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완주의자가 되다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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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완주의자가 되다 [구독자 전용]
  • 젠 폴락 미셸 | Jen Pollock Michel
  • 승인 201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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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해석학]이 오명을 받아들이기까지

VIEWS 그녀의 해석학 Her.meneutics

편은 두 차례 나를 혼자 남겨두었다. 한 번은 남편이 시카고에 있는 명문 경영대학원에 다니기 위해 가족들보다 몇 달 앞서 이사했다. 그때 나는 셋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또 한 번은 홀로 몇 달 먼저 토론토로 떠났다. 우리 둘 다 놓칠 수 없는 기회라 여겨 수락한 일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 어린 다섯 아이들, 그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까지 떠안은 채 뒤에 남아 있었다.

우리 부부가 내린 이런 결정이 보완주의 신학complementarian theology의 부당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일지도 모른다. 남성은 결혼생활과 교회를 이끌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여성은 자기희생을 강요당한 초라한 모습으로 그 뒤를 따라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나는 이런 고정관념이 사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이 같은 고정관념은 전적으로 맞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보완주의자에 대한 오해도 넘쳐난다. 최근 열린 어느 여성학회에서 한 발표자가 자신이 받은 평등주의egalitarian 가정교육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이 발표자는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남녀평등 문제에 대한 신학의 차이가 상당히 폭이 넓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속상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인데 이 시대에 저와 같은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의 보조 취급이나 받고 있다니요.”

발표자의 말인즉슨, 보완주의는 공룡처럼 이미 사라졌어야 할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상호보완주의자들은 같이 축하하자고 모인 자리에서 티도 못 내고 나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설 곳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휘튼 대학 졸업 후 남편과 나는 열렬한 평등주의자로 결혼했다. 우리 결혼식에는 순종 서약도 없었다. 우리 부부는 남성 주도권male headship이 저주의 표시라고 믿었다(창3:16).

그러나 몇 년이 흐르고 어느 지점에선가 그런 우리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보완주의자의 회중석에 앉아 있는 동안 평등주의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어느새 서서히 무너져 내린 듯하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만이라도 내 신학이 오로지 수동적인 학습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라고 고집하고 싶다.

나는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부터 성경은 말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렇지만 나 역시 그 말씀을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말씀을 해석할 때면 나는 지금도 죄에 물든 내 반발심을 분명히 느낀다. 나는 성경은 거룩한 말씀이라는 해답을 애써 외면했다.

결혼하고 몇 년간 성경에 대해 이런 접근 방식을 갖고 있던 고집 센 평등주의자인 나는 고린도전서 11:3―“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에 대한 보완주의 독해를 수용했다. 나는 진리를 찾고자 했고, 마침내 한 가지 해석을 택했다.

휘튼 대학에 다닐 당시, ‘머리’를 ‘권위’가 아닌 ‘근원’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수업 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아버지의 권위를 따르셨다는 명백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찾으러 나선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순종이라는 거룩한 아름다움을 변론할 수 있는 답변을 찾았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기꺼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셨다. 바로 나를 위해. 나를 구원하신 섭리에 맞서는 반론을 어찌 펼 수 있겠는가? 도망치던 나는 결국 이렇게 잡히고 말았다.

평등주의 세상에서 보완주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인기 없는 일이다. 무지한 여자로 취급 받기 십상이다. 나에 대한 속단을 유예해 주길 바라는 내 바람에 공감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보완주의라는 말이 사람들의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성경말씀 외에는 내 마음속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다른 길을 알지 못한다. 고린도전서의 그 말씀이 계속 나를 사로잡고 있다.

최근에 신약학자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의 주석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거기서 확고한 평등주의자의 진솔한 해석을 찾아볼 수 있었다. 헤이스는 바울이 남성의 권위male authority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고 확언한다.

고린도전서 11:2~16을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모두 3절과 7~9절의 가부장적 내용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의 논리적 구조 안에 이미 가부장적 전제가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케팔kephal을 ‘머리’보다는 ‘근원’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은 학술적인 방법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헤이스는 “바울의 주장과 평행선 상에 있는 다른 해석들을 면밀히 살핀 후에 그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평등주의로 비약하기 위해 바울을 부정해야 한다면, 나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도 여전히 바울의 주장에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

“젠은 보완주의자야.” 사람들은 구분하기 쉬운 잣대로 나를 규정한다. 단어 하나로 나는 누군가에게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한다.

일반화 경향이 그야말로 일반이 되고 있지만,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처리해 버린다고 문제가 만족스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논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논쟁에서도 인간과 그의 신앙과 실천의 총체성을, 마치 코르셋 안에 몸을 끼워 넣듯이, 한 단어로 규정할 수는 없다.

나는 보완주의자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자매인 평등주의 여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사실이 나를 설명하는 전부는 아니다. CT

 


젠 폴락 미셸 다섯 아이의 엄마, 강연자. Teach Us to Want 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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