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커버스토리
내가 술을 끊은 까닭은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과시하다가 이웃사랑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D. L. 메이필드  |  D. L. Mayfield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05.30  
트위터 페이스북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iSTOCK 

나는 서른 살이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 알코올을 남용하는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물론 나도 남들처럼 맨 정신으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기는 한다. 내 이야기가 개방적인 복음주의 동료들에게는 다소 귀에 거슬릴 것이고,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보수수주의적 과거로의 역행으로 여겨질 것이다.  

좋은 것들을 즐기라고 부추기는―예술적으로 세팅된 샐러드 사진을 인스타그램하고, 피노 누아Pinot Noir[와인 제조용 포도 품종의 하나]에 관해 트윗하며, 휴가 기간 내내 찍은 사진을 패이스북에 올리는―문화 속에서,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경건주의에 진저리치는 반응이나 ‘그래 너나 예수와 잘 지내라’는 쏘아부침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신앙이란 세상과 세상의 가치들을 악하다고 경멸하고 자기만 의롭다고 생각하는 무의미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아냥거림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목회자 가정에서 자랐고, 우리 집에서 술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집안에는 성찬식을 위한 포도 주스만 있었을 뿐 술이라곤 한 방울도 없었다. 어머니 쪽 일부 친척들―부모님은 술을 퍼마신 그들을 우리의 반면교사로 삼으셨다―을 빼고는, 내가 아는 가족 중에 술을 마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느 그리스도인처럼 우리 가족도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열일곱 살 때, 차고 안 고장 난 건조기 속에 숨겨 둔 와인쿨러를 발견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자식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이따금 술을 즐기셨던 것이다. 갑작스레 나는 술에 대한 내 모든 생각을 재조정해야 했다. 술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끄윽 대는 트림, 망가진 관계, 댄스파티 하러 가는 청소년들을 가득 태운 폭주 승용차―백해무익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내가 차고에서 와인쿨러를 발견한 뒤로는, 부모님은 와인은 찬장 안에, 코코넛 럼주는 냉장고 위에 두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따금 술을 마시는 것은 삶을 즐기는 어른다운 방법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음주는 우리 가족이 과거의 근본주의 신앙에서 벗어나 폭넓게 문화를 수용하면서 성숙해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내가 나이가 차자 언니는 내게 첫 음주의 기회를 주기 위해 <위대한 레보스키>에서 제프 브리지스가 즐기던 것처럼 러시아산 백포도주를 사들고 왔다. “음주 클럽에 들어온 것 환영해.” 언니는 그렇게 말했고, 우리는 건배했다. 약간의 비딱함과 짜릿함이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 보수적인 오순절교회부터 (와인과 크래프트 맥주는 허용하는) 침례교 신학교와 (어떤 술이든 즐기는) 에큐메니컬한 선교 단체까지 다양한 기독교 문화권을 골고루 접했다. 그렇게 줄곧 나는 이따금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도 술 문화를 즐기면서 나름대로 자유롭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았다. 술집 특유의 분위기가 안겨주는 동지애와 맥주를 함께 마시는 좋은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의 연대감을 즐겼고, 그리고 음주는 긴장을 풀어주고 자연스러운 교제를 위한 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술에 대한 흥미를 더 이상 못 느끼다

그런데 지난 몇 년 사이 나는 술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 내 생각이 바뀌었다. 이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겠다는 셰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에게 감동받은 남편과 나는 빈민 사역 기독교 단체에 합류했다. 우리는 미드웨스턴 도심의 저소득층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받은 첫 번째 충격은 우리 이웃 상당수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이었다. 귀청이 울리도록 크게 틀어놓은 팻시 클라인의 음반, 돼지 멱따는 노랫소리,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싸움박질, 문이 부서져라 여닫는 소리, 인사불성이 되어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허구한 날 들렸다.

그뿐 아니라 우편물이라도 가지러 갈 때면 오전 11시인데도 술에 취해 계단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를 보곤 한다. 어떤 이는 술에 취해 생닭을 먹다가 탈이 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알코올성 정신병에 시달리며, 어떤 이는 우리 집 창문 밖 나무를 밤새 두들겨 댄다. 또 내 딸에게 사탕을 주려한다며 노크를 해서 문을 열어주면 정작 아이는 다른 방에서 자고 있는데도 마치 자기 앞에 아이가 있는 것처럼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창문을 부수거나 창밖으로 떨어지기 직전인 사람들도 있다. 거실 한편에 빈 보드카 병을 줄지어 세워 놓은 사람도 있고, 식사를 하기 위해 스토브 위에 올려놓은 프라이드치킨 스테이크가 가루가 될 정도로 타도 모르는 바람에 건물 전체를 거의 태울 뻔 했던 사람도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건물에는 눈만 돌려도 알코올성 간경변증으로 죽은 사람, 구토를 하다가 질식한 사람, 서서히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어느덧 술에 대한 흥미가 더 이상 생기지 않게 되었다. 술은 내 친구들과 이웃들을 변화시키기보다는 그들을 예측 불가능한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그 가운데 나는 무력함과 두려움과 연약함만 느낄 뿐이었다. 알코올중독으로 고통 받는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나는 하나님에 대한 내 믿음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물론 회복 단계에 있는 이웃들도 있다. 여러 단계별로 회복에 진전을 보이는 사람들은 우리 사역을 돕고 있다. 

그들은 주차장에서 블랙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머리를 흔들며 더 이상 술은 손도 안 댄다고 내게 말한다. 매일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다는 것도 은총이라는 것을 그들도 안 것이다. 
그들과 어울려 일 년 정도 생활하면서 나는 점차 그러나 단호하게 술을 끊었다. 괜히 술을 사러 갔다가 상점에서 그들을 만나게 될까봐 겁이 났다. 이웃들이 양 손에 열 두 팩씩 들고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보니 나도 맥주라도 사올까 하는 생각이 싹없어졌다. 드디어 나도 술을 완전히 끊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술을 끊을 수 없는 내 이웃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이며, 더 나아가 나를 위한 영적훈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했다. 이 세상의 특정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그 음식을 즐기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바울의 이어지는 짧은 몇 마디는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14:21) 내 이웃들의 경우에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란 곧 그들을 옭아매고 있는 알코올 중독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아주 많은 이들이 술을 끊는 과정에서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내가 사랑하게 된 그들을 돕는 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을 위한 운동가

놀랍게도 내가 점점 술을 자제하는 과정은 곧 내가 매일 대하는 알코올 중독 희생자들이 술을 끊는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또한 술이 인체에 미치는 악영향 때문에 반대 입장을 취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2세기 동안 잘 닦아 놓은 길을 마침내 나도 걷고 있었던 것이다. 1800년대와 1900년대에 주로 여성들을 주축으로 시작되고 발전한 금주운동은 술을 사회악으로 간주한 정면 대응이었다. 

역사가 루스 보딘Ruth Bordin은 기독교여자절제회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와 관련한 자신의 자서전에서 19세기를 미국 역사상 가장 술을 많이 마신 시대로 간주했다. (당시에는 물과 우유가 상대적으로 비위생적이었다는 사실도 한 원인으로 꼽힌다.) 1900년에 미국인들은 공교육에 쓰는 돈의 다섯 배를 술에 쏟아 부었다고 보딘은 기록한다. 또한 19세기 말 시카고의 고급 술집 수는 식료품점 수와 맞먹을 정도로 많았다. 

금주 운동을 펼치던 여성들은 알코올 남용 희생자들, 특히 여성과 어린이들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여성과 금주」Woman and Temperance에서 보딘은 말한다. “19세기의 술꾼들은 아내를 때리고 아이들을 학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눈곱만치도 없어 가장이라는 이름 자체가 과분하다.” 금주 운동의 선두주자로 캐리 네이션Carrie Nation을 꼽을 수 있는데, 성미가 급했던 그녀는 (말 그대로) 도끼로 술집을 때려 부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소명이라고 확신했다. 네이션의 첫 남편은 딸이 태어난 지 일 년 만에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 그러자 그녀는 “예수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향해 왈왈 짖어대는 불독”을 자처했다. 1900년에서 1920년 사이 그녀는 고급 살롱들의 기물을 파손한 혐의로 30번이나 체포되었다.

미국 역사를 보건대 당시에 여성들에겐 재산권과 소유권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가장들은 자기가 번 돈은 물론 아내의 돈으로 당당하게 술을 마셨다. 여성들 특히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술을 반대하는 단체를 조직하고 로비활동을 시작했다. 가정에서 시작된 여성들의 운동은 점차 정치권까지 확대되었다. 결국 금주 운동은 여성의 권리, 특히 선거권과 참정권으로 이어졌다. 또한 도시에 항상 빈민과 소외 계층이 존재하는 것은 술이 빚어낸 사회적 불균형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금주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금주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고급 술집 안에 모여 찬송가를 부르거나 바닥에 엎디거나 기도를 하면서 술집 주인에게 문을 닫아달라고 무수히 간청했다.  

18세기와 19세기의 영적 부흥 운동으로 뜨거워진 여러 교파의 교회들도 한 결같이 음주를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라이만 비처Lyman Beecher와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같은 개신교 설교가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개인 구원과 도덕적 경건을 강조했다. 개신교 주요 교단 거의 모두가 당시의 사회악인 노예제도, 성매매, 도박과 더불어 술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1820년대 초반에는 감리교, 침례교, 회중파 같은 교단들이 교인들에게 술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면 절대 금주 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금주 운동의 영향이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금주법이 그 예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 받는 친구와 이웃들을 대신하여 사회와 도시를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발동한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본이 되고 있다. 노예제도나 성매매, 좀더 범위를 확대해서 도박을 근절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설득력을 발휘한다. 이것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개인이나 사회에 해를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앞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절대 금주를선택했는지 그 정당성과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술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해진 현대 사회 

역사적인 맥락에서 금주가 사회정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나는 왜 혼자 크랜베리 주스를 소다수에 타서 마시면서 혼자 청승을 떠는 것처럼 느끼는 걸까? 그 이유는 교회와 폭넓은 현대 문화가 술에 대해서만은 지나친 관용을 베풀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젊은이와 여성들은 직장이나 가정에서 가중되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더 나아가 자유의 상징으로 술을 마시는 것 같다.

저널리스트 가브리엘 글레이저Gabrielle Glaser는 그녀의 저서 「여성이 술을 마시는 이유, 그리고 다시 술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Her Best-Kept Secret: Why Women Drink—and How They Can Regain Control에서 미국인의 음주에 관한 최근 연구를 살펴보면 미국인의 음주 문화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숨기기보다는 일종의 통과의례 방식으로 음주를 권하고 격려한다는 것이다. 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러한 의례는 근본주의 신앙의 틀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이러한 증거를 내 삶 속에서 확인한다. 자신의 정황이나 경험을 주로 모바일을 통해 주고 받는 내 친구들은 특히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술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전한다. 예컨대 거품이 떠있는 기네스 흑맥주 사진을 포스팅하거나 하루 종일 아이랑 씨름한 후에 와인 한잔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트윗한다. 최신 유행 위스키 바에서 생일 파티를 하기도 한다. 싱크 앤 드링크Think and Drink라는 소그룹을 운영하면서 수제 맥주에 관한 신학적 토론을 하는 교회도 있다. 술을 주제로 사진과 트윗, 이벤트를 접하면서 나는 이런 의문이 든다. ‘저들에게는 알코올 중독자 친구가 한 사람도 없을까?  

아마도 이러한 내 친구들에겐 술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이나 친구나 형제자매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현실을 알아야 마땅하다.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인 여섯 명 가운데 한 명 정도가 음주 문제(과음 또는 알코올중독을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학생 80%가 술을 마시고 그들 가운데 반 정도가 정기적으로 폭음을 한다. 크게 드러나지는 앉지만 또 다른 문제들이 있다. 특히 미국의 소외계층에서 음주로 인한 간경변증과 기타 간질환과 같은 건강상의 위협이 더욱 심하다. 18세에서 24세에 속하는 사람들의 경우 술이 폭행과 성범죄의 주원인이라고 전한다. 어린이 열 명 가운데 한 명이 알코올 남용 부모와 함께 자라고 있다. 가정위탁보호를 받고 있는 아이들 70%가 여러 형태로 술에 노출된 부모들의 영향을 받았다.

나는 이 통계에 깊이 공감한다. 실제로 그러한 아이들이 내 앞에서 뛰놀고 있기 때문이다. 술은 폭력, 정신건강 문제, 질병, 조기 사망 등, 내가 매일 목격하는 삶을 파괴시키는 본질적 요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특히 술이 어떻게 소외 계층을 짓누르고 있는지 나는 보고 있다. 적절하게 즐기면서 자유롭게 술을 즐기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는지 나는 안다. 반면에 대다수의 내 형제자매, 친구, 이웃들이 처한 현실은 나와 같은 무리의 현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다. “술 취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취해야만 술을 마신 것 같이 생각하는 질병을 앓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술을 마신다는 것에 대해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역사적으로 교회는 음주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초대 교회는 성찬식, 결혼식, 치료목적으로 포도주를 사용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또한 술 취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양심에 비추어 술을 삼가야 할 그리스도인도 있다고 이해했다.  

그리스도인의 신중한 자유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로마서 14장을 예를 들  때가 많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나 당신의 선택이 사실상 누군가를 죄짓게 만든다면 당신은 그 선택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일러 이웃사랑이라 한다. 곧이어 바울은 “멋대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든, 하나님이 주신 선한 선물을 원하지 않거나 누리려 하지 않는 사람이든,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바울이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 언급한 고린도전서 8장을 술에 관한 문제에도 적용시키는 경향이 있다. 실용주의자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 사는 것도 아니니라.”(고전8:8)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변화된 삶을 살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될까봐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인정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도록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8:13)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정도의 음식 가운데 술만 한 것이 더 있겠는가. 오늘날 알코올 남용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도 그러해야 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미치지 않겠다는 책임감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처럼은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술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주위에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술을 마시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거나 아예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8장을 읽는 현대인들은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이 첫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그 편지의 수신인들이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부터 그것을 매우 언짢게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고기를 파는 이방인들이 한 사회에서 서로 교류하는 1세기의 세계, 곧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음식과 의복, 음주 방식으로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임을 표현했던 세계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다. 저마다 출신지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던 그 시대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바울은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늘 그러하듯 바울은 이웃의 필요를 자신보다 먼저 생각하면서 사랑 안에 거하라고 당부한다.

이웃이나 친구가 끼리끼리 모였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소비사회 속의 교회답게 특정 지역의 인구분포, 인종과 신학에 맞는 입맛을 제공한다. 한 예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과 유사한 친구, 지인,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친구로 엮어 보여줄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처럼 생각하고, 자기처럼 마시고, 자기랑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끌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여 술을 즐길 생각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진짜 죄가 될 수 있다. 

당신이 “나는 베이컨을 좋아한다”는 글귀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는 무슬림이나 유대인 친구가 많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엄마들에게는 술이 필요하다”라고 포스팅한다면 나는 당신이 알코올 중독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가장 좋게 말하면 사실 진보적 기독교 소셜 미디어 세계는 소외 계층이 처한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에는 둔감한 것 같다. 가장 나쁘게 말하면 이 세계는 그리스도인이 술을 마셔야 하느냐 안 마셔야 하느냐는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관계 분열을 보여준다.

나는 세상의 악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술은 끊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악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서 술을 끊었다. 약물 남용과 중독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 모든 곳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들은 하나님과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방해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분별하게 남용되고 있다. 그로 인해 알코올 남용으로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사회적 약자를 보살펴야 하는 더욱 의미 있는 목표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을 도와주는 중요한 신학 개념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자유를 누리기도 하고 삼갈 수도 있어야 한다. 인종, 사회경제, 문화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끌어안기 위해 더 멀리 그물을 던져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 이웃들로 인해 나는 바뀌었다. 또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비춰지는 내 삶과 자유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내가 누리는 삶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현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파티를 열 때 어색해하면서도 즐거워하면서 함께 비알코올 음료를 마시기 시작한다. 친구들과 이웃과 성찬식을 할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으로 포도향이 나는 쿨 에이드를 마신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다른 사람들도 모두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스스로 삼가면서 의복, 음식, 언어, 음주 모두를 바꿔나가고 있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 금주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수 세기에 걸쳐 당연하고 효과적이고 신중한 선택으로 여겼던 금주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고해 보자고 요청한다. 빈민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빈민 사역 20년차 베테랑인 내 멘토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술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술을 마시지 않을 자유가 있다.” 

사랑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절제할 때 우리는 실로 자유롭다. 

 

D. L. 메이필드와 그녀의 가족은 빈민 사역 단체 이너체인지InnerCHANGE에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McSweeney's, Geez, The Curator, Conspire! 등에 기고하고 있다. 

D. L. Mayfield “Why I Gave Up Alcohol” CT 2014:6 임금선 옮김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68길 98 5층  |  대표전화 : 080-586-7726  |  팩스 : 02-6919-1095
발행인 : 오정현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은홍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은홍  |  사업자등록번호 : 214-88-27116  |  통신판매업신고 : 제01-2602호
Copyright © 2019 Christianity Today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