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라고 물을 수밖에 없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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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라고 물을 수밖에 없을 때
  • 박명철
  • 승인 2014.02.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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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놓아주세요. 반드시, 반드시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장하니까요.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건 구도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일이다. 이 길에 섰던 이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누구나 한 번쯤 던졌을 법한 질문이 있다.

대체 왜?

인생의 어느 한순간 죽을 병에 걸리기도 하고, 가난에 내몰려 자존감까지 무너져 내리거나, 사랑한 사람으로부터 오해를 받아 떠나야 하는 순간도 온다. 그런 순간, 곧 인생의 높고 가파른 봉우리를 넘어가는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나를 지켜야 할까? 힘에 겨워 많은 것이 무너져 내릴 때에도 끝내 잃지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비로소 너른 평지에 이르러 내가 넘어온 봉우리의 가파른 시간을 돌아보며 ‘당신이 옳았습니다’라고 그분을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을까?

공지영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는 이처럼 결코 가볍지 않은 과제를 기둥으로 삼아 풀어낸 이야기이다. 예리하고 튼튼하고 네모반듯하되 책상머리를 벗어나지 못한 신학적인 논문이 아니라 둔탁하고 질척질척하여서 어디 발 딛고 설 만한 믿음조차 없어 보이지만 굽이굽이 흘러서 비로소 바다에 이르는 물길처럼 사연 많고 눈물 깊은 울림을 가진 이야기이다.

‘하나님, 당신이 옳았습니다’라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간의 고독과 눈물이 쌓여야 한다는 걸 그저 몇 줄의 문장과 텍스트 분석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내 마음을 흔들고 적시기엔 얼마나 메마르고 인위적인가. 간단한 수술만으로 병을 낫게도 하지만, 그 병이 마음에 먼지처럼 쌓인 것이라면 오히려 시간을 두고 먼지를 세포로 변화시키는 처방이어야 비로소 온전한 치유라 하지 않을까.

이야기의 힘은 그런 것이지 싶다. 공지영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기자처럼 취재하여 쓴 글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진심을 숙성시키듯 오래 품고 물들인 뒤에야 풀어낸 이야기여서 힘이 세다. 더욱이 「높고 푸른 사다리」는 이야기를 취재하되, 그 신앙의 바탕을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 수많은 세월을 고통스럽게 묵상해온 시간이 있었다. 소설집 「별들의 들판」 등을 통해 간간히 툭툭 쏟아낸 적은 있으나 장편으로 그 본질을 등뼈 삼아 풀어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 글은 공지영이라는 작가가 삶의 한 막을 정리한 뒤 그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쓴 작품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게 한다.

이야기로 풀어낸 ‘신정론’
「높고 푸른 사다리」는 신부 서품을 앞둔 수도원의 젊은 수사 요한을 ‘나’로 불러왔다. 요한에게 다가온 인생의 봉우리 또한 ‘대체 왜?’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그분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항변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다. 신부의 길을 내려놓을 작정으로 사랑한 여인을 떠나보낸 일이 그중 하나였고, 세상에 더없이 순수하고 고귀한 영혼을 가진 두 친구, 함께 신부의 길을 가고자 한 친구들을 졸지에 떠나보낸 일이 다른 하나였다.

깊은 고통의 수렁에서 요한을 건져낸 힘은 요한보다 먼저 ‘대체 왜?’라는 질문을 처절하게 던지면서 그 길을 앞서 걸어온 사람들의 고백이었고, 그중 한 사람이 토마스 수사였다.

나이 스물두 살, 푸르디푸른 청춘의 때에 토마스는 고향 독일을 떠나 조선으로 왔다. 스스로 고난을 작정하였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이르고자 하였다. 세상의 끄트머리 어딘가에 위치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추락한 채 슬픈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다. 토마스는 거기서 조선의 사람으로 해방을 맞았고, 이때부터 자신이 걸어야 할 구도의 여정은 혹독한 시련 속으로 빠져들었다. 공산당 지배체제가 짜여지면서 신앙의 자유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정치권력을 장악해 나가던 그들은 토마스를 비롯한 수도원 사람들을 감옥으로 내몰았다. 토마스 수사는 지옥 같은 감옥에서의 시간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우리 열여덟 명은 가로 4미터 세로 2미터의 방에 수용되었습니다. … 우리는 밤이 되면 간수의 구령에 따라 누워 잠들어야 했습니다. 포개어 잔 탓에 옆 사람의 발이 제 코 앞에 닿아 있었고 제 발 또한 상대방의 얼굴을 겨냥하고 있었겠지요. 빈대와 벼룩, 이가 극성을 부렸지만 긁기 위해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습니다. 감방 구석에 조그만 배수구 하나가 있었는데 그게 우리 모두의 화장실이었습니다만, 뚜껑을 덮고 그 위에까지 누워서 잤습니다. … 간수들은 가끔 선심 쓰듯 우리에게 물 몇 바가지를 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입을 내밀고 그것이라도 받아 마셔 목마름을 채우려고 아우성치면서 입을 내밀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독일 수도원에서 이곳에 파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최소한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고, 최소한 세상을 어떻게든 선하게 살려고 애써온 사람들이었습니다. … (그런데) 간수가 장난치듯 뿌려주는 몇 바가지의 물에 이리 일어서고 저리 일어서면서 약한 형제들을 짓밟기까지 하는 제 모습을 보며 저는 그때 처음으로 물었습니다. 주님, 왜? 대체 왜? 왜입니까!”

토마스 수사로부터 들은 끔찍한 고통의 세월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했으나 그 세월을 살아내며 그들은 더 고귀한 존재가 되어 갔다. 거름더미에 쓰러져 파리 떼에 뒤덮인 채 죽어간 어느 수사의 깨달음은 그 시간을 겪지 않은 이들이 아니고는 결코 이르지 못할 소중한 진리였다.

그는 말했다. 모든 죄는 결국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했던 그 생각, 곧 ‘나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목소리의 변주라는 걸 깨달았다고. 그러니 감옥에서 그들을 탄압하던 사람들이나, 독일을 초토화시켜버린 히틀러와 그 일당들이나, 또 이 땅의 수많은 독재자와 고문하는 이들,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학대하는 모든 이들 또한 결국에는 그들이 학대하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그 깨달음의 연장선상에서 학대를 받는 모든 사람은 하와가 뱀에게 질문을 받을 때 느꼈던 그 혼돈, 그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건 당연하였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속였을지도 모른다는 혼돈,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에덴을 주었고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임을 간파하였다. 사랑을 의심하여 배신하게 만들려는 수작,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고, 나아가 우리 스스로를 존엄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이긴 싸움이라 했던가. 그러니 비참하게 죽으면서도 결국 그는 사랑을 지켜낸 셈이었다. 아무도 그에게서 하나님을 앗아갈 수 없었다.

맡기고 겸손하게 기다릴 뿐
토마스 수사는 그런 세월을 살아 온 수많은 이들의 증언자로 요한 앞에 있었다. 이제 늙고 병들어 누군가 음식을 먹여주어야 할 정도로 불편하게 살아가는 토마스 수사로부터 요한은 비로소 평화로운 삶의 비밀을 조금 이해할 듯하였다. 토마스 수사가 하나님께로 가기 전 요한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준 고백 또한 밑줄 그어둘 구절이다.

“젊었을 때 나는 평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제 겨우 하나 알게 되었어요. 평화는 고통 가운데서, 혼란 가운데서, 병과 늙음 그리고 죽음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붙들고 있는 거라는 걸. … 우리는 작고 가난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께 모든 걸 맡기고 겸손하게 기다릴 뿐이지요.”

그분께 모든 걸 맡기고 겸손하게 기다리는 삶, 그 삶을 일컬어 순명順命이라 말한다. 대체 왜? 그렇게 처절한 물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발동할 때, 그때가 비로소 내 어깨와 목의 모든 힘을 뺄 때라고, 그저 그분의 이끄심에 한 걸음씩 움직일 뿐이라고, 순명할 때라고, 그 시간을 먼저 살았던 이들이 증언한다. 또 이렇게 말한다. 정금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음성이, 그 시간에 내게 다가올 것이라고….

구도의 인생길은 어쩌면 이 세상을 가득 메운 한恨의 아우성을 듣기 위한 여정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여행을 가도 여기저기 이해할 수 없는 눈물들이 강물처럼 흐른다. 내 안에도 그 눈물은 끊임이 없고, 문득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에서 기생충 같은 욕설이 튀어나온다. 내 안의 존엄이란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러면 또 묻는다.

대체 왜?

그러면 어느새 우리 앞서 이 길을 걸어간 분들이 낮고도 분명한 목소리로 말해준다.

“당신 자신을 그대로 놓아주세요. 힘을 빼고 즐거워하세요. 그러면 어떤 항구에 도착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절대 미리 모든 것을 가르쳐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가르쳐주셨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장한다는 것을요.”

인디아 카라수다 강의 어부들은 평생 강물의 물살과 부딪치며 배의 노를 젓는 동안 어느새 물살만 봐도 강심의 깊이를 알게 된다고 한다. 어디쯤에서 물고기가 헤엄쳐 다닐지를 읽어낸단다. 오랜 세월을 강에다 배를 띄워 살아오는 동안 어부들의 감각 속에는 세상에서 단 한 장뿐인 자기 자신만의 지도를 간직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제쯤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구도의 걸음에서 어느 순간을 맞더라도 평화롭게 내가 디뎌야 할 걸음을 조절할 수 있는 나만의 지도 한 장을 갖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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