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육아’의 신화
상태바
‘행복한 육아’의 신화
  • 레이첼 마리 스톤 | Rachel Marie Stone
  • 승인 2019.08.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고통 없는’ 자녀 양육을 기대하게 됐는가?

내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흥분했다.

어머니는 내가 임신했다고 말하자 환호성을 질렀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하게 안아주며 활짝 웃어줬다. 산전 진료 예약을 할 때 산부인과 접수원조차 “축하해요!”라고 외쳤다.

하지만 누구도 내 대신 잔뜩 웅크린 채 침대에 누워있거나 입덧 때문에 거의 움직이지 못한 상태로 지내지 않았다. 12시간 동안 계속된 진통을 겪지도 않았다. 진통을 참으면서 나는 외쳤다. “왜요, 하나님? 왜 제가 이토록 고통 받기 원하시나요?” 내 질문에 간호사가 답했다. “가엾게도, 아기를 낳으려면 꼭 필요한 일이랍니다.”

정말 내가 아기를 낳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내 친구가 한 말처럼, 아이를 키우려면 기쁨과 슬픔을 한 손에 같이 들고 있어야 한다.

마침내 아들이 태어나자 나는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내 아이가 누구나 탐내는 “키우기 쉬운” 아기가 아니라는 게 이내 분명해졌다.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쉽게 잠들지 못했다. 솔직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많았다. 나는 견디기 힘든 죄책감의 짐을 고스란히 짊어졌다. 성경과 교회 사람들 이야기대로라면 아이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던가? 더 많이 아이를 좋아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더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는 자라면서 내게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죄책감도 여전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까꿍 놀이와 100번은 읽은 똑같은 그림책, 수십 차례 기저귀를 가는 일로 지루해 하고 지쳐 있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살짝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고 누군가 날 돌봐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때 도 있었다.

육아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내 비밀스런 분노는 사실 나만의 것이 아니라 문화적 뿌리가 매우 깊은 것이다. 1927년에 나온 풍자 소설 「트와일라잇 슬립」Twilight Sleep에서 소설가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은 출산의 고통을 포함한 일체의 고통에 대한 20세기 특권층의 태도를 이 제목에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이 소설이 나올 당시에 ‘트와일라잇 슬립’ 곧 무통분만을 위한 반마취 요법은 부유한 계층의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고통 없이…아름다움이…있어야 해요. 아기를 낳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시적인 일이어야 해요.” 맨포드 여사는 사랑스러움과 시가 마치 진보한 산업사회의 생산물이나 되는 것처럼, 아기가 마치 포드 자동차처럼 줄줄이 생산되어 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밝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언했다.


“아름다움만” 있어야 한다는 관념은 육아에 관한 현대적 신화의 일부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아이들과 우리 자신에 대한 기대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최근 작가 미차 보예트Micha Boyett는 중국어 조기 교육을 받는 유아가 또 있다는 얘길 듣는다면 속이 메스꺼워질 거라고 말했다). 우리의 아이가 완벽하길 우리는 바란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완벽한 부모가 되길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모른다. 제니퍼 시니어Jennifer Senior는 최근작 「기쁨으로 가득하지만 즐거움은 없다: 현대 육아의 역설」All Joy and No Fun: The Paradox of Modern Parenting에서 ‘행복’은 모호한 개념이며, 아마도 잘못된 육아 목표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실이지 부모 노릇 한다는 것이 항상 즐거운 일은 아니다. 자녀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올바로 받아들이는 교회 안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 너무도 많다. 부모의 길은 자주 십자가의 길이 된다. 상당한 대가를 치룬 후에야 부모로서의 영광과 은혜와 기쁨을 얻는다. 우리는 자녀를 위해 시간과 힘과 돈과 자신의 욕구를 포기한다.

최근 영국 소설가 존 랭커스터John Lancaster는 “의무 개념의 부활”을 촉구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행복해지든 아니든 상관없이, 도덕적 의무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무는 종종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나은 것 곧 기쁨을 가져다준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기쁨은 고통과 고투와 더불어 있을 수 있다.

C. S. 루이스는 “선물사랑Gift love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섬기고자 하고 또는 심지어 고통까지 받고자 한다”고 썼다. 아마도 후기 산업주의와 광고의 시대가 부모 노릇은 언제나 재미있고 만족스러우며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주입했을 것이다. 이와 똑같은 문화의 덫에 걸려서 결혼은 “두 사람이 함께 계속 행복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확신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우리도, 자녀도 항상 최고이거나 가장 행복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녀 양육의 무거운 짐은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선물사랑―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고 개인의 행복을 내려놓으라고 우리에게 촉구한다. 선물사랑의 길에는 반드시 대가와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 하나님의 은혜란 열이 오른 조그마한 사내아이 옆에 웅크리고 앉아 선잠을 자면서도 거기서 어떤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그런 것이다. 안심과 심지어 기쁨을 찾아서 내게 뻗은 그 자그마한 손,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레이첼 마리 스톤 CT 2014년 ‘올해의 책’ 수상작「기쁨으로 먹으라: 하나님의 구속의 선물, 음식」Eat With Joy: Redeeming God’s Gift of Food의 저자이며 Her.meneutics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고 Religion News Service의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