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증후군을 가졌다고 늘 괴롭게 사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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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증후군을 가졌다고 늘 괴롭게 사는 것은 아니다
  • 에이미 줄리아 베커 | Amy Julia Becker
  • 승인 2019.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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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해석학]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

VIEWS 그녀의 해석학 Her.meneutics


주 전 두 아이를 데리고 쇼핑몰에 갔다. 운동화와 샌들을 사고 나서, 우리는 회전목마를 타려고 줄을 섰다. 입장료로 2달러씩을 지불하자, 금전 등록기 앞에 선 여성이 계산대 너머로 내 딸 페니를 빤히 쳐다봤다. “그 아이는 장애인인가요Is she a special need?”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장애인은 무료에요Special needs ride free.” 돈을 돌려주면서 그녀가 말했다.

나도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kids with special needs에게 무료 혜택을 주는 것은 좋은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인격 우선” 언어“person-first” language[장애인을 지칭할 때 장애 진단명이 아니라 그 사람을 중시하는 어법]를 몰랐다는 이유로 그 여성을 탓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녀는 “당신의 딸은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가요Does your daughter have special needs?라고 물을 수 있었다. 페니의 얼굴에 쓰인 것을 읽어 냈다는 이유로 그녀를 비난하지 않는다. 맞다. 페니는 다운증후군으로 익히 알려진, 21번 염색체가 3개 존재하는 ‘21번 염색체 삼체성’trisomy 21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돈을 돌려주는 그녀의 행동에는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친절한 의도였다 하더라도, 그녀는 눈앞에 있는 내 아이를 본 것이 아니라 막연하고 추상적이며 인격이 배제된 어떤 범주를 본 것이다. 그녀가 본 것은 페니가 아니라 ‘장애’special need였다.

그때 그녀가 그렇게 행동한 데는 아마도 많은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지만, 나는 그 일 때문에 우리 문화에서 다운증후군을 논하는 방식을 새삼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매일 ‘다운증후군’을 키워드로 하는 뉴스와 블로그 글이 올라왔다는 구글 알림을 받는다. 3점 슛을 쏜 아이, 해고당할 것을 무릅쓰고 다운증후군을 가진 손님 편을 든 식당 종업원, 의류 화보나 텔레비전 쇼에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는 빈도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 등, 훈훈한 이야기가 많다. 그렇지만 그 목록에는 부정적인 이야기도 그만큼 올라온다. 태아가 다운증후군을 가졌다면 가능한 한 빨리 임신부에게 알려  낙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산전 검사, 돌보는 사람에게 학대받는 아이, 이런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좋고 나쁘고를 떠나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양쪽 모두의 언어에서 문화적 무지와 편견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많은 이들이 글을 쓸 때 으레 “고통 받고 있다”는 말을 사용한다. 전에 세라 페일린[미국 알래스카 전 주지사이자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부통령 후보]이 뉴스에 나올 때면, 그녀의 아들 트리그에게는 다운증후군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설명이 따랐다. <뉴욕 타임스>는 수영장 물 위에 뜬 채 엄마에게 미소 짓고 있는 아기의 사진을 싣고는, 이 아기는 다운증후군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설명을 달았다. <글로벌 그라인드>Global Grind는 타깃Target[미국의 종합 유통 업체]의 모델로 활동하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담황색 머릿결의 소년 이야기를 보도하면서 미소 띤 라이언의 사진과 함께 그가 “고통 받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대중매체 전반에 걸쳐, 일하러 가는 어른, 부모와 교감을 나누는 자녀, 살아가면서 있게 마련인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는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원한 “고통”에 처해 있다.

대중매체는 또한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기”babies with Down syndrome보다는 “다운증후군 아기”Down syndrome babies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Political Correctness를 견지해야 하는 언론이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이 제안하고 선호하는 언어를 매번 무시하고, 47번째 염색체를 가진 것이 그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하는 특징이라는 생각을 고수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그 아기는 전형적인 다운증후군 아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뉴욕타임스> “어느 엄마의 고투, 다운증후군 아기와 함께 하는 기쁨.”<투데이 쇼> “그렇다. 다운증후군 아기를 임신한 걸 알았을 때처럼 그녀는 당당하게 행동했다.”<타임> 사례는 얼마든지 더 들 수 있다.

기자들도 어떤 그룹을 지칭할 때 해당 그룹이 제안하는 적절한 용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뉴욕 타임스>기사 작성 지침서의 한 대목이다. “이 지침은…특정 그룹들, 이를테면 여성, 소수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민감해 하거나 선호하는 것을 존중하라고 권고한다. 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한 기사가 좋다.” 그러나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기사를 쓰고 보도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이야기를 전하고자 애쓸 때도, 다운증후군은 곧 고통이라는 부정적인 렌즈를 통해 그렇게 한다.

선의에서든 악의에서든, 많은 사람들이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을 한 사람의 개별 인격으로 인식하기에 앞서 어떤 범주로 묶어 바라봄으로써 그들을 차별한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 모두 생김새가 비슷하다, 상냥하다, 고집이 세다, 천사다, 또는 사회적 부담이다. 이렇게들 여긴다. 나는 이런 편견이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을 볼 때 바로 나타나는 외모의 특징과,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 역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무지가 결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온전히 바라보실 수 있으셨다.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혈루증 앓아온 여인이 당신을 만지고 낫자 한사코 그 여인을 직접 보고자 하셨고, 그녀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예수님은 그녀를 “딸”이라 부르신다. 예수님은 거의 언제나 직접 만지심으로, 곧 인격의 만남을 통하여 고치신다. 삭개오, 우물가의 여인, 니고데모, 십자가 위의 강도, 그 누구든, 예수님은 그들이 속한 사회적, 종교적 그룹(세리, 간음한 여자, 바리새인, 범죄자)에 따라 부르지 않으시고 그들을 고유한 인격체로 바라보신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도, 46개의 염색체를 가진 사람들처럼, 다양하다. 대중매체는 다양성과 개성을 담은 언어를 사용하는 데 번번이 실패한다. 이는 일반 대중이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바라보는 방식을 반영하며, 또한 그런 방식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대중매체가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을 저마다 개성을 가진 인격체로 부를 수 있도록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CT

 


 

에이미 줄리아 베커 「완전하고 좋은 선물」A Good and Perfect Gift: Faith, Expectations and a Little Girl Named Penny의 저자이며, CT에 “완전한 내 아이: 하나님이 딸의 장애를 통해 내게 가르치신 것” (2011년 12월호)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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