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따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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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따개비
  • 존 오트버그 | John Ortberg
  • 승인 2019.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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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사역을 하면서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달라스 윌라드에게서 배우다

"사역"을 위해 자신의 영혼은 돌보지 않는 사람들을 늘 본다. 게다가 그 사역이란 교회를 크게 짓거나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교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과 목회자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것 사이엔 늘 긴장이 존재한다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먼저 그 차이점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의 영혼을 돌본다는 것은 무리하지 않고, 정해진 삶의 틀에서 되도록 벗어나지 않는다던가, 에너지와 시간을 뺏기는 일은 줄이는 것, 또는 언제든지 마음의 여유를 즐길 여백을 남겨두는 것, 아니면 정기적으로 온천, 바다, 골프장, 교회 수련관, 영성센터를 찾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건강한 영혼은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쏟아 부을 때 그 건강함이 입증된다. 따라서 자신의 건강한 영혼을 명분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떠나 혼자만의 휴식을 취하며 안락과 안전을 꾀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사람들이 당신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도 영혼의 풍요를 누리며 사셨다. 그뿐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의 멍에를 가볍게 하고, “영혼의 쉼”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과는 정반대일 때가 너무도 많다. 우리는 말한다.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은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에게 무거운 짐을 얹어 주겠노라.”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린 사람들을, 사역을 이유로 삼아 자기 영혼을 돌보는 것을 포기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내 의지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획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사역에 온 힘을 쏟아 부으면서도 영혼의 안식을 누리면서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본 적 있는가? 나는 본 적이 있다.

달라스 윌라드가 그 사람이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박스캐년, 낡은 말뚝 울타리에 창틀이 하얀 집에서 25년이 넘게 살았다. 그 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간소한 장식에 책만 잔뜩 있는 집이었다. 사람들이 그 집에 몰려드는 이유는 단지 달라스 윌라드의 잔잔한 영성 때문이었다.

내가 그곳을 처음 방문했던 때는 1980년대였다. 달라스 윌라드의 책을 읽고 난 후였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힘을 얻고 사역에 힘쓰셨던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우리의 삶의 방식을 정비한다면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책이었다. ‘여기 깊은 변화deep change가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여기 있구나.’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달라스를 만나 진정한 변화에 대해 배우고 싶었다. 대학교수로, 저자로 유명한 그분을 만나고도 싶었다. 또 어떤 면에서는 그분과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나를 움직이게 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책이 내게 어떠한 의미를 주었는지 말하기 위해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났을 때였다. 이미 달라스 윌라드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분의 딸 베키가 내게 편지 사본을 보냈다. 달라스가 “보물단지”라고 부른 것 안에는 별의별 유물이 다 모아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내가 보낸 편지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특히 내 이름 뒤에  “Ph.D”라고 내가 직접 쓴 것을 보니 겸연쩍었다. 그까짓 학위를 내세움으로써 달라스에게 돋보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단 말인가?

처음 그 집 문을 노크할 때 나는 잔뜩 긴장했지만, 달라스에겐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존 형제.”

그가 따뜻하게 맞이했다. 순간 나도 그가 늘 말하던 “영적 충만”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여유가 있고 서두르지 않는 사람을 나는 만나본 적이 없다. 전화벨이 울려도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듯 말이다. (그를 만났던 많은 사람들도 이미 체험했겠지만) 내 심장 박동 수가 그의 느긋함에 맞춰 느려지는 듯 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저도 그분의 타임 존time zone에 살고 싶군요.”

교회에 관한 의례적인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한 내가 어느 순간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박스 캐년에 있는 그 작은 집이 강의실에서 마치 고해성사실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물었다.

“저는 제 아이들을 사랑하고 싶은데 실상은 성공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습니다. 특히 목회사역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다른 목사들이 나보다 더 성공적인 목회를 하면 시기심이 생길까요?”
“왜 저는 만족을 느낀 적이 없을까요?”
“왜 저는 깊은 고독을 느끼는 걸까요?”

달라스는 말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서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이루는 업적이 아닙니다. 당신이 만들어가는 인격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신의 인격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는 것과 열매를 맺는 것, 이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도록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또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도록 열심히 일하라. 또 도덕적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네 삶을 잘 추스르도록 하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단지 그분 안에 거하라는 것이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사실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그분 안에 거하면 열매는 저절로 맺게 된다. 이렇듯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힐 때 하나님 나라는 시작된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나는 박스 케년에 있는 달라스의 집에서 깨달았다. 남가주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많은 학술연구를 진행했으며, 영성에 관한 책을 저술했고, 세계를 두루 다니며 교회와 컨퍼런스에서 설교를 했던 달라스는 이렇듯 내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또 달라스를 만나 내면에 큰 충격을 받았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저도 달라스처럼 유명해지고 싶습니다”가 아니라 “저도 달라스처럼 살고 싶습니다”였다.

나는 우리의 영혼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그에게서 배웠다. 시간 관리와 사역의 적절한 리듬, 그리고 쉼은 중요하다. 그러나 내 경우, 내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바깥의 요구들이 아니라 내 안에 도사린 자아였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쉼을 얻는다

내가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 사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할 때나 사역에서 벗어나 있을 때나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나의 제일 목표로 삼는 법이었다.

사역이란 원래 복잡하고 어수선하다. 그래서 내 동료 목회자는 잠언 말씀을 즐겨 인용한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지만, 소가 힘을 쓰면 소출이 많아진다.”(잠14:4) 예컨대 교인들은 위기에 봉착하거나 이혼을 하거나, 아니면 자녀가 가출을 했을 때, 또는 집안어른들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목회자를 찾는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은 스케줄에 맞추어 미리 예약되는 일이 아니다. 또 목회자들이 한가할 때 문제를 들고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관리가 불가능한 위기 연속의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생기가 넘치는 삶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박스 캐년에서 그 방법을 배웠다. 그것은 사역현장의 온갖 잡다한 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숨겨진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교역자 회의가 있던 날이었다. 나는 강의를 끝내자마자 회의 장소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모자라는 사역에 대해 가는 내내 툴툴거렸다.

그때 문득 내 속에서 주님이 말씀하셨다. ‘존, 이어질 두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볼까? 너는 네 인생의 한 부분인 그 두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낼 수도 있고 내가 없이 보낼 수 있을 거야. 너는 주변 사람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짓눌려 화도 나고,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조바심을 내기도 하고, 목 뒤가 뻐근할 수도 있을 거야. 아니면 너는 그 두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낼 수도 있겠지. 그리고 너는 네가 살아 있음에 기뻐할 수도 있을 거야. 네가 하는 일을 즐거워할 수도 있겠지.

왜 너는 아틀라스처럼 네가 이 세상을 떠받치려고 하니? 이 세상은 내가 다스리는데 말이야.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잘해 왔는지 아니? 그리고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안하든 내가 주관자란다. 너는 당연히 오늘 일정대로 회의에 참석하겠지. 그러나 그 두 시간 동안 나와 함께할 것인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해야 해.”

내가 매순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는다면, 남은 평생 그분과 함께할 수 있다. 반대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내 삶의 최고 목표라면, 내 남은 생은 스트레스에 짓눌려 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사실을 줄곧 잊고 있었다.
이제 내가 이 사실을 다시금 상기한다면, 그것은 너저분한 것들을 말끔히 청소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정돈된 영혼에는 잘 훈련된 정신이 있다

달라스의 「하나님의 모략」을 읽었을 때 길지도 않은 몇 단락을 통해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달라스는 주기도문은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리얼리티라고 말한다. 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지, 왜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지, 왜 (“우리가 숨 쉬는 공기보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하늘에” 계시다고 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달라스는 말한다.
“내 부족한 표현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설명하겠다. 내가 주기도문이 말하는 대로 ‘살기’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여러 번 새벽 두 시에 깨곤 했다. 일단 잠이 깨면 한 시간 정도 내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기쁨을 누리곤 했다.”

그의 생각은 단순히 글로만 그치지 않았다. 실제로 주기도문을 해설하는 그의 시선은 아주 먼 곳을 향했고, 목소리는 떨렸다. 아마도 주기도문을 되뇌는 그 순간 그는 현실에 발붙이고 있지만 마음은 현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이 분명했다.

나도 한밤중에 종종 깨곤 하는 나이가 됐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직장에서의 몇 가지 문제들을 떠올리고 적절한 해결책을 찾는 것에 대해 걱정한다. 아니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상상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한 설교를 사람들이 좋아 한다던가 출석교인 수가 늘어나는 등 잘 풀리는 몇 가지 일로 인해 혼자 기뻐한다.

―내 자녀 가운데 하나를 염려한다.

그러나 내가 한밤중에 깨어 있는 그 한 시간을 주기도문과 더불어 주님의 임재의 기쁨을 만끽할 때, 나는 깨닫는다. 내 삶이 내가 원하는 삶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났는지 말이다. 분노, 염려, 욕망, 불만으로 내 영혼은 뒤죽박죽이다. 이것은 외적 뒤죽박죽이 아니라, 내면의 뒤죽박죽이다. 이것은 내가 일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 영혼이 무질서해서다.

 

정돈된 영혼에는 진찰이 필요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테니스를 쳤다. 그래서 백인 특유의 허연 피부가 여름 몇 달 동안은 햇볕에 꺼멓게 타곤 했다. 그래서 나는 매년 피부과를 찾아야 했다. 어느 해인가 나는 피부과 의사와 내 피부를 뒤덮은 작은 점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의사가 말했다.

“나이가 들면 생기는 겁니다. 저는 이것들을 “인생의 따개비”라고 부르지요. 그것들을 친구처럼 생각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렇다. 내가 만났던 피부과 의사는 아주 뛰어난 유머 감각을 지녔다. 사실 늙고 사라질 우리 몸을 검사하는 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할 영혼을 위해서보다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사용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나는 달라스에게서 알코올중독자 자활 모임의 ‘도덕적 삶을 위한 자가진단’과 비슷한 ‘영혼 진찰’의 중요성을 배웠다. 그해 여름 나는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가 수 세기 전에 개발한 “맞춤형 양심성찰 훈련”이라 불리는 영성훈련 방법을 따라 해보았다. 자가진단에 따르면 내 문제는 가사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아내가 가정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빼앗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거짓말을 아주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늘 씨름하는 특정 죄들은 대부분 자기애의 그릇된 표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나는 매일 시시각각 자기성찰을 시작했다. 그것은 곧 내 안에서 수시로 고개를 쳐드는 사소한 거짓말과 교묘한 술수가 모두 자기애 때문임을 인정하는 낮아짐의 훈련이기도 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교외에 거주하던) 아내가 새 러그를 구입하고는 내 생각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색깔이 식당과 어울리지 않아.”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둘둘 말아서 차고에 넣어두세요.”

사실 맘만 먹으면 이삼 분 밖에 안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지금 당장 하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싫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맘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어차피 당신도 이곳으로 옮겨 올 텐데 당신 취향대로 꾸미는 것이 좋지 않을까?”

사실 나는 러그를 옮기는 일이 싫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봐줄만하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은 굳이 머리를 짜낼 필요도 없이 순식간에 자동적으로 입 밖으로 나왔다. 가장 엄숙하게 사랑을 맹세했던 대상에게 “이제부터 난 나태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는 서약이라도 하듯 말이다.

내가 이런 꼼수나 부리는 사람이라니. 그러나 이러한 거짓과 행동을 내 의지로는 멈출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규칙적인 영혼성찰을 한다면, 나의 잘못된 사고와 행동의 패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시간으로 진단하는 연습을 하다보면 언젠가 이런 죄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내 인생의 따개비, 내 영혼의 따개비들은 얼마든지 제거될 수 있다.

 

정돈된 영혼에는 ‘절친’이 필요하다

내 목회사역에서 가장 큰 영적 위험 요소는 내가 나 자신을 잘도 감춘다는 것이다. 교인들 대다수가 일주일에 한 시간 반 정도 나를 본다. 그 시간은 내가 나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에 앞서 나는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내 “연약한 모습” 또는 내 “진짜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 표정에 직결된 감정의 스위치를 아예 꺼버린다.

그래서 나는 소수의 좋은 친구가 필요하다. 나의 가장 곤혹스러운 죄, 가장 떨치기 힘든 유혹, 추한 생각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비밀을 완전히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느냐 없느냐는 얼마나 오랫동안 사역을 지속할 수 있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일종의 핵심 계기판 역할을 한다고 목회사역 연구가들은 말한다.

내게는 이렇듯 속내를 털어놓을 만한 두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내 고민을 이야기하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먼저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충분히 살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한 달에 한번 혼자 있는 시간을 정해서 지난 한 달 동안의 내 생각과 사고방식, 습관, 유혹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내 절친들과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이 내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려면 매번 당혹스럽다. 마치 수영장에 첨벙 뛰어드는 기분이다. 일단 물속에 들어가면 상쾌하고 후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음엔 선뜻 뛰어드는 것을 망설이게 된다. 물속에 처음 뛰어드는 순간 느껴지는 차가움이 나를 움츠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 주 금요일이 바로 나만의 성찰 시간을 마친 후 절친에게 고백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내가 털어놓아야 할 영혼의 따개비들을 일일이 적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려면 상당한 의지가 필요했다. 그러자 친구가 내게 말했다.

“괜찮아. 네가 어떤 말을 해도 놀랍지 않아. 네 말대로 너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네가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거야. 그런데 내가 알게 되었으니 너와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너랑 가장 가깝게 느껴지거든.”

자기가 드러낸 만큼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사랑할 것이라고 누군가 내게 말할 때에도 내 영혼은 이렇게 속삭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네 실체를 안다면 사랑하지 않을 걸.’

자기 자신을 얼마만큼 솔직히 드러내느냐에 따라 사랑의 깊이가 달라진다. 자신을 충분히 드러내면 충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정돈된 영혼은 불안해하지 않는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달라스가 말하는 영혼이란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통합되어 한 생명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그 영혼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그 영혼의 깊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너무 깊어서 성경 기자들은 종종 영혼을 인격체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는 다른 차원에서 영혼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영혼은 하나님만 바라는 절대적인 떨림과 갈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한다.

목회를 죽이고 목회자를 상심케 하는 주범은 곧 소망을 잃는 것이다. 다른 많은 것을 잃더라도 한 가지만은 잃어서는 안 된다. 바로 소망이다.

과거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천국은 죽은 다음에나 가는 곳, 곧 죽음을 초월한 소망으로만 배웠다. 천국은 오로지 행복만이 있는 일종의 기쁨공장pleasure-factory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톰 라이트는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곳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창조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달라스 역시 영원이란 이미 진행되고 있고, 원하기만 하면 바로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 나는 천국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 흰 구름 위에 황금 길과 궁궐 같은 집을 종종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울퉁불퉁한 말뚝 담장 뒤에 서 있는 오래된 목재 가옥이 있는 박스 캐년을 떠올리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LJ
 


 

존 오트버그 캘리포니아에 있는 먼로파크 장로교회의목사이다.
John Ortberg, “The Barnacles of Life” Leadership Journal 2015 겨울; CTK 2015:3
[수정:2015.03.05] [수정:2015.03.01] [게시:201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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