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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테이블 매너성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고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존 H. 암스트롱  |  John H. Arm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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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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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CHAEL MULLEN 

글로벌 가스펠 프로젝트
Global Gospel Project

는 1주일에 두 번 교회에 가면서 성장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교회를 싫어했다는 말이 아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나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이해가 안돼 힘들었다는 말이다. 예배 시간 동안 걸핏하면 따분해졌고, 결국 나는 그 따분한 시간을 나 홀로 재미있게 보내는 방법을 찾아냈다. 주보에 낙서를 했고 가끔씩 목사님의 설교 시간을 재기도 했다. 천장에 있는 조명등, 벽면 패널, 스테인드글라스 조각 개수를 셌다. 이런 사소한 장난을 하다가 두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설교단 뒤 성가대석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침례조baptismal pool, 그리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는 예배당 전면 정중앙의 흰색 테이블이었다. 그 테이블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몇 달에 한 번씩 저 테이블에 있는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일까? 빵과 포도주는 누가 먹을 수 있는 거지?

우리 교회는 1년에 네 번 주의 만찬Lord’s Super(성찬Communion 또는 성체성사Eucharist)을 거행했다. 왜 이걸 이렇게 가끔씩 하는지 물어보았던 기억이 난다. 돌아온 답은 한 번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너무 자주 하면, 그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조숙했던 것일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어차피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를 잃어버릴 거라고 걱정할 건 또 뭐람.’ 나이가 들면서, 나는 성찬식을 매주일 하는 교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부터는 예전에 들었던 그 답변이 더 불만족스러워졌다.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인이었든 아니면 최근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든, 다들 주의 만찬과 관련한 이야기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의문이나 좌절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심지어 의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들려준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인지, 그리고 성찬이 우리의 신앙과 실천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기독교 역사 전체를 통틀어 주의 만찬을 실천해 온 그리스도인들은 그 기원을 찾아 하나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야기는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에 일어났다. 그날 저녁,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모으셨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고, 그날의 식사가 갖는 일차 목적은 출애굽 이야기를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그날 그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제자들은 노예 생활로부터 이스라엘의 해방을 생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새로운 출애굽―모든 인간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하시고, 주님이시요 구주로 당신의 통치를 시작하실 새로운 출애굽―을 이제 곧 수행하시리라고는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랐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다시는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눅22:15-16

주의 만찬 제정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빵을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다.”(마26:26) 그 다음에 예수님은 잔을 드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26:28) 누가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들에게 보여주신 절차를 따르라고 명하셨다고 이야기 한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눅22:19) 유월절이 하나님의 해방을 거듭하여 기억하기 위한 것이듯, 주의 만찬도 그러했다. 따라서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구속된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주의 만찬을 정기적으로 행했다(고전11:24-26).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당신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이 사실을 너무나 쉽게 놓쳐버린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음을,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퀘이커와 구세군 등 소수를 제외한 모든 교단과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을 정기적으로 나누는 중요성을 분명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사실상 모두들 다음 사실들에 동의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기념으로 성찬을 제정하셨다;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것을 행하라고 우리에게 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능력 안에서 이것을 함께 행해야 한다. 더 나아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만찬은 세례 받은 사람들만 참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식사는 하나의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몇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가장 단순한 이름이 “주의 만찬”(고전11:20)이다. 이것은 또한 “주님의 식탁”(고전10:21)과 “빵을 뗌”(행2:42)이라고도 불린다. 2세기가 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성체성사Eucharist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그 식사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 즉 감사(그리스어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에서 유래; 마26:27; 고전11:24)를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에 감사드리는 식사라는 뜻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 가운데 하나는 성찬Communion이다(고전1:16, KJV). 이것은 그리스어 코이노니아koinonia에서 온 말로, “함께 참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을 할 때, 우리는 실제로 성령의 증언과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임재에 참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사실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은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 안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일치의 핵심 표지임을 분명하게 인정한다.

초대 교회에서 주의 만찬이 이렇게 중요했기 때문에 누가는 이것을 성령 충만한 공동체의 네 가지 표지 중 하나로 목록에 올렸다(행2:42). 2세기 교육 지침서 <디다케>Didache에 들어 있는 한 기도문은 주의 만찬의 주된 목표가 일치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떼어낸 이 빵이 언덕을 넘어 흩어졌고 그 다음에 다시 모아져서 한 덩어리가 된 것처럼, 여러분의 교회도 이 땅의 끝에서부터 여러분의 나라로 모이기를 바란다.” 교회의 가장 이른 시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우리 사이의 일치 둘 다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인정해 왔다. 뿐만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을 행할 때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리스도의 백성과 근본적인 일치를 경험했다고 증언했다.
  
분열의 식사
주의 만찬에 둘러앉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둘러싸고 서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오래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된다. 좀 사소한 보기 하나: 성서학자들은 신약성경이 내가 앞에서 언급한 본문들 외에도 그것을 언급하는 곳들이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언급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을 보인다(요6:22-59이 그들이 논쟁을 벌이는 한 본문이다). 이어지는 더 많은 논쟁들은 주의 만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을 얼마나 자주 행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에 누가 참여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둔다.

내가 어릴 때 다닌 교회에서처럼 성찬 테이블에 새겨진 말씀은 ‘이것을 행하라’였다. ‘이것을 논쟁하라’가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주의 만찬에 관한 다양한 신학적 뉘앙스들을 두고 우리가 논쟁을 벌일 때,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불일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교회 역사의 첫 1500년 동안, 신자들은 주의 만찬에 관해 상당히 공통된 이해를 견지했다. 서방 로마가톨릭교회는 주의 만찬은 이것을 정당하게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가져다주는 성사라고 믿었다. 그 만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진정한 현재로 만들었다(비록 피 흘림이 없더라도). 그것을 통하여 죄 사함을 얻을 수 있었다. 축성하는 순간에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했다. 이 변화를 그들은 성변화transubstantiation라 불렀다. 서방교회는 이 관점을 1059년에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이 용어 자체는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부터 사용했지만 말이다.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처럼 성체성사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해 그렇게 매달리지 않았다. 정교회 신자들은 주의 만찬을 말할 때 신비myster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신비스럽게 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들은 성변화 교리를 가르치지도 않는다. 주의 만찬의 희생적 본질과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분명하게 인정하지만 말이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극적인 변화를 서방세계에 일으켰다. 개혁자들은 성변화와 이를 둘러싸고 자라난 교리들을 의심스럽게 지켜보고는 이것을 거부했다. 주의 만찬에 관한 적어도 세 가지 관점이 다양한 프로테스탄트 전통으로부터 자라났다.

실제 육체적으로 임하신다. 이 관점은,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을 따라서, 빵과 포도주는 여전히 빵과 포도주로 남아 있지만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분명하게 인정한다. 루터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이것은 나의 피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의 관점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빵과 포도주 “안에in, 더불어with, 그리고 아래under” 있다고 설명한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전치사들은 땅의 요소들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지, 땅의 요소와 거룩한 요소들이 공간적으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나누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오직 영적으로만 임하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루터는 이렇게 생각했다: 빵과 포도주는 진정으로, 본질적으로, 그리고 신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육체적으로 임하신다.

기념론. 이 관점은, 울리히 츠빙글리의 가르침을 따라서,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어떤 식으로든 육체적 또는 영적으로 임하신다는 것을 거부한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천국에서만 육체적으로 거하시며, 빵과 포도주는 주님께서 천국에 거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확신했다. 츠빙글리는 이 표지는 우리가 감각으로 인식하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영적 실재를 지시한다고 믿었다. 그는 요한복음 6:63의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만찬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연결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라는 사상은 감각 경험과 상충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은 내 몸이다”를 비유로 이해했다. 그는 이렇게 확신했다: 주의 만찬은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기념, 곧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가시적으로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에 영적으로 임하신다.

실제 영적으로 임하신다. 이 관점은,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서, 루터와 츠빙글리의 가운데 위치해 있다. 이것은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심을 분명하게 인정한다. 칼빈은 츠빙글리의 기념론과 루터의 “괴상한 편재 개념”을, 곧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에나 언제나 육체적으로 임하실 수 있다는 개념을 거부했다. 칼빈은 이렇게 믿었다: 우리는 성찬 때에 실제로, 그러나 영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몸은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의 능력을 우리에게 전해 주셔서, 우리가 주의 만찬을 믿음으로 받는 한, 우리는 실제로 그리스도를 받는다.

칼빈과 루터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몸이 어디에 계시는가에 그 핵심이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몸은 그분의 신적 본성과 동일한 편재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신적으로 임재하시지만 오직 하늘에서만 육체적으로 임재하시며,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그리고 실제로 영적으로 임하게 하신다고 믿었다.

하나 되는 식탁
우리가 어떤 것이 주의 만찬 교리로 더 나은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우리는 종종 주의 만찬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의 하나를 잊고 있다. 심지어 훼손하기까지 한다. 바로 교회의 일치이다.

성서학자 앨런 스트리트R. Alan Streett전복적 식사Subversive Meals에서 1세기에 주의 만찬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폭력 저항의 정치 행동”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로마의 ‘위대한 전통’에 도전하며 기독교적 사회 비전을 제시”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을 행하는 것은 오만한 인간 군주에게 저항하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스트리트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우주적 구조 프로젝트로 마무리 된 주님의 만찬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주의 만찬 테이블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한 존재, 하나님의 성령의 선물을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공평하게 받은 사람이 된다.

웰링턴 공작의 일화가 주의 만찬의 사회적 의미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준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무찌른 뒤, 웰링턴 장군이 어느 작은 교회에서 성찬을 받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이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 교회의 성직자가 노인에게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얹고는 귓속말로 공작에게서 떨어져 앉으라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웰링턴 공작은 바로 노인의 손을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로 계세요. 이곳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합니다.”

주의 만찬은 초대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성령의 능력으로 기억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그리고 우리는 주의 만찬의 자리에 함께 나아간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 서로 하나 되기 위하여.

침례교 신학자 스탠리 그렌츠Stanley J. Grenz는 이 점을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크리스챤다이제스트 역간]에서 강조했다. 그렌츠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할 수 있는 주의 만찬의 세 가지 가르침을 강조했다. 이 세 가지를 통해 우리는 주의 만찬을 더욱 잘 행할 수 있게 되고, 주의 만찬을 행하고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 될 수 있다.

첫째, 주의 만찬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과 그의 나라의 미래의 성취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둘째, 주의 만찬은 한 몸을 가진 일치를 표현하며,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나타낸다. 이러한 주의 만찬은 사적인 행동이 아니라 공동의 식사이다. 셋째, 주의 만찬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즉 교회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인격적 정체성을 형성함을 보여준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의 이러한 깊은 의미들을 발견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20년 이상 교회와 대학교, 그리고 신학교에서 강연을 하는 기쁨을 누려왔다. 그리고 젊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주의 만찬에 대한 관심이 커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초교파적 경험을 통해서 나는 그들이 기독교 공동체와 하나님의 신비 둘 다에서 인격적 표현을 찾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서로, 그리고 역사적 교회와 연결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이유들로, 많은 젊은이들이 더 자주 주의 만찬을 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매주 성찬을 하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젊은이들도 많다.

주의 만찬에 관한 더 나은 교리를 찾기 위한 토론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하나가 되자.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명백하고 강력하게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그리고 서로에게 화해시키셨다. 여기에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가치가 있다. CT

존 H. 암스트롱 ACT3 Network의 대표이며 주의 만찬에 관한 네 가지 관점Understanding Four Views on the Lord’s Supper(Zondervan)의 편집자이다. 

John H. Armstrong,Feast of Love CT 2014:9; CTK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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