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뷰 > 영화
영화 <제자, 옥한흠>이 남긴 아쉬움'중립'일까? 중립'이어야' 할까?
최은  |  silverphh@g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12.31  
트위터 페이스북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최은의 시네마 투데이

2014년은 극장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구애를 해온 한해였다. 북한 지하교회를 다룬 신이 보낸 사람을 시작으로, 노아 선 오브 갓엑소더스: 신들과 왕들과 같은 해외 성경 내러티브 영화들이 줄줄이 소개되었고, 그 사이에는 선교와 순교를 다룬 또 다른 영화 시선이 있었다. 연말에는 제자, 옥한흠〉 〈쿼바디스〉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등 기독교 인물과 사건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나란히 개봉했다.

통렬한 비판부터 적극적인 옹호와 호소에 이르기까지 복음과 기독교에 대한 입장은 다양하지만, 이 영화들이 저마다 복음의 가치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물으며 그리스도인들의 대화와 참여를 요청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이들 중 그리스도인이 만든 영화들은 그간 소극적이거나 심지어 배타적인 문화의 수용자를 자처해왔던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적극적인 생산자로 문화에 개입하고 있다는 반가운 표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생산적인 작업과 참여를 지속적으로, 더 폭넓게 이어갈 수 있을까?

여기에는 간과되기 쉬운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이러한 참여는 어떤 면에서 우리들의 이야기혹은 사람들이 너님들(너희들)’ 이야기라고 종종 경멸조로 말하는 이야기를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포괄하는 대중과 함께나누는 일이라는 점이다. 멀티플렉스를 포함한 전국 개봉관에서 두 달 동안 47000여 관객(201412월 현재)을 불러들인 기독교 다큐멘터리 제자, 옥한흠은 그 가능성과 한계를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성직자 다큐멘터리전성시대(?)제자, 옥한흠

남수단의 의료선교사였던 고 이태석 신부를 다룬 영화 울지마 톤즈(2010)가 독립영화이자 종교적 다큐멘터리로서는 이례적으로 44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한 이후 종교인의 전기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일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제자, 옥한흠에 이어 고 손양원 목사의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2014)이 나왔고, 그보다 몇 개월 전에는 그 사람 추기경(2013), 두 해 전에는 한경직(2012)이 있었다. 불교계에서 법정스님의 의자(2011)를 개봉한 것도 이 즈음이다.

다른 영화들이 모두 지상파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먼저 소개되어 타 종교인들로부터도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를 획득한 인물들을 다루거나 이미 제작 방영된 TV 다큐멘터리를 보완한 경우라면, 제자, 옥한흠은 처음부터 극장 개봉을 염두에 둔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영화와 사뭇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널리 송출(broad-cast)되므로, 공식적으로 객관성과 공정성을 표방하는 지상파 방송에 비해 영화는, 특히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는 보통 확실한 타깃관객층을 염두에 두고 기획된다. 이는 흥행영화가 되기에는 불리한 출발이지만, 다른 의미로는 오히려 작은 영화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호응을 기대하는 관객층이 분명하므로 논점이 분명한 이야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들은 또한 언제든지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과 대화하거나 심지어 투쟁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사랑의교회 현안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고 몸부림쳤다는 김상철 감독의 뉴스앤조이인터뷰 기사는 그래서 적잖이 의아했다. 보관용 기록 영상이나 사적 자료가 아닌 이상 극장에서 티켓을 판매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중립적이어야 할까? 그것은 윤리적인가? ‘중립적인다큐멘터리가 가능하기는 한가? 영화는 혹시 객관성과 중립의 함정에 갇혀 작은 영화의 특권인 적극적인 대화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데 제자, 옥한흠은 정말 중립적인가? 그러한 미학적 선택은 영화의 메시지에 부합하는가?

제자옥한흠중립적 인가?

1920~30년대 다큐멘터리 영화의 초창기에 활동하며 장르의 기틀을 다졌던 존 그리어슨은 다큐멘터리의 근본적인 힘은 미학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인 힘이라고 주장했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영향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를테면 현실에 대한 창조적인 치유책이라는 입장이다. 심지어 그는 나는 영화를 일종의 설교단으로 보고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으며,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해 잘 조직되고 선별된 자료들로 치밀하게 구성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대부분의 내용을 인터뷰와 고 옥목사의 선별된 설교 장면으로 구성하면서, 한국 교회에 널리 영향을 미치기를 바랐을 제자, 옥한흠은 영화적으로는 그리어슨의 전통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제자, 옥한흠은 자신이 바꾸고 싶은 세상을 너무 좁게 잡았다. 고 옥한흠 목사를 알고 그를 그리워하는 그리스도인들(대개는 직간접적인 그의 제자들일 것이다)이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또는 화내지 않고 감동적으로 그분의 뜻을 기리기를 간절히 바란 나머지, 영화는 한국 교회의 현주소로 인한 동시대 대중(어쩌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 이들)의 깊은 상처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았다. 본디 다큐멘터리의 관객층은 좁지만, 그들이 치유하고 바꿀 것으로 기대되는 세상은 상처받은 온 세상일 수 있다. 은보 기념관 상영물이나 기독교 TV 채널 보급용 추모영상이 아니라, 이왕 대중에 노출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면, 조금 더 확실하게 편을 들었으면어땠을까. 교계 안팎에서 오히려 더 많은 생산적인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여기서 확실하게라고 말하는 까닭은 일단, 중립을 지키려는 감독의 의도가 그리 성공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입장이 다른 인물들의 인터뷰를 동등하게 실었다고 해서 중립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명백하게 고 옥한흠 목사와 교회갱신위원회와 그의 가족들의 편에 선 속내와 현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인물 설정과 카메라 움직임, 편집과 사운드 등 영화의 미학적 요소들을 통해 노출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서두에 등장해서 옥 목사의 묘소를 찾아 그를 추모하던 배우 권오중이 다시 등장하여 사랑의교회 강남 성전과 서초 성전을 차례로 찾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강남 성전에 그가 들어가서 예배당을 거니는 동안 그가 가는 곳마다 벽에 걸린 모니터에는 옥한흠 목사의 설교 영상이 흐르고 있다. 반면 서초 강단 벽면에 쓰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유독 공허하게 보인다. 화려하고 넓은 그 홀에 옥 목사(제자또는 스승’)의 이미지가 들어설 틈은 없어 보인다고, 영화는 권오중의 말없는 뒷모습을 통해 전해온다.

그렇다면 그가 관객과 옥 목사의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배당 모니터를 통해 마지막으로 듣고 있는 고인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영화는 놀랍게도 옥 목사의 생전 설교 중 고난의 길을 가는 자녀들에 대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선택했다. , “나는 소중한 존재이므로, 오늘은 고생하지만 내일은 춤을 출 것이다. 이처럼 제자, 옥한흠이 선택한 메시지의 흐름은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에 대한 통렬한 책임의식으로 울고 회개와 십자가로의 회귀를 촉구하던 고인의 일관된 외침으로 시작부터 중반을 내내 달리다가 건강과 가족이라는 자기희생의 서사를 거쳐, 결국 위로로 종결을 맞는다. 그리하여 현실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지만, 스승의 꾸짖음에 내내 눈물로 반응하던 관객들은 이제 우리가 돌이켜 무엇을 해야 할까?” 라는 가슴 아픈 물음 대신 오늘의 고생을 끝까지 견디기를 다짐하며 비장하게 극장 문을 나서게 된다.

그런데 영화의 이러한 자기검열의 과정과 그 결과물이 더욱 참담한 것은 그것이 그대로 현재 사회와 문화를 읽는 한국 교회의 형편과 위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속화를 경계하고 제자도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외침이 평생 골프를 치지 않고 휴가 가면서 기도원 간다고 목회자가 거짓말하지 않는, 그런 수준은 아니지 않는가.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눈높이는 꼭 거기까지밖에 낮아질 수 없음을 영화가 방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영화가 인용한 고인의 진단대로 모든 것이 치우치고 왜곡되어 있다면, 그런 세상에서 균형이란 타협이나 기울어짐의 다른 이름이다.

요컨대 제자, 옥한흠은 이중의 한계 혹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그 하나는 중립성을 표방하되 충분히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성급한 봉합으로 획득된(?) 메시지의 중립성이 오히려 옥 목사의 제자도 가르침과 한국 교회의 상흔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는 주제를 중립적인 방식으로 구현해보려는 데서 시작된 균열일 것이다.

한 편의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은 단지 묵상 나눔이나 신앙고백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새물결플러스 역간 ▶리뷰)의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의 생각에 기대자면, 그것은 척박한 대중문화의 영역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현존을 알리는 일이며 교회 공동체의 울타리가 아닌 공공의 영역, 다시 말하면 광장의 영역에 뛰어들어 참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복음과 제자도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고 때로 정치적 입장과 견해와 상관없이 십자가와 주만 바라보며 견디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 땅의 고통과 분열을 끌어안고 때로 옳다 여겨지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충돌해가며 그렇게 할 수는 없을까?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옥한흠 목사의 마지막 라이브 강연 영상에서 강조했던 그 말을 삶으로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일 뿐 아니라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다.” 바로 그 세상이 교회를, 교회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영화를 지켜보고 있다. CTK

최은 대중영화가 동시대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에 관해 연구하고 있는 영화평론가. 영화와 사회(한나래), 알고 누리는 영상문화(소도)를 함께 펴냈다.


최은시네마 투데이 더보기
친숙하고도 낯선 상상의 나라 '나니아'
축구로 싸맨 동티모르, 그리고
 "당신을 '가족'으로 모십니다"
• 진실 없이 용서가 가능한가
• ‘얼간이’라 불린 ‘천재’의 반전
누가 진짜 갇힌 자인가
어느 순응주의자의 모방 욕망, '카멜레온 되기'

그들이 보여주는 더 진한 '나라 사랑'
예수를 번역하다

그들의 낯선 손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68길 98 5층  |  대표전화 : 080-586-7726  |  팩스 : 02-6919-1095
발행인 : 오정현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은홍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은홍  |  사업자등록번호 : 214-88-27116  |  통신판매업신고 : 제01-2602호
Copyright © 2017 Christianity Today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