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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확산의 비밀때로는 강제로, 때로는 교묘하게 주변을 장악해 나갔다
엘리사 코프먼  |  Elesha Coff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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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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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 기독교와 이슬람

함마드가 사망한 632년 당시,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 일부 지역에서 안정적인 통제력을 행사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무함마드의 영토 획득은 대개 이교도 축출을 의미했고, 이슬람은 기독교 지역까지 정복하길 원했다. 마침 기독교 제국은 정치적, 교리적 전쟁에 휘말려 있던 터라 이슬람의 정복 사업은 수월하게 달성될 수 있었다.


이슬람 세계의 서쪽으로는 이집트와 기독교권 북아프리카가 있었다. 이 지역은 로마 제국 에 통합된 적이 있었지만, 6세기경에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쪽의 베르베르인들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쪽의 비잔틴인들로 분열됐다. 그리고 남쪽에는 일부 바알 숭배자들이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더 극심했던 것은 신학적 분열이었다. 비잔틴인들은,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결의한 대로 그리스도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모두 있다는 교리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단성론(Monophysite) 그리스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시리아 지역 교회들과 함께, 칼케돈 그리스도론(Chalcedonian Christology)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아프리카의 기독교는 또 정통파(catholic), 도나투스파(Donatists, 이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배교자라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 단성론과 칼케돈, 그리스도론 모두를 거부했다), 그리고 극단적 사막 금욕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들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슬람의 북쪽과 동쪽 넓은 지역에는, 세력이 약화되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강력했던 페르시아 사산 제국이 있었다. 4세기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페르시아인들은, 기독교가 숙적 로마의 새로운 종교라고 생각했다. 위협을 느낀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박해했다. 그러나 409년에 관용령이 내려진 이후로는, 페르시아인들은 교회를 파괴하기보다는 통제하는 쪽을 택했다.

페르시아는 교회의 자치에 간섭함으로써, 7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를 심각한 쇠퇴의 길로 몰아넣었다. 주류 그리스도인 집단이었던 네스토리우스파와 이들과 도저히 화해가 안 되는 대적인 단성론파 사이의 갈등은 교회의 몰락을 더욱 재촉했다.
북서쪽에는 로마 제국 영화의 잔재, 비잔틴 제국이 있었다. 무함마드 시대에, 비잔틴은 페르시아 전쟁을 치르면서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기 위해서 이집트, 시리아 같은 속지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인들과 시리아인들은 비잔틴이 물러나는 것을 반겼다. 더 이상 과중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이교도적인’ 교회들에 대한 박해도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배자를 환영하다
이처럼 무질서한 상태에 있던 중동 지역에서, 무함마드의 계승자들은 급속히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무슬림들은 무시무시한 전사이자 노련한 정치가임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적들을 때로는 죽이거나 몰아내고, 때로는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억압하면서 괴롭혔다.
최초의 이슬람 칼리프(caliph) 아부 바크르(Abu Bakr)는 중앙 아라비아를 넘어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전에 암살당했다. 그렇지만 그의 후계자인 우마르(Umar)는 시리아에서 비잔틴 군대를 패주시켰고,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를 집요하게 괴롭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그리고 페르시아 수도 크테시폰은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우마르는 아라비아 반도의 지배를 굳혔고, 페르시아의 광활한 영토에서 최소한 명목상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또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모스크를 지었다. 그렇지만 우마르의 화려한 성공은 반대 세력을 낳았다.

이슬람이 장악한 새로운 지역들 대부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슬림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무슬림 사회에는 없는 외교, 의학 전문가들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죽인다는 것은 정치 감각이 전혀 없는 조치였고, 어쨌든 꾸란은 “경전의 백성들”(Peoples of the Book, 무슬림들은 자신들과 유대교, 기독교 신자들을 통칭해서 이렇게 불렀다--역주)에 대한 더 나은 처우를 지지하고 있었다. 유명한 우마르 협정이 규정하고 있는 대로, 그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을 딤미(dhimmi), 곧 이슬람의 피보호민 집단으로 만드는 해결책을 고안했다.

이 조치는, 표면상, 특히 7세기에는, 아주 공정한 것이었다. 딤미는 특별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이슬람 법 아래에서 거의 모든 권리를 행사하고 보호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은, 다른 이교도 아랍인들에게 적용되는 것과 달리, 이슬람으로 개종하라는 강요도 받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자기네에게 유리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세금이야 어차피 늘 부담해 왔던 것이고, 이슬람 당국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치열한 교리 다툼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파 총 대주교는 동료 성직자들에게 이렇게 썼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공격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믿음을 칭찬하고 우리 사제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수도원에 유익을 주었습니다.”

은밀한 압제
불행히도, 7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우마르 협정에 숨어 있는 심각한 위협 요소를 인지하지 못했다. 이슬람의 관용을 옹호하는 현대의 논평자들도 대개 이와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 사실상 보호를 받는 딤미라는 지위는, 무슬림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러한 조치는 이슬람을 제외한 모든 종교를 서서히 침식해 들어갔다.

   

동쪽(비잔틴)과 서쪽(로마)의 기독교 권력 모두 자기네 종교가 진정한 종교로 여겨지는 것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긴 했지만, 7세기 또는 그 이후 몇 세기 동안은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강제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사실, 무슬림들은 다른 종교들에 대한 정책을 세우기 위해 기존 기독교 국가 법령들을 차용했다. 그들이 페르시아아의, 일종의 게토인 멜렛(Melet, 제국의 소수파를 통제하는 장치로, 그리스도인들을 인정받는 지위에 두었지만 제국의 일반 문제들로부터는 격리시켰다―역주) 제도를 지침으로 삼았다는 보고는 별로 없다.

여러 시기에, 특히 비교적 세속적인 칼리프 아래서, 이슬람 정권들은 기독교 정권들보다  많은 종교적 관용을, 특히 유대인들에게 베풀었다. 하지만 꾸란도, 이슬람법도 현대적인 관용에 비근한 근본적인 평등을 규정하지는 않았다.

꾸란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에 강요란 있을 수 없다”(2:258). 그렇지만 꾸란은 또 이렇게 요구한다. “알라와 종말의 날을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사도가 금한 것을 금하지 않고, 참된 종교를 믿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비록 그들이 경전의 백성들이라 하더라도 항복하여 세금을 지불할 때까지 싸우라”(9:29).

따라서 우마르의 협정은 평화조약이 아니라, 승리자의 규정에 지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따라, 이 협정은 알라가 금한 것(포도주)을 금하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무슬림의 우월성을 성문화하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비하했다.

특혜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조항들도 비무슬림 공동체들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딤미는 군복무에서 면제됐는데, 이것은 군인들이 받는 높은 특별수당이나 전리품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마르의 협정은 딤미를 마왈리(mawali) 아래 두었다. 마왈리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립인들로 이들은 일부 특권에서는 배제됐지만 군복무는 할 수 있었다.

개종을 하면 틀림없이 보상을 받았지만, 이슬람 통치 초기에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대부분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결국 모두 사라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 예배 처소를 마련할 수도 없었고 옛 처소를 보수할 수도 없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딤미 남성에게는 같은 신분의 여성과 결혼하는 것만 허용됐지만, 이슬람 남성에게는 그리스도인이나 유대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도 허용됐다. (그리고 그 자녀는 무슬림으로 키웠다.) 이슬람교는 이렇게 장악해 나갔다. CT 

Christian History & Biography 2002:74 

[게시: 2008.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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