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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약혼자’ 여호와‘신부값을 지불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핵심이다
장세훈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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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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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어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세아 2:19-20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새로운 회복의 관계를 강조하는 호세아 2:19-20은 어느 정도 구약에 대해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매우 친근한 본문이다. 또한 구약을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목회자들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강조할 때 이 본문을 자주 인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에 나타난 원래의 의미는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어떤 차이이고, 왜 그런 차이가 생겨나는 것일까? 그 원인은 이 본문에 반복하여 등장하는 ‘아라쓰’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오역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목회자들은 개역개정 성경의 한계를 인식하고, 보다 나은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주의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번역의 아쉬움
한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개역개정 성경은 호세아 2:19-20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어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여기서 우리는 ‘장가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라쓰’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개역개정 성경은 호세아의 이 본문을 제외한 다른 구약 본문에서는 이 단어를 ‘정혼하다’로 번역한다(출22:16; 신22:23; 삼하3:14). 그러나 개역개정 성경은 이 본문에서만 예외적으로 ‘아라쓰’를 ‘장가들다’로 번역한다. 이런 번역은 정당한 것일까?

원래 ‘아라쓰’로 표현되는 ‘정혼’의 상태는 분명 결혼의 단계와는 구별된다. 구약의 저자들은 정혼의 단계에서 완전한 부부의 단계로 확정될 때 ‘아라쓰’라는 동사보다는 ‘라카흐’ 또는 ‘바알’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물론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정혼이 결혼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아라쓰’를 ‘결혼하다’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지만, 이스라엘 사회에서 정혼과 결혼은 단계적으로 구별되기 때문에 용어도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예를 들면, ‘아라쓰’가 등장하는 신명기 20:7도 약혼과 결혼을 구별한다.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 하고.”

약혼에 해당하는 ‘아라쓰’와 결혼에 해당하는 ‘라카흐’를 구별하여 사용하는 이 신명기 본문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약혼과 결혼이 어느 정도 다르게 이해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 신명기 본문은 약혼은 했으나 아직 최종적인 결혼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사람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약혼과 결혼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약혼과 결혼은 왜 절차상 구별되어 시간의 간격을 갖는 것일까? 약혼과 결혼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약혼 철회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최종적인 결혼식에 도달하기 전까지 약혼은 철회될 수 있었다. 약혼은 최종적인 결혼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동침이 허락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약에서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접했던 요셉이 근심을 갖게 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다시 말해, 약혼의 상태는 부부가 정신적 육체적 한 몸을 이루는 완전한 결혼의 상태와는 구별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아라쓰’를 완전한 결혼 단계와 구별되는 ‘약혼/정혼하다’betroth로 번역한다.

약혼과 신부값
구약의 저자들은 ‘아라쓰’라는 동사를 사용할 때 그 당시 결혼 풍습의 한 절차로서의 약혼 또는 정혼의 단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구약시대의 약혼 절차는 신부의 부모가 제기할 수 있는 결혼 반대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신부값을 지불함으로써 결혼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한스 볼프Hans Wolff는 「호세아」에서 ‘아라쓰’가 다음과 같은 고백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나는 당신의 부모가 요구하는 값을 지불함으로써 우리의 결혼에 대한 그의 마지막 반대를 제거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과의 완전하고도 지속적인 연합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행할 것입니다.
 

이처럼 ‘아라스’는 결혼의 상태가 아니라 결혼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절차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장가들다’로 표현한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은 ‘약혼하다’ 또는 ‘정혼하다’로 수정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비록 ‘아라쓰’가 법적으로 오늘날의 약혼이나 정혼보다는 훨씬 더 결혼에 가까운 상태를 뜻하지만, 최종적인 결혼의 단계와 동일시 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고대 이스라엘의 약혼은 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게 신부값을 지불하는 절차를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절차를 고려해 본다면, 호세아 2:19-20에 등장하는 공의, 정의, 긍휼, 진실과 같은 요소들은 신랑이신 여호와께서 신부인 이스라엘에게 주는 약혼의 신부값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공의로 번역된 ‘쩨데크’, 정의로 번역된 ‘미쉬파트’, 은총으로 번역된 ‘헤세드’, 긍휼로 번역된 ‘라함밈’, 진실함으로 번역된 ‘에무나’는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킨다(출34:6; 사5:16).

더욱이 이런 속성들은 또한 다윗 왕가의 메시아의 속성을 반영한다(사11:1-5).

이와 같이 호세아 2:19-20에 등장하는 공의, 정의, 은총, 긍휼히 여김, 진실함과 같은 속성들은 신랑 되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가 될 이스라엘에게 값없이 베푸는 신부값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한다. 
 
내가 너와 정혼하여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너와 정혼하며 진실함으로 너와 정혼하리니 너는 여호와를 알 것이니라.

호세아 2:19-20은 바람난 아내를 포기하지 않는 남편의 변함없는 사랑을, 약혼의 절차에 비추어 묘사한다. 더욱이 본문은 부정했던 이스라엘을 향해 자신의 가장 고귀한 전 인격적 속성들을 신부값으로 지불하는 여호와의 무한한 사랑을 강조한다. 이 본문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이 본문에 의도된 여호와의 신부값의 의미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CTK

장세훈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이며 「한 권으로 읽는 이사야서」(이레서원), 「내게로 돌아오라: 스가랴서 주해와 현대적 적용」(SFC) 등의 저자이다.

이 글은 장세훈 교수의 논문 “구약설교를 위한 번역 선택의 중요성에 대한 고찰: 호1:4; 1:9 및 2:19-20을 중심으로”, <한국개혁신학>제26권(2009), 39-56쪽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게시:201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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