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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광야가 없는 기독교가 기독교인가절대 소외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신 그를 따르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다
김은홍  |  amos@ct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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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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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령 선생을 만났다. 최근에 나온 그의「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를 두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준비해 간 질문의 절반도 질문하지 못했고, 그의 답변의 절반도 여기 담지 못했다. 회심 전이나 후나 그는 여전히 그의 말대로 “글 쓰는 사람”이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영성의 사람이라는 사실. 그렇지만 그의 지성 역시 여전했다. 영성은 그의 지성을 무디게 하지 않았고, 지성은 그의 영성을 식히지 않았다. 우리 교회와 세상에 대한 그의 마음은 그래서 여전히 예리하고 더욱 따뜻했다. 지난 11월 5일 서울 평창동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김은홍 편집인이 그를 만나 나눈 이야기다.


젊은 시절에 국어교사도 하셨고, 언론사에서 칼럼도 쓰시고, 장관도 하셨다. 여러 가지 직함이나 직위를 가지셨고, 지금도 갖고 계신다. 이 책에서는 문학평론가라고 저자 소개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나는 글 쓰는 사람이다. 말하고 글 쓰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했지, 먹고 살기 위해서 직업을 가진 적은 없다. 그런 점에서 행복하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직업을 가지든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직함을 가졌든, 나는 평생 언어와 문자와 관련된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문학 하는 사람이 어떻게 올림픽을 하고 새천년 행사를 하나?’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라운드에다가 글을 쓴 것이다.’ 글 쓰는 데가 다를 뿐이다.


최근에 세 편의 책을 쓰셨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지성과 영성의 만남」 그리고 이 책,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세 권에 모두 ‘영성’이 들어있다. 영성의 개념, 일부에서는 심지어는 이 용어 사용 자체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평생 자기가 하고자 하는 근본이 어디서 나오는지 물으면, 체육선수는 체력에서 나온다고 할 것이다. 목사님은? 영성이다. 신학자도 마찬가지다. 영성이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분들은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 아닐까? 나는 여태까지 영성을 해온 사람이 아니다. 지성을 해온 사람이다. 철학자는 감성을 토대로 하지 않는다. 감성은 자꾸 바뀌고 주관적이고 변하는 것이다. 감성으로만 생각하던 이들이 마음으로, 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기독교는 종교다. 과학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다. 초월적이지 않은 것은 종교가 아니다. 과학, 예술, 인문학, 철학의 일부일지언정 종교라고 부르진 않는다. 내가 쓰는 영성이라는 것은, 이미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말했듯이, 내가 체험한 것이다.

나는 교토에 가서 연구소에 있었다. 연구소는 완전히 지적인 훈련을 하는 곳이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문학, 철학하려고 일본에 간 것이다. 그런데 그 연구소의 불빛을 보고 오는 동안에,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 나오는 사나토리움 같은, 가도 가도 멀어지는 섬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때 나는 이미 이성이나 지성이나 객원 연구교수나 연구원이 아니라 깜깜한 밤중에 황량한 들판에 불빛 하나 보고 무거운 쌀 짐 지고 걸어가는 나였다. 그런 나의 모습을 수천 장의 글로 썼다. 그날 내 빈 방에 오니 갑자기 책상이 제단처럼 보였다. 글쓰기를 위한 책상이 아니라 기도하기 위한 제단으로 보인 것이다. 그래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도 쓰게 된 것이다. 늘 글 쓰던 사람이 칠십 평생 글 써오던 책상이 제단이 된 것이다. 그때 감성이나 지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을, 밖에서 왔건 내 안에서 왔건, 나는 분명히 그때 체험을 했다.

왜 기독교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하면 거부 반응을 보이는가? 르네상스 이후로 이성적 사고가 중시되고 과학이 들어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르네상스 이후에 과학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리고 정치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복지사회란 원래는 예수교에서 말하는 필리아,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과부와 어린 아이들을 도와주어라.’ 기독교의 복지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정치는 공동체, 국가, 민족을 위해서 복지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서양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민족이나 국가를 넘어서서 정말 한 생명이 불쌍하다 여겨서 하는 그런 복지가 아닌 것이다. 오늘날의 복지가 정말 사랑에서 나온 거라면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하겠는가. 다른 국가 사람들을 위해서도 해야 한다. 똑같이 ‘복지’라고 말해도 기독교 본래의 복지를 말하는 것인지, 오늘날 유행하는 하나의 정치집단과 관련된 복지를 말하는 것인지,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신학이 과학의 합리주의에 무릎 꿇고 압도당하다가 보니까 기독교마저도 지성으로, 과학으로 복지를 한다. 종교라는 이름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다.


엄청난 ‘복지 사역’을 하고 있음에도, 역설적이게도, 오늘 우리 교회에는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그 “파 뿌리 하나”가 없는 것 같다.

예수님은 40일간 광야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욕망인 밥을 굶고,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외롭게 홀로 지내셨다. 40일 동안의 광야가 없는 종교가 종교인가? 광야 이전의 종교는 정치, 종교, 문학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떨치기 위해서 광야로 가서 혼자서 계신 것이다. 그때 마귀가 나타나 돌 주면서 ‘빵 만들어 봐라’고 그랬다. 오늘날의 복지 사역자라면, “예, 굶주린 사람을 위해서 당장 만들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40일 동안 기도했으니까요.”라면서. 돌멩이로 빵을 만드는 기적, 그런 ‘경제 하나님’, 그런 ‘정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어 버렸다. 예수님이 왜 빵을 안 만드셨는지, 그걸 모르면 그것이 기독교인가? 그걸 모르고 복지사역 하면 그것이 기독교인가?

예수님은 빵을 만들지 않으시고 뭐라고 하셨나? 빵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으셨다.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 말씀, 그것이 기독교다. 입으로 들어가는 떡만 이야기하고 입 밖으로 나가는 하나님 말씀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속적인 차원에 그냥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의 정략적인 복지다. 그것은 정치가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하는 것이다. 다른 종교도 다 하지 않는가.

오늘날 교회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독교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하시고 산으로 도망가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병이어를 보려고 교회로 모여든다. 전혀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 말하지 않고, ‘빵만으로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교회’가 되면, 오병이어 이야기만 하게 되고, 돌로 빵 만들어 주는 하나님을 찾게 되고, 위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게 되는 기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고, 결국 권력을 쫓게 된다.

예수님은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욕망을 버리셨는데, 우리는 버리지 못했다. ‘나에게도 광야가 있었는가? 이 세속의 삶에서 떨어져 나오는 40일 동안의 광야의 시련을 내가 겪어보았는가? 마귀가 나한테 물었을 때, 예수님처럼 답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없었다”고 한다면, 기독교나 종교 이야기 꺼내지 말고 그냥 사회운동 하고, 세속에서 ‘정치’ 하고 ‘경제’ 해야 한다.


“작품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영성을 발견하는 일이 나의 사명이다”라고 하셨다. 그것을 “순례”라고 표현하셨다.

하나님께 맹세한 것이다. 사람하고 약속한 것도 어기면 사기꾼이 되는데, 하나님이랑 약속한 것은 절대로 헤어날 수 없다. 내 딸이 마지막에 그랬다. “아빠, 나는 이 세상이 이렇게 빛나는 건지 몰랐어.” 눈을 뜨고 보니 세상이 너무 아름다운 거다. 그걸 내가 준 거고 하나님이 주신 거라는 말이다. 내 딸이 눈을 떠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가 이렇게 찬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봤다. 딸아이가 그렇게 눈 떠서 기뻐했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라고 그러겠는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이런 얘기하면 많은 독자가 떨어져 나가는 거 안다. 인터넷 보면 내 욕하는 사람 많다. 한국 문학 얘기하고 평생 그러더니 이제 와서 기독교 얘기한다고.

나는 아직도 탑에서 떨어져 안 죽는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명해 주셨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다. 내게 지상의 권력이 있어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불의한 사람들을 크게 한칼에 쳐버리고 싶은 욕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아직도 나는 돌멩이 가지고 빵 만들고 싶은 사람이다. 악마에 진다, 지금도. 착한 사람인데 밥 굶는 사람들 보면 당장에라도 돌 가지고 빵 만들고 싶다. 마귀가 “그래라”라고 하면 “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말도 잘 못하겠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약속하지 않았나. ‘나는 글 쓰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봉사를 하겠는데, 딴 걸로는 못합니다.’ 배운 게 글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십일조, 나의 하나님에 대한 봉사는, 교회에 잘 나가고 주차 정리 해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책 열심히 써서 틈틈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광야에 외치시는 목소리를, 내가 정직하지는 못하지만, 목사님이 못하시는 문학적인 수사학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쓴 게 세 권의 책이다.

‘지금 보니 이렇게 내가 예수님을,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구나, 나는 내가 어릴 때부터 무신론자인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찾고 계셨구나, 끝없이 내가 거기로 가고 있구나.’ 내가 찾는 하나님, 내가 가는 길을 감히 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지만, 이런 내 모습을 문학인으로서 글을 통해서 솔직히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이런 책이 나가서, 이런 말을 전하다가, 돌멩이로 빵 못 만드는 출판사가 굶으면 너무 미안할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오늘 인터뷰도 하는 거다.(웃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마리아인을 끌어안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는 분이 예수님이다. 당시 사마리아인이 어떤 사람인가? 지금으로 따지면 친일파, 빨갱이, 더 옛날로 가면 몽고병사, 그런 사람들이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지도 못한 사람, 만지지도 못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거기로 다니셨는가? 기독교 정신이 유니버설하다는 것은, 경제적 상품의 글로벌리즘이 아니라, 사랑이 국경을 넘어서는 그런 글로벌리즘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그 과부를 끌어안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는 그런 비슷한 사람이라도 있나? 그런 사람들 조롱하고, 화냥년이라고 놀리는 사람만 있다. 오죽하면 그 여인이 사람들이 없을 때 물 길러 혼자 오지 않나.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다.

남들과 여럿이 물 길러 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기독교 안 믿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남들이 오지 않을 때 와서 물을 길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절대적인 자기 외로움과 절대 소외, 이 세속적 삶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암환자라도 좋고 죄수라고 좋고 탕자처럼 버림받은 자식이라도 좋고, 그런 사람이 마지막 손을 내밀 수 있는 곳이 예수님이다. 그런 예수님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다.

그런데 마지막 손을 내밀 필요가 없는 사람이 그것까지도 손을 내밀어서 그런 외로운 사람들을 만져주실 예수님까지도 독점하려고 한다.


결국 우리 교회에는 “형님”만 넘치는 게 아닐까

상속자가 너무 많다. “나는 아버지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아버지 집에만 아버지가 계신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를 배신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앙드레 지드의 탕자, 그의 ‘탕자, 돌아오다’의 탕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탕자는 형님이 싫어서 나간 것이다. 형님이 아버지 집의 상속자라 그러고, 그 집이 자기 것이라고 하니까. 

들판에 썩은 석류가 아버지가 잡아주시는 살찐 송아지보다도 맛있다고 한다. 왜? 목마름이 없고 배고픔이 없는데 무슨 물 맛, 음식 맛이 나겠나. 이 집에는 목마름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떠나보니까 아버지에 대해 목마름이 생깁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서의 탕자 이야기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쓴 것이다. 아들 입장에서 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는 우리는 아버지가 제대로 안 되어 봤으니 모르지만 아들은 이해한다는 것이다. 탕자의 입장, 인간의 입장에서 쓴 것이 앙드레 지드가 쓴 책이다. 앙드레 지드가 신을 믿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신학에서는 안 될 소리지만, 죄 많은 인간의 입장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안 그랬나? “내가 저것을 멸할 것이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예, 죽이세요.”라고 했나? 아니다. “의인 백 사람 있으면 멸하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했다. 오십 명, 스물다섯 명, 이런 식으로 아브라함은 자꾸 깎는다. 하나님 편에 선 게 아니라 불쌍한 죄인의 입장에서 섰다. 그게 의인 아닌가. 하나님 편에만 생각하면 그게 무슨 의인인가. 아브라함이 왜 깎는가? 의로우신 하나님 편이라면 ‘백 명이 아닌 천 명이 있더라도 죽이시오.’라고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게 백 번 옳지만 그래도 거기 내 처자식들, 내 친구들, 지인들이 있기 때문에, 죄 짓는 게 정말 나쁜 것인 줄 알지만, 그래도….’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 아닌가? 


영화 <레미제라블>에 대해 비판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빵 먹었다고 가둬놓는 사회에서 ‘내가 준 것이다’라고 하는, 은촛대 두 개를 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영화는 혁명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그래서 영화 보고 나오면 아이들이 ‘엄마, 나도 혁명 할래’ 한다. 빅토르 위고의 그 문학에서는 당치도 않은 것이다.

왜 빅토르 위고는 그 작품을 고제트가 사랑을 하는, 결혼 이야기로 끝냈겠는가? 위고는 내 묘비에 아무것도 쓰지 말라고 했다. ‘은촛대 두 개가 나의 신부고, 나의 종교다.’라고 하지 않았나.

빅토르 위고의 이 같은 문학을 왜곡해서 그런 영화를 만들면 사람들이 가슴이 뛸 수밖에 없다. 악마가 가장 이용하기 좋은 곳이 교회와 영화관이다. 신념을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악마가 교회에 들어가서, 영화관에 들어가서 속이는 것이다. 악마는 마지막 남은 예술, 마지막 남은 교회를 점령하면 다 점령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의 역할이 크고 예술의 역할이 큰 것이다.

그런 영화는 포퓰리즘이고 자기 죄를 그런 식으로 멸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 나는 저 영화 봤어. 나는 가난한 사람 편이야.’ 회개하지 않고, ‘나, 이 영화 보면서 눈물 흘렸어.’ 그걸로 자기 알리바이 만들고,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고, 감미로운 눈물로 영화 감상으로 끝내는 것이다.


딱 그 정도 수준인 것 같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그 처절함 속에서 영성을 추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영화를 보면서 감상에 젖는 수준이다. 

예수님은 ‘너희 옷을 찢지 말고, 회개할 때는 가슴을 찢어라.”라고 말씀하셨다. 참 기가 막힌 말씀이다. 우리는 영화관에서 옷만 찢고 있다. 가슴을 찢지 않는다. 나는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진 게 아니라, 글을 쓰는 장소가 여러 곳이었을 뿐이라고 앞에서 얘기했었다. 다 가슴에다 쓰는 것이다. 그래서 ‘문’은 곧 ‘문신’이다. 그것이 곧 ‘프리즌 브레이크’, 내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가 장발장만 감옥에 가뒀나? 온 인류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탈출 못한다. 자꾸 붙들린다. 진짜 탈출을 누가 시켰나? 미리엘 신부다. 은촛대 주는 걸로 탈출이 가능했던 것이다.  CTK

(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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