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창피 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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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창피 당하자
  • N. D. 윌슨 | N. D. Wilson
  • 승인 2020.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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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만 두려워한다
ⓒ iSTOCK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가복음 8:38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1:11-12

 

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엉덩이를 돌려대는 걸 좋아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소는 다 그렇다. 느릿느릿, 멈칫멈칫, 그렇지만 어김없이, 그렇게 모든 소는 바람 부는 대로 걸어간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무리 속에 우리를 맡겨버려야 편안해진다. 우리의 목덜미와 귓등에 무리의 뜨거운 입김이 닿아야 안심한다. 그러고는 무리에서 벗어난 멍청이들에게 씩씩거리면서 성을 낸다.

마치 한 사람이 뿜어내는 것처럼 일사불란한 무리의 숨결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특히 그 숨결이 잔뜩 찡그린 두 눈썹과 노려보는 경멸의 시선과 삐죽거리는 입술과  혐오감 가득한 표정과 겹쳐 있다면, 우리는 절대 그걸 못 피한다.

시대정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도, 교회 밖에도 있다. 시대정신은 눈을 부라리며 무리의 신조에 맹세하라, 무리의 성찬을 받으라 강요한다.

이것은 또 집단창피주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등을 떠밀고 옆구리를 찌르면서 바람 부는 대로 몸을 맡기라 강요한다. 다른 소들처럼 하라 윽박지른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단 하나만 중요하게 고려한다. 바로 ‘남들 하는 대로’다. 어색하고 불편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리를 따라 움직인다. 무리가 우리를 어색하게 바라보지 않기를 바란다. 여론의 바람결에 우리 몸을 맡기고 싶어 한다.

이게 아니라면, 어떻게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제3제국에 동조할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폴란드 침공, 유대인 대학살에 동조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그들이 사악한 사람들이었다고, 쇠뇌 당했다고, 아니면 둘 다였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내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 게 언제였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진실보다는 상황의 정치에 따라서 발언한 것이 언제였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시대정신의 힘이 있었기에 한편으로 우리는 노예제도에 대한 반감을 고취할 수 있었고, 그것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시대정신이 인종차별 제도를 만들기도 했지만, 이 제도를 창피하게 여기는 시대정신이 무르익자 이 제도를 철폐하기도(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했다.

시대정신에 순응하여 메대와 바사 사람들은 다리우스에게 기도했고,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졌다(단6). 시대정신은 사악한 전쟁의  광기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진정한 도전 앞에서는 겁에 질려서 스스로 자기 목을 조를 수도 있다.

이처럼 시대정신은 변덕스런 주인이다. 시대정신이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모든 선지자의 첫 임무는 스스로 창피를 당하는 것이었다. 세례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를 잡아먹었다[막1:6]. 이사야는 몇 년 동안 벌거벗은 채 돌아다녀야 했다[사20:3]. 에스겔은 쇠똥으로 불을 지펴 빵을 구워 먹어야 했다[겔4:15].

엘리야는 까마귀, 썩은 고기를 먹는 이 새가 물어다 주는 것만 먹어야 했다[왕상17:6].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가장 먼저 시키신 일은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는 것이었다[호1:2].

선지자는 왕과 군중의 압력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에 둔감해야 한다. 오로지 하나님의 숨결에만 자신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실로 오늘을 사는 선지자다. 그리스도인들은 흩어져 있지만, 세상의 바람은 거세고 일사불란하다.

진실과 영광은 우리를 만드신 이의 손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는 이 땅의 열쇠는 무리의 손에 있다. 선지자는 페이스북과 트위트의 채찍질에 둔감해야 한다. 선지자는 친구들 앞에서도, 정년심사위원들 앞에서도, 바알의 사제들로 꽉 차 있는 단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세상은 “사회적 이슈들”에 압력을 가하느라 분주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좌우로 항복하느라 바쁘다. 산뜻한 문화적 도그마를 받아들여야 사회가 우리를 받아들일 것이기에, 우리는 애를 쓰고 기를 쓴다.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무리에 순응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아버지께서 무엇을 사랑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지를 똑바로 그려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숨결은 북쪽 바다를 둘둘 말고 산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아버지의 말씀은 곡식 들판과 아직 태중에 숨어 있는 아이들을 자라게 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오로지 당신이 일으키시는 바람결만 따르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입장은―특히 논쟁 중에 있을 때―동네 커피숍의 분위기가 아니라, 오로지 정직한 말씀 이해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때로 우리는 세상이 주는 창피를 달게 받아야 한다. 창피의 뜨거운 압력이 밀려올 때 우리는 둔감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창피를 원하시면, 우리는 기꺼이 음란한 여인과 혼인을 한 다음에 사자굴 속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쇠똥으로 불을 피워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역겨운 것들과 메뚜기로 밥을 지어 먹어야 한다.

세상은 호시탐탐 우리를 창피주려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숨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쿨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모세. 바울. 그리고 예수님. 그들처럼 창피를 즐기자.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하자. 시대정신에 맞서자. 둔감해지자.

우리는 진실을 향해 서야 한다. 결코 무리를 향해 서서는 안 된다. 세상의 부흥집회, 그들의 기요틴을 좇아가서는 안 된다. CT

 


N. D. 윌슨 베스트셀러 작가, 개미 관찰자, 그리고 다섯 아이들 때문에 쉽게 산만해지는 아빠다.
N. D. Wilson, Called to Be Uncool CT 2014:6;CTK 2014:7/8

[게시:201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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