 엔더와 누나 발렌타인. 사랑하는 누이를 구하기 위해, 캣니스와 엔더는 싸우고 고통을 감수하고 그들을 위해 살아남는다. 유토피아를 다룬 작품으로 논란이 분분한 로이스 로리의 뉴베리상 수상작 「기억 전달자」(비룡소 역간)에서는 어린 주인공 조너스가 사랑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일말의 희망을 엿본다.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 정확한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세상이 달라질 길은 틀림없이 있다.” 4부작의 후속 작품들을 보면, 사랑이 거듭해서 악을 극복하면서 디스토피아를 무너뜨리고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한다.

엔더가 어머니의 비밀 기도를 기억하는 것은 “거룩함에 대한 기억”이다. 이 책은 “엔더의 어머니가 아무도(심지어 엔더조차도) 보거나 듣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를”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디스토피아에서조차 그런 거룩함과 사랑에 대한 기억은 변함없이 살아 있다.

엘리사 쿠퍼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어시스턴트 에디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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