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을 따라 떠나는 영성 문학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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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을 따라 떠나는 영성 문학 순례
  • 이문식
  • 승인 201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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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종 이후, 그의 문학 비평이 우리에게 건네는 깊은 이야기
 

든을 넘긴 노 문학평론가 이어령 선생은 나의 청춘시절에 깊은 영향을 준 분이다. 고등학교 1학년 수업시간 내내 선생님의 눈길을 피해가며 교과서 밑에 감추어 두고 읽던 이어령의 수필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아직도 벅찬 감동과 희열을 되새기게 한다.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던 병상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삶의 실존적 고뇌로 온통 뒤덮여 있던 내 젊은 영혼에 이어령 선생의 에세이들을 통해서 다가온 독일 철학자 니체는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당시 휘문출판사에서 중역된 5권의 ‘니체 전집’을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내내 끼고 살았다. 「짜라투스짜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피안」, 「도덕의 계보」 같은 무게 있는 책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집중력으로 순식간에 독파해 나가면서, 나는 어느덧 서구 실존주의와 허무주의의 철학적 세계로 깊이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 고뇌의 선상에서 만난 사람들이 도스토옙스키, 하이데거, 사르트르, 키르케고르 들이었다.

이런 젊은 날의 지적 순례에 대한 아릿한 추억과 함께 이어령 선생의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를 폈고, 나는 소년 시절의 떨림과 흥분을 다시 느꼈다. 특히 이 책에 진입부에서 소개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대심문관’ 편은 지금도 내 영혼을 숨 쉬지 못하게 할 것 같은 진한 영적 긴박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반 그리고 대심문관을 만나다, 교회를 보다

사실 도스토옙스키는 자주 간질발작을 일으켰으며 그때마다 견딜 수 없는 죽음과 절망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지는 실존체험을 하였다. 거의 정신병적 수준의 트라우마에 접한 사람만이 쏟아낼 수 있는 내적 긴박성은 바로 그런 그의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동생 알로샤에게 ‘대심문관’ 이야기를 쏟아내는 이반은 현대인들의 전형이다. 냉정한 이성과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신론적 혁명에 대한 열정이 뒤섞여 있는 이반은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실체를 비웃듯이 대심문관 이야기로 풀어낸다. 아흔이 넘은 대심문관은 150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예수님을 체포하고 한밤중에 직접 심문하며 교회가 결국은 마귀의 유혹대로 빵 만들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또 다시 빵 만들기를 거절한 예수를 다시 못 박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긴 회상조로 털어 놓는다. 그는 교회는 결국 ‘빵 만들기를 거절한 예수’보다는 ‘빵을 만들라고 요구하는 마귀를 택했다’고 예수 앞에서 최후의 고백을 한다.

“우리들이 함께 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악마)요,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비밀이지.” 라고 토해 놓는다.

이어령 선생은 이 대심문관의 고백이야말로 바로 현실 속에 있는 교회들―러시아 혁명기의 교회와 오늘 한국의 교회 모두―의 실체라고 지적한다. 빵과 권력을 추구하고 있는 현실 교회들은 또 다시 예수를 심문하고 십자가에 다시 못 박을 수밖에 없는 도덕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런 교회로부터 등을 돌린 ‘안티 크라이스트’ 이반은 그도 결국은 ‘빵을 위한 혁명’을 택할 것을 암시한다. 러시아 초기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는지 보여주는 영적 단면도가 바로 이 이야기에 나타난다. 빵의 권력을 택한 교회와 빵 만들기라는 민중의 욕구를 택한 공산주의 혁명의 비극적인 동거가 러시아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예언자적 장면인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작가적 예민함과 선지자적 감수성으로 파악한 당시 러시아 사회의 한 단면도다.

이어령 선생은 이 ‘대심문관’ 이야기를 통하여 당시 러시아 사회의 비극과 교회의 처절한 배신을 마치 창문을 열듯이 보여주고 있다. 그의 해설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우리들 인간의 얼굴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을 그는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런 악마성이 지배하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인간이 여전히 실존하는 힘은 바로 이반이 냉소적으로 흘려 낸 표현 “카라마조프의… 카라마조프의 저열한 힘”인 것이다. 즉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지칭하는 이 카라마조프의 저열한 힘은 악마적 현실을 능히 견뎌내는 인간의 원죄적 실존이다. 이어령 선생의 이런 통찰력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어령 선생의 해석이 이처럼 지성을 넘어 영성으로까지 더 길게 이어진 힘은 바로 그의 신앙이다. 그의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실존을 원죄의 뿌리까지 근원적으로 살피게 하였다.

알료샤를 만나다, 예수를 보다

동시에 이어령은 과거와는 달리 희망도 내다본다. 카라마조프의 또 다른 형제 알료샤는 순수한 구도자다. 알료샤와 조시마 장로의 대화는 이반이 이야기한 예수와 대심문관의 대화와 중첩되며 병렬한다. 그리고 이 대화 속에서 이반의 절망과는 달리 영성적 희망이 알료샤를 통해서 희미하게 드러난다. 이전의 이어령이라면 결코 이런 부분에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사 주목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깊이 들여다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어령은 알료샤를 깊이 주목하며 그를 “물구나무 선 표도르”로 해석한다. 동물적 욕망으로 그 삶을 일관한 아버지 표도르, 종교성과 혁명성 사이에서 스스로 인간의 비열함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반과 달리 알료샤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구도자이다. 그의 순수성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정화시킨다. 산소와 같은 알료샤의 순수함 앞에서 창녀 구르센카조차도 성녀로 변한다. 알료샤는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에서 다시 성육신하신 예수 그 자체이다. 이 알료샤 같은 인물이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소설에도 나온다. 「죄와 벌」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소냐, 「백치」의 남자 주인공 뮈시킨 공작 같은 캐릭터는 바로 알료샤의 원형적 인물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악마성과 직시하고 고뇌하면서도, 알료샤와 같은 순수한 원형적 아담들을 계속 대비시킨다. 이것은 평생 자기 내면에 있는 죄성(도박중독증)에 신음하면서도 예수를 통한 구원을 끊임없이 갈망했던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자아다. 개종 이전의 이어령이라면 이 알료샤는 그저 희망의 상징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종 이후의 이어령에게 이 알료샤는 현존하는 예수다. 그저 의미만 있는 상징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실재인 성례전적 인물이다. 이처럼 개종 이후의 이어령은 도스토옙스키의 실존적 자아와 더불어 내재해 존재했던 종교적 자아를 더욱 클로즈업하고 있다. 그는 서평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완성하지 못한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죄인들아 서러워 말자,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라는 작은 제목을 붙였는데(75쪽), 이 제목이 바로 그의 믿음의 소망을 아주 잘 암시해 주고 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가 미처 쓰지 못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편’을 써야 할 책임이 자신과 함께 도스토옙스키를 읽은 한국 독자들의 몫이라고 주장하며 ‘알료샤의 미래가 어떻게 됐을까’에 무한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드러낸다. 이어령 스스로 이처럼 이반에게서 알료샤에게로 자신의 시선이 옮겨간 것 자체가 개종 이후의 자기 정신의 궤적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서두에서 고백하고 있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 ‘말테의 수기’ ‘탕자 돌아오다’ ‘레미제라블’ ‘파이 이야기’는 이렇게 전환점을 맞은 그의 내면에 대한 또 다른 설명들이다. 어떻게 보면 카라마조프 이야기들의  부록 같은 글들이다.

말테의 수기, 생명을 향한 영성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는 이어령이 뽑은 또 하나의 신앙 고백적 소회가 깊이 뿜어 나오는 책이다. 이어령은 젊은 시절 「말테의 수기」를 얼마나 깊이 좋아했던지 이 책을 읽고도 감동하지 못하는 인간과 공감하는 인간 둘로 사람을 구분할 정도였다. 그는 「말테의 수기」를 아름다운 영혼들을 만나는 여행이라고까지 평하는데, 이 글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피가 나도록 손톱으로 긁어서 드러낸 생명의 이야기라고 극찬한다. 이어령에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는 도스토옙스키에서 나타난 원형적 아담의 내면을 드러내는 또 다른 생명 이야기이다. 릴케의 시인적 감성이 죽음을 묘사하면서도 실은 죽음 너머의 생명에 대한 투명한 감수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노년의 그리스도인 이어령의 생명을 향한 영성은 「말테의 수기」에 나타난 죽음 너머의 생명에 대한 영롱한 감수성과 어우러져 새로운 영성순례의 한 장면이 된 것이다.

우리, ‘집안의 탕자’들

이어서 이어령은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를 자신의 심경을 담아 해설한다. 특히 성경의 비유와 앙드레 지드의 이야기의 차이점을 드러내면서 재해석한다. 왜 아들이 집을 나갔으며 왜 돌아왔는가를 이야기하는 앙드레 지드의 관점은 철저히 인간중심적이다.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의 아버지와 탕자의 대화 중, “애야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뭐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떠난 적이 없다”라고 대답한다. 이어령은 탕자는 집을 떠났을 뿐 아버지를 떠난 적은 없다는 것을 아주 날카롭게 강조한다. 결국 체제 기독교 또는  종교적 형식의 삶을 떠난 오늘의 현대인들을 무조건 무신론자(탕자)로 규정하는 것은 집에 남아 있는 탕자들 즉 바리새인들의 규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비록 집은 떠났지만 여전히 그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는 역설을 이어령은 다시 강조한다. 예수는 종교라는 형식 울타리로 그 사랑을 제한하지 않는다. 여전히 집 밖에 있었지만 늘 광야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탕자야말로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 사랑을 깊이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어령은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이 이야기는 교회 체제 안에 있는 신자들만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우리 목회자들의 경직된 사고를 깊이 반성케 한다. 우리는 체제 종교가 된 기독교의 상속자로서 머문 ‘집 안의 탕자’요 ‘바리새인 장남’인지도 모른다. 

레미제라블 유행 너머

이어령은 「레미제라블」을 기독교의 사랑과 역사적 혁명 사이에서 고뇌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으로 파악한다. 이어령은 그 전과는 달리 ‘장발장’보다는 ‘미리엘 주교’의 이야기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은 빅토르 위고가 혁명을 인정하면서도 ‘사랑이 없는 혁명은 안 된다’고 외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장발장은 마지막 죽어가면서 ‘신부님을 부를까요’라는 말에 ‘자기에게는 신부님이 한 분 계시다’며 사양한다. 소설 서두에서 나왔던 은촛대를 준 미리엘 신부가 이미 그의 곁에 있는 것이다.

미리엘 신부 얘기를 하면서 이어령은 만일 프랑스의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에게 이 은촛대가 있었다면 프랑스 혁명이 그처럼 사랑 없는 혁명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특히 이어령은 근자에 일어났던 레미제라블 붐을 평가하면서 그만큼 ‘혁명을 완성하는 사랑’을 역설하며 진짜 미리엘 신부 같은 그리스도인이 늘어나야만 우리나라에 희망이 생긴다고 강조한다. 만일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로베스피에르만 양성될 것이며 한국은 불행한 혁명이 반복되는 비참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어령의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는 개종 이후의 이어령이 예수의 눈으로 다시 읽는 문학여행이다. 이 여행 속에는 이전과는 다른 영성적 차원이 녹아있다. 이 이야기 여행 속에는 우리의 가슴을 뒤흔드는 감동적인 인간이해와 초월적인 영성적 통찰이 함께 녹아있다. 종교적 경직을 넘어서고자 하는 모든 구도자들에게 이 책과 함께 떠나는 순례 여행을 권한다. CTK 2014:12 이문식 광교산울교회 목사
 

이문식 목사와 함께 영성의 눈으로 문화 읽기

“그 ‘신들’과 함께하기에는” 영화 〈신과 함께〉 리뷰  CTK 2018:3

“그분은 사랑 때문에 죽었다” 소설 「벤허」와 영화 〈벤허〉 이야기 CTK 2016:3

“어둠아 가라” 〈검은 사제들〉 리뷰 CTK 2015:12

 

이문식 목사, 우리 사회를 읽다

“‘전원주’가 답이다” CTK 2011:1

“‘노무현의 죽음’이 우리에게 던진 과제” CTK 20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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