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 마비된 삶을 깨우는 마지막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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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 마비된 삶을 깨우는 마지막 보루
  • 박명철
  • 승인 2014.02.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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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이르고자 한다면
   

 

「감정수업」   강신주 |  민음사 | 528쪽  | 2013년 11월 


내가 그에게 담임목사 직을 내려놓을 것을 요구했을 때, 나는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잔 다르크처럼 높이 깃발을 올려 교인들과 ‘함께 가자’고 외쳤고, 나의 깃발 아래 모이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적인 동시에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쳐졌다. 시간이 흘렀다. 그를 몰아낼 때 내세운 요란한 죄목들이 언젠가부터 나를 향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죄목들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생각할 개연성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쳐진 사람은 억울하였을 법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이란 거센 폭풍우에 가려 그 미세하고도 잔잔한 개연성이 잔인하게 휩쓸리는 걸 놓치고 말았다. 결국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누군가를 향하여 애매하고도 폭력적인 깃발을 ‘하나님의 뜻’인 양 높이 치켜든 셈이었다. ‘후안무치’ 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낯 두꺼운 짓을 백주대낮에 저지를 때 쓰는 말이 ‘후안무치’이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던 무리들도 ‘후안무치’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들 가운데는 한때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귀 기울이며 앉아 있던 이도 있었을 텐데, 대체 왜 양심과 이성조차 마비된 채 그리 날뛰었을까? 이렇게 마비된 양심이 깨어나는 순간이 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날뛰던 순간을 깨닫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지는 그때의 감정을 ‘수치심’이라 한다. 수치심은 그러고 보면 후안무치의 마비상태를 깨우는 감정이다. “마비된 삶을 깨우는 최후의 보루”이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더블린 사람들」에서 수치심이 가져다주는 희망의 이야기를 끌어낸다. 주인공 게이브리얼은 아내 크레타와 순수한 사랑으로 결혼하였으나 어느덧 빛이 바랬고, 더블린의 관습에 찌든 속물이 되어 갔다. 크레타는 남편이 순수한 사랑을 잃어갈수록 첫 사랑 마이클 퓨리를 그리워한다. 마이클은 소년이었을 때 밤새도록 비를 맞으며 크레타를 기다리다 폐렴으로 죽어 갔다. 크레타가 그 첫사랑 마이클을 언젠가부터 절절하게 그리워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게이브리얼은 속물로 변해버린 자신을 깨닫는다. 억누를 수 없는 수치심이 엄습한다. 게이브리얼도 이 수치심의 문을 통과하며 비로소 마비된 삶에서 깨어난다. 크레타는 더 이상 집안일을 돌보다가 필요하면 남편의 욕정을 해소해주는 아내가 아니라 자기만의 역사와 내면을 갖춘 타자로서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마비되었던 사랑도 회복된다. 여기서도 수치심은 속물근성에 빠진 게이브리얼을 구원한 감정이다. 그래서 강신주는 수치심을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수치심이 사라져버린 후안무치의 상태를 두려워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렘17:9)이 감정이라고 배워온 우리는 감정, 특히 나쁜 감정은 억눌러서 아예 싹을 틔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정은 환영받지 못할 금지의 대상이지만, 댄 알렌더가 「감정, 영혼의 외침」(한국IVP 역간)에서 말했듯이 “감정은 영혼의 언어이며 울부짖는 마음의 목소리”여서 우리는 영혼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깊은 갈망과 진심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 특히 하나님을 향하여 깊은 질문을 던지는 부정적 감정들을 들춰봄으로써,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값진 경험이 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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