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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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구독자 전용]
  • 폴 투르니에
  • 승인 201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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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인간과 등장 인물의 긴장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이 된다

우리가 관람하는 연극은 등장인물들의 ‘연기’다.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전기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한 편에 인간에 대한 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

배우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지만, 우리는 실생활에서 어떤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배우들의 몸짓과 대사를 통해 인간을 이해한다. ‘인간’personne이라는 단어 자체가 원래 목소리를 강조하려고 배우들이 썼던 가면sonare…per[그것을 통하여 소리를 내다]에서 파생한 것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 교수가 사용한 ‘페르소나’persona라는 라틴어 단어는, 우리가 프랑스어로 흔히 ‘인간’personne이라 표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등장인물’personnage이라는 단어의 뜻에 가깝다.

우리는 실제 인간과 등장인물을 직관적으로 다른 존재라 생각하지만, 즉 실제의 자아와 우리가 맡는 역할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 둘 사이에 복잡하게 뒤얽힌 관계가 있다.

피란델로의 희곡,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에서 한 인물은 산초 판사 같은 상상의 존재가 진짜 사람보다 더 진짜 같다고 말한다. 산초 판사가 당신과 나보다 더 완성품 같다는 뜻이다.

세르반테스가 산초 판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산초 판사의 모든 것이다. 반면에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나 자신 혹은 다른 사람에게 끝없이 말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완벽하고 충실하게 그려낼 수 없다. 누구에게나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불가해한 미스터리가 있다.

그러면 현재의 나와, 내가 될 수 있는 존재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내일 어떤 새로운 사건에 대한 내 반응에서 지금까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찾아낸 어떤 면보다 중요한 면이 드러날지 누가 알겠는가? 내일이면 드러날 것이 오늘의 나 안에 억눌려 있는 것은 아닐까?

산초 판사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존재로 보이지는 않는다. 산초 판사에 대한 내 생각은 당신의 생각과 다르고, 세르반테스의 생각과도 다르다. 나에게 산초 판사는 <돈키호테>를 읽을 때 내 마음속에 떠올린 개인적인 이미지이고, 내가 머릿속으로 연상해낸 생각들과 삶의 경험들에 도움을 받아 빚어낸 이미지다.

그 이미지가 ‘나의’ 산초 판사다. 따라서 나의 자아와 삶의 이야기, 그리고 세르반테스의 이야기들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내 머릿속에 불러일으킨 여운에 따라 산초 판사의 이미지가 결정된다.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그들은 나에게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정확히 보여주려고 애를 쓰지만, 나는 그들의 노력만큼이나 나 자신에게 영향을 받아 그들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한다. 그들이 다른 어떤 치료자를 만나더라도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정확히 보지 못한다. 게다가 그들 자신도 나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을 다른 치료자에게 똑같이 보여주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지난 20년 동안 인간의 이런 문제에 몰두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보편성을 띠기 때문에 모든 사상과 모든 문명에도 무척 중요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이 문제는 좁게 보면, 나의 개인적인 운명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 상담을 받으려고 오는 이들은 그렇게 한가로운 사람들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간절하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를 기대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이 흥미진진한 문제는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듯하다.

어떤 면에서, 내가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을 나에게 숨김없이 보여주려고 결심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누구에게도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을 나에게 말한다. 내가 찾아내야 하는 것은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내면에 감추어진 인격, 즉 일상의 삶에서 덧씌워진 거짓된 겉모습을 떨쳐낸 한층 순수한 인격이다.

그러나 내 위치가 유리하더라도 내가 절대적으로 순수한 인격까지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인격이 무엇인지 아실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실체도 파악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누구의 진정한 실체도 파악할 수 없다. 그저 이미지만을 이해할 뿐이다. 그것도 단편적이고 왜곡된 이미지,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즉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실제 인간과 등장인물 사이에는 이상한 관계가 있다. 그 둘은 서로 결부돼 있지만 별개의 존재다. 나는 단지 이미지를 통해서 실제 인간에 접근할 뿐인데, 그 이미지는 나에게 실제 인간을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동시에 실제 인간을 감춰버린다. 다시 말하면, 이미지는 실제 인간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따라서 나는 인간에 대해 평생 끈질기게 연구했지만 결론을 내리는 데는 한층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인간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가하는 판단이 피상적이고 잘못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판단만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판단도 마찬가지다.

물론 나에게 자신의 면면을 더 숨김없이 드러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 판단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는다.

나는 태어나서 석 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한 친구가 쓴 전기, 신문에 실린 부고 기사, 아버지가 남긴 시와 기사, 편지와 사진, 한참 후에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일화들을 통해서만 아버지를 알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자료를 바탕으로 내 마음은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그 이미지가 나의 심리적인 콤플렉스에 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내가 마음속에 그려낸 이상형을 그 이미지에 투영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조작하고 왜곡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자신이 아는 그의 아버지를 묘사해주더라도, 그가 그려낸 그의 아버지의 모습이 내가 마음속에 그려낸 나의 아버지의 모습보다 더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자기성찰’도 자신에 대해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왜곡되고 변형된 이미지만을 볼 수 있다면, 게다가 그 이미지가 그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영향을 받고, 그가 속한 환경에서도 영향을 받는다면, 그의 진정한 실체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몽테뉴는 자기성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 인간은 어떤 선입견도 없이, 어떤 독선적인 편견도 없이 자신을 관찰해야 한다며 <수상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비겁하고 잔인한 사람인지, 헌신적이고 정직한 사람인지는 당신만이 안다. 당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당신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들은 당신을 불확실하게 추측할 뿐이다. 그들은 당신의 본심을 보는 게 아니라 당신의 껍데기를 볼 뿐이다.”

이 새로운 관점은 장 자크 루소의 등장으로 완전히 꽃 피었다. 루소는 <고백록>의 서문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 완전히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정확하게 그려진 인간의 초상화”를 보여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때부터 진실성은 자아발견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 여겨졌다.

루소가 <고백록>에서 역설한 관점, 즉 일기에서 시도하던 방법이 그 후로 널리 확산되어 그것은 현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 스위스 철학자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은 평생 꼼꼼하게 쓴 일기를 우리에게 남겼다.

하지만 아미엘 자신도 인정하듯이,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미엘은 자신의 진정한 실체를 찾아내지 못했다. 아미엘만큼 정직하고 충실하게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실제 인간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하더라도 누구나 결국에는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본질적인 것이 항상 우리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프랑스 작가 쥘리앵 그린은 자신의 일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이 일기를 찾아낸다면, 그는 나를 완전히 잘못 판단할 것이다. … 나를 판단하는 데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성찰도 자신에 대해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한다. 앙드레 지드는 “벌써 서른여섯 살이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구두쇠인지 낭비벽이 심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식탐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몽테뉴의 말에 대한 서글픈 대답이다. 게다가 자기성찰은 실제 인간을 왜곡하기도 한다. 프랑스 시인 폴 클로델은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왜곡할 뿐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점검을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자기점검에 조금씩 몰두해가면 우리 정신은 세상과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정신은 끝없는 자기분석에 빠져들어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그런 악순환 과정에서 실제 인간이 위축되고 왜곡되며, 오히려 잘못 제기되는 문제는 무한히 늘어난다.

성 프란체스코 살레시오는 이런 인간의 본성을 통찰력 있게 파악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성령은 자신의 내면을 지나치게 많이 알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임하지 않을 것이다. … 두려운 것을 두려워하면, 두려운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려워할 것이다.

불만스런 것에 화를 내면, 불만스런 것에 화를 내는 태도에 화를 내게 될 것이다. 화를 내고서는 화를 낸 것에 화를 내는 사람을 나는 많이 보았다. 연못에 돌을 던지면 연못에 생기는 동그란 파동이 점점 커지면서 퍼져나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쯤이면 앙드레 지드의 절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천진난만하고 진실하던 젊음을 죽였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 일기를 멋지게 쓰고 싶은 욕심이 일기의 장점, 심지어 일기의 진실성까지 지워버린다”고 썼다.

아미엘도 진정한 자아를 끝없이 추구했지만 결국 “자유로운 생각이 우리에게서 개성을 빼앗아간다”고 인정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만큼 자아로부터 동떨어진 것은 없다”고 말했다.

한 외국 여자가 자신의 삶을 자세히 이야기한 장문의 편지를 나에게 보냈다. 그녀는 여러 상황에서 자신이 행하는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이렇게 결론지었다. “어렸을 때 저는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의 수녀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수녀가 될 만한 자질이 있는지, 거꾸로 매춘부 기질이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덧씌워진 껍데기와 가면을 완전히 떨쳐낸 실제 인간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환상을 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목표에 이르려면, 삶에서 기본적인 속성인 기억부터 지워내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 자체를 지워내야 한다.

설령 기억을 지워내고 삶을 지워내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살아 있는 실제 인간이 아니라, 실제 인간에서 볼품없는 뼈대만 남은 미라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경험하고 느꼈던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새겨지며,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감정과 행동 하나하나가 거짓이고 서로 모순되더라도 지금의 우리를 뜻하는 지워지지 않는 요소들이다.

그렇다고 자신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탐구를 통해 많은 것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일 수 있다. 정직하고 진실할 때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취했다고 생각한 태도가, 너무 익숙해서 당연히 우리 본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착각한 메커니즘에 따른 행동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우리는 깜짝 놀라고 부끄럽지만, 무의미한 경험만은 아니다. 우리 본질이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무척 다르다는 확신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탐구는 평생 계속되는 탐구다. 우리가 철저하게 진실하고 정직하다면, 겉껍데기를 벗겨내더라도 그 아래 또 다른 껍데기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듭된 탐구의 결과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어 우리의 진정한 실제 인물이라 생각하며 찾아낸 것도 실제 인간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정확히 말하면, 실제 인간에 가깝지만 불완전한 부분이다. 분석을 계속하면, 그 부분도 우리 내면에 더 깊이 새겨진 메커니즘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 입증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분석을 계속하면, 우리 내면에서 부글거리며 우리 각자의 개성과는 무관한 무의식적인 힘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무의식적인 힘은, 프로이트 이론에서는 우리가 동물들과 공유하는 본능의 충동이고, 융 이론에서는 우리가 다른 모든 인간과 공유하는 집단무의식의 원형이다. 결국 우리는 철저하게 비인격적인 자연의 힘 앞에 있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는 이런 탐구의 결과로 찾아낸 실제 인간은 우리 손아귀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다. 우리는 인도의 신비주의자, 라마크리슈나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희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양파 껍질을 벗기면 언제나 또 하나의 껍질이 있을 것이다. 끝까지 벗겨도 씨를 찾아낼 수 없다. 이처럼 자아를 분석하면 자아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나체주의자들―정확히 말하면, 그들 중 일부―은 한층 참된 인간 공동체를 만들어가려는 바람에서 등장인물의 형식적인 껍데기를 완전히 벗어버린 천국 같은 유토피아를 꿈꾸며 추구하는 듯하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기본적인 수치심 때문에 덮어버리고 싶은 부분조차 감추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위선을 떨쳐내겠다는 순수함의 상징일 수 있다. 때때로 환자들은 꿈에서 발가벗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나에게 말한다.

가면을 벗고 싶은 내면의 열망이 꿈에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체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나체주의에 신중하게 접근하고 싶지만, 순수한 사회를 열망하는 이런 ‘이상주의적’인 꿈이 심리적 불안의 징후인 것은 거의 확실한 듯하다.

성경에는 이 문제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 구절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과 하와는 본능적으로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허리에 둘렀다(창3:7). 그러나 하나님은 그 초보적인 솜씨에 한탄하며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3:21).

따라서 그때부터 우리는 그런 조건에서 살면서, 세상이 다시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완전히 벌거벗은 실제 인간이 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옷을 빼앗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옷을 직접 지어 입히셨기 때문이다.

그 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성령에서 잉태된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고했다(골3:9-10). 바울은 진리의 허리띠와 정의의 가슴막이와 믿음의 방패에 대해 역설했다(엡6:14-16).

또한 성경의 계시록은 사실적인 묘사로 우리에게 유토피아적인 꿈에서 벗어나, 모든 겉치레와 보호막을 걷어낸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암시한다. 우리는 실제 인간을 등장인물로부터 찾아내려 덧없이 애쓰지만, 성경의 계시록은 그런 노력 대신에 완전히 다른 생각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옷, 즉 등장인물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등장인물을 떠안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장식’을 무작정 경멸하지는 않는다. 성경에 따르면, 자연계 전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아름다운 무대다. 게다가 성경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솔로몬 성전의 웅장함과 시골 풍경과 활짝 핀 꽃들을 찬양한다.

호화로운 옷, 황금과 은으로 꾸며진 장신구, 음악과 춤, 경건한 의식과 관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만들든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다시 말하면, “지도하는 사람은 열성으로”(롬12:8) 일해야 하듯이 외형에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고전14:33).

외형을 경멸하며 규율을 무시하는 기질을 지닌 사람도 등장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남들보다 독창적이라 생각하며, 공들여 차려입은 사람만큼이나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지닌 사람이다.

언젠가 나는 이 문제를 주제로 해외에서 강연한 적이 있다. 나는 식당에 앉아 준비한 자료를 훑어보며 종업원들이 식탁을 차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들은 식탁보가 식탁 위에서 똑같은 정도로 흘러내리도록 조절했고, 식기들을 완벽한 대칭으로 놓았으며, 냅킨을 그야말로 예술적으로 접었다.

손님들은 눈치조차 못 채겠지만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고 세세한 곳까지 놓치지 않은 전반적인 색의 조화, 주인이 공들여서 선택했을 커튼 등 모든 것에서 자신의 일에 대한 사랑과 직업의식이 느껴졌다.

나 자신도 이 책을 쓰는 지금, ‘부’와 ‘장’을 조화롭게 배열하려고 애쓴다. 한 부분이 지나치게 길어 책 전체의 균형을 깬다면 나도 불만스럽지만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다.

책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배열은 건축미와 관계가 있지만, 이는 나라는 실제 인간에 내재된 진실한 성향을 표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면서 어떤 기능을 행하는 것들은 예외 없이 자체의 필요조건을 지니고 어떤 형태를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 형태를 지키는 것을 단순히 꾸미는 행위라 말할 수는 없다.

궁중에도 고유한 프로토콜, 즉 궁중 의례가 있다. 궁중은 지나치게 화려한 의식을 피하고 싶더라도 자신들이 대표하는 국민의 체면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화려한 의식을 치르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군주의 지고한 미덕은 개인적인 성향을 포기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이 요구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이 떠맡아야 하는 등장인물과 하나가 되고, 그들이 왕이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얼마 전, 나는 알프스 산중에 있는 커다란 요양소에 다녀왔다. 그날은 모든 요양소에서 가면무도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의사들은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환자의 실제 인간에 대해 놓쳤던 징후들을 수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반드시 가면무도회에 참석할 거라고 나에게 말했다.

왜 그 여자는 남자처럼 분장하고, 왜 저 여자는 미련한 시골 여자나 흉악한 심술쟁이 노파처럼 옷을 입었을까? 그런 분장에 우연이라고는 없었다!

실제로 환자들은 가면을 쓰면 평소와 다르게 행동한다. 평소에는 억눌렸던 그들 실제 인간의 면면들을 드러낸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의상과 가면은 실제 인간을 감추기는커녕 실제 인간의 모습을 진실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형태와 내용을 대립되는 것이라 생각하며, 작품의 내용이 형태보다 높이 평가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어리석고 주제넘은 짓이다. 형태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것인 양 생각하고 싶어 한다.

삶 자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외적인 모습을 이루는 등장인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인위적이지 않다. 우리가 하루 종일 경계심을 품고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우리의 실제 인간을 더욱 충실하게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환자가 내 앞에서 자신의 실제 삶을 신중하게 말하는 동안, 기계적으로 해 보이는 몸짓과 무심코 취하는 태도도 나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나는 그의 고백 못지않게 그런 몸짓과 행동에서도 그에 관한 소중한 정보를 얻는다.

내가 선택한 직업, 내 상담실의 배치, 내가 휴일에 즐겨 가는 곳, 내가 삶을 사는 전반적인 환경 등, 이 모든 외적인 것은 나의 등장인물을 결정하지만 나의 실제 인간도 표현하는 매개체이기에, 이 둘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옷을 사는 여자라면 이 둘의 불가분한 관계를 잘 알 것이다. 손님에게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파리 모델이 따로 없네요. 다른 데서는 이런 옷을 못 구하실 겁니다. 이건 손님을 위해 만든 옷이에요!”라고 말하는 판매원도 마찬가지다. 이 말에는 사회적 요소들과 개인적 요소들이 미묘하게 교차하고 충돌한다.

모든 여성에게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표현 형태, 즉 특정한 형태의 옷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패션만큼 관습적인 것은 없다. 이 관습을 따르지 않는 여성은 유행 감각이 없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반면에 이 관습을 무작정 따르며 대량으로 찍어내 어디서나 흔히 보이는 옷을 입으면 개성이 없는 여성이 된다.

 

등장인물을 완전히 떨쳐낸 실제 인물을 찾아내겠다는 꿈은 포기해야한다

등장인물은 실제 인간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맡은 외적인 역할이 끊임없이 우리를 변화시키며, 실제 인간의 깊은 내면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의 미묘함을 잘 표현해주는, 성직복을 입었다고 성직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격언처럼, 우리가 성인처럼 옷을 입는다고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직자에게 성직복을, 판사에게 법복을, 군인에게 군복을 강요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나치 독일이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9년 8월, 독일 라디오가 며칠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군가를 방송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나폴레옹은 이런 관계를 꿰뚫어보았기 때문에, 졸병 계급을 달면 졸병처럼 행동하고 장교가 되면 장교답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제복이 사람을 만든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취하는 몸가짐, 우리가 행하는 몸짓도 우리의 내면을 형성하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한다. 글씨체를 체계적으로 다시 배우면 성격까지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등장인물을 맡는지에 따라 체형조차 달라질 수 있다.

풍자 만화가들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에게 진료받은 지독한 구두쇠가 있었다. 풍자 만화가들은 그를 신랄하게 풍자해 그렸다. 실제로 그는 그림 속 모습처럼 코와 턱이 거의 맞붙고, 손톱은 반원형으로 굽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따라서 육체와 정신의 삶, 심지어 영적 삶에도 우리가 맡은 등장인물의 흔적이 있기 마련이다. 어떻게 해야 신앙심을 되찾을 수 있는지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물었던 한 친구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그 친구는 “은총의 문제라고는 말하지 마라.

그렇게 대답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습관처럼 말했다. 그러니 그의 질문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먼저 자네가 신앙심이 있는 것처럼 살아보게. 그럼, 저절로 그 답을 알게 될 테니까.” 내 친구는 그 제안을 심사숙고하고 도전적인 과제가 자신에게 되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삶에서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도 절실히 깨달았다. 결국 그는 그 길을 택했고 신앙심을 되찾았다.

따라서 우리에게 제기된 문제도 달라진다. 완전히 발가벗고 살아가고, 등장인물을 완전히 떨쳐낸 실제 인물을 찾아내겠다는 유토피아적인 꿈을 포기해야 한다. 등장인물과 실제 인물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언젠가 한 환자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안에는 사사건건 반대하는 뭔가가 있어요. 예컨대 제가 멋진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내면의 목소리가 우스꽝스런 거짓말이라 중얼거리는 게 들리는 것 같아요.”

곧이어 그 환자는 “멋지게 꾸미려고 단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진저리가 나요”라고 덧붙였다. 앞에서 언급한 거북한 기분은 가면, 즉 등장인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의 작위적이고 기만적인 특성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실제 인간과 등장인물 간의 불일치를 인식하는 순간, 그런 거북한 기분이 밀려온다.

따라서 위의 사례는 등장인물을 떨쳐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 등장인물을 실제 인간과 조화시켜야 하는 경우다. 자신과 하나가 돼야 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 핀다로스는 “본래의 네가 되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방향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

포착하기 어려운 실제 인간을 찾아내기 위해 외부 세계에 등을 돌리고 내면의 삶에 집중하는 대신에 외부로, 바깥 세계로, 타인에게로,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담대히 등장인물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진실한 신념에 따라 우리 자신을 실제 인물로 표현하고 드러내는 방향으로 등장인물을 형성해야 한다.

자연에서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 즉 감탄사를 끌어내는 것은 풍경의 진정성이다. 자연은 어떤 꾸밈도 없이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가면을 쓰고 덧옷을 입는다. 덧옷을 벗어던지려 하면 우리 자신의 일부까지 뜯겨 나간다.

차라리 덧옷과 하나가 되는 편이 낫다. 그래야 덧옷이 우리의 실제 인간을 잘못 드러내지 않을 테니까.

이 세상에서 등장인물과 실제 인간의 완전한 일치를 기대하는 것은 유토피아적 이상이다. 게다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는 하루하루 그 둘의 불일치를 끊임없이 자각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향해 다가가려 애쓴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수록 불안감이 가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우리 자신을 완벽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안정하고 복잡하며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는 실제 인간의 최종적 실체를 완벽하게 포착하기 불가능하다.

우리 자신이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부끄러운 순간에 불현듯 나타나는 희미한 빛이나 그림자를 통해서만 실제 인간을 조금이나마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런 인간 조건, 즉 실제 인간과 등장인물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 관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긴장 관계는 인간에게만 허락된 것이며, 이런 긴장 관계를 통해서 인간은 인간이 된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단순히 그 자체여서, 우리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실제 인간과 등장인물의 불일치로 고통받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자신보다 자연계를 더 확실하게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간헐적으로 희미하게 번뜩이는 빛을 통해 우리 자신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완벽하게 알아내겠다는 목표를 포기해야 한다. 우리를 정확하게 아시는 그분이 우리를 아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새번역)

 


이 글은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의 「인간이란 무엇인가」(포이에마)의 1장과 4장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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