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우리는 ‘좋은 결혼 이야기’를 잃어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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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우리는 ‘좋은 결혼 이야기’를 잃어버렸을까
  • W. 데이비드 O. 테일러
  • 승인 201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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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결혼을 봐야 좋은 ‘결혼’을 하고 싶어지는 법. TV나 영화에서 결혼 ‘이야기’를 되찾으려면

화 사학자인 지닌 베신저는 「영화가 보여주는 결혼의 역사」에서 지난 40년간 영화를 통해 나타난 결혼 트렌드를 보여준다. 바로 결혼생활에 대한 관심의 부족이다. 결혼생활의 극적인 흥미를 상상할 수 없다는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할리우드는 오직 결혼식에 대한 영화만을 거듭하여 만들고 있다. 결혼하지 않아도 섹스를 하고 아이를 갖고 동거를 할 수 있는 시대에 아무도 결혼의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면서 영화는 결혼식만을 부각시켜 결혼식이 마치 결혼의 가장 중요한 지점인 듯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빅 웨딩>만 봐도 장식이며 술, 결혼 예복은 있지만 지루한 결혼 문제 따위에 신경 쓸 일은 없다.

<마블 코믹스>의 전 편집자는 만화에서 결혼을 다루지 않으려는 것은 결혼이 좋은 이야기를 엉망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로이스 레인과 결혼한 슈퍼맨에게 무슨 흥미가 생길까? 별로 없는 것 같다. <DC 코믹스>는 슈퍼맨의 일대기에서 1996년에 치러진 결혼식을 삭제하고 슈퍼영웅에 걸맞게 독신남으로 바꿔놓았다.

물론 예외는 있다. <아모르>, <인크레더블>, <인 아메리카>, 그리고 제작자이자 배우인 타일러 페리의 가족드라마는 결혼에 포커스를 맞추고 결혼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드링킹 버디스> 같은 최근의 영화는 사랑과 우정 사이, 심지어 우정과 결혼 사이의 관계를 추적하는 데 관심을 보이고, <해리포터> 시리즈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각별한 예외 중 한 가지는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방영되어 엄청난 갈채를 받았던 드라마 <프라이데이 나이트 라이트>이다. 이 드라마는 텍사스 주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미식축구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베신저는 이 드라마는 축구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혼생활이 잘 되어가고 있을 때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비평가들과 팬들 모두에게 코치 에릭 타일러와 그의 아내 태미 타일러만큼 드라마에서 결혼생활을 솔직하게 잘 보여준 인물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예외일 뿐이다. 결혼, 특히 전통적인 결혼은 지루한 소재라는 인식이 영화와 TV 모두에서 더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 일상적인 시각은 사사 시대처럼 모든 사람이 자기 눈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것이 개방적이든, 자유롭든,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든 상관없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단지 영화와 TV 때문에 우리 사회가 결혼을 거부하게된 것은 아니지만 영화와 TV의 영향으로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전통적인 결혼이 불가능하거나 옳지 못하다고 쉽게 치부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현실에 대한 생각을 바꾸도록 하는 일에 예술적 상상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우리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 [모던패밀리_ABC.com]

카테고리 작업

2012년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 NPR과의 인터뷰에서 커뮤니케이션 교수인 에드워드 샤이아파는 TV의 영향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감소했다는 연구결과를 이야기했다. “동성애자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크지는 않습니다. TV의 영향으로 고약한 고집쟁이가 갑자기 성자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눈덩이가 불어나듯 커져갑니다.”

<윌 앤 그레이스> 혹은 <글리>를 본 사람이라면 “안락한 소파에” 파묻혀, TV가 없었다면 실제 생활에서 결코 알 수 없었을,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됐을 것”이라고 샤이아파 교수는 말한다. TV는 간접적이긴 하지만 오히려 효과적이다. 입소스 미디어의 사회여론조사에서 동성결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TV의 영향이었다고 대답한 1/5에 달하는 미국인들은 샤이아파 교수의 이 연구 결과에서 많은 것을 수긍했을 것이다.

동성애 커플이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한 <모던 패밀리> 같은 드라마는 샤이아파 교수가 카테고리 작업Category Work이라고 부르는 일을 해냈다. 이 드라마에서는 (화려하고 변덕이 심한 남자동성애자의 등장 같은) 범주적 고정관념을 보여준다. 여기에 또 다른 가능성(이 드라마의 경우에는, 신뢰가 가는 동성애자의 등장)을 더하여 좀 더 복잡한 카테고리를 만든다.

<모던 패밀리>에는 또 다른 기능이 있다. 공감할 수 있는 동성애자를 출연시켜 관객들이 동성애에 대한 거북한 감정을 호감으로 바꾸는 데 도움을 준다. 경우에 따라 관객들은 게이와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때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던 것이 이제는, 특히 젊은 관객들에게는, 평범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전 세대에는 <스타트렉>이 비슷한 역할을 했다. 1966년 <스타트렉>은 최초로 미국의 흑인 여성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준 황금시간대 방송이었다. 그 흑인 여성이 바로 니셸 니컬스이다. 니셸은 시즌1에서 니요타 우후라 소령 역할을 연기한 이후 더 이상 출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후에 니셸이 이야기하기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위한 모금 행사에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킹 목사는 자칭 “지상 최고의 <스타트렉> 팬”이었다.

킹 목사는 니셸에게 “당신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습니다. 당신을 통해서 우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사NASA 우주인 메이 C. 제이미슨은 우주여행을 한 첫 번째 흑인 여성이었고 니셸에게 영감을 받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제이미슨은 “이미지는 우리에게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간략하게 말했다.

<모던 패밀리>나 <스타트렉>의 가상의 이야기는 현실이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 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모든 훌륭한 예술작품이 그렇듯이, 영화와 TV는 불가능한 현실을  상상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흑인이나 게이 같은 소수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런 현실을 갈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상상이 현실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만을 결혼으로 인정하는 ‘결혼 보호법’에 대한 위헌 판결이 연방대법원에서 내려졌던 2013년 7월, 한 그리스도인 논객은 미국인들이 복잡한 언어적 논의를 다룰 수 없다면 그보다 쉬운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쉬운 방식이라는 것은 예술을 의미한다.

상상이라는 것을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거슬리는 정도이며 기껏해야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형식으로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시각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이 오히려 순진한 생각이다. 이런 시각에 반대하는 나는 예술적인 상상은 다음의 세 가지 방식으로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 예술적 상상은 대안적 세상을 상상하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간접경험을 하도록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어느 율법학자와 이야기할 때 사용하신 힘dynamic이었다(누가복음 10장). 예수님은 젊은 율법학자에게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는 감동적일뿐 아니라 간접적으로 율법학자가 스스로는 결코 생각해 본 적 없는 역할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좋은 사람이 아닌 나쁜 사람의 역할을 하도록 말이다. 예수님처럼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밀크> 같은 영화들은 내적으로 간접경험을 하도록 만들어 상상할 수 없던 것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2. 예술적인 상상력은 세상에 이미 정해진 것들을 뛰어 넘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관객들에게 좋지 않은 이웃인 사마리아인이라는 민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한다. <에브리바디 올라잇>에서 감독 리사 초코덴코는 행복한 레즈비언의 결혼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결혼에 대한 기존 관념을 재설정하라고 관객들에게 권한다. 이 영화는 기존의 개념(레즈비언의 결혼은 잘못된 것이다)을 또 다른 개념(레즈비언의 결혼은 옳은 것이다)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한때 믿기 힘든 현실이었던 것이 마침내 존재할 수 있는 현실이 된다.

3. 예술적 상상은 우리가 바라는 방향을 제시한다. 사도 바울이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계속해서 상상하는 것을 원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대학 캠퍼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슬로건인 “사랑=사랑”Love=Love이 새겨진 티셔츠는 성적 취향이나 결혼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는 권리로서의 사랑을 상상하도록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TV와 영화 스크린에서 보게 되면 이러한 생각이 현실이 되기를 원한다고 느끼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대화를 이끄는 것, 미디어의 서사를 구축하는 것, 문화를 바꾸는 것”은 아마도 보수주의자들의 열정적인 슬로건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명예훼손에 맞서는 게이와 레즈비언 연합’GLAAD이 공식화하고 있는 임무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야기를 하고, 문화를 만들고, 결국에는 정서를 형성하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성전환자 같은 소수성애자들GLBT은 미국의 변화에 영향을 주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들은 좋은 이야기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보통의 미국인이 거의 매달 TV나 영화 앞에 앉아서 200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동성애자들이 옳았다. 세속적인 유대인이나 불가지론자, 또는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처럼, 그러나 보수적인 그리스도인과는 다르게, TV나 영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로맨스와 결혼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형성할 것이라고 동성애자들은 생각했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윤리 및 공공정책 센터Ethics and Public Policy Center의 선임 연구원인 피터 웨너와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으면서도 공화당을 지지하는 저널리스트인 로드 드레어가 말했던 것처럼, 대중문화의 밑바닥에 정치사상이 존재한다.

나의 본래 주장의 뉘앙스를 좀 더 정확히 하자면, 모든 보수 그리스도인들이 예술적 상상력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보수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도 아주 사려 깊게 심각성을 이해해 왔지만, 또한 너무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예술적 상상을 충분히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그래서 수십 년 간 예술과 연예산업 내부에 그리스도인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결국 열어 준 혹독한 예술 창작 문화와 관련 기관, 예술가 후원 문화, 예술인 공동체들에 대한 투자에 소홀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대중의 광장”public square에서 예술 문화를 거의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 결혼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증언은 미미하여 어느 누구의 관심도 얻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도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말과 행동으로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청춘 연애사 70쇼>와 <미녀와 뱀파이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TV 드라마를 썼던 몇몇 그리스도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심지어 10년 전에 비해 오늘날 영화 제작 현장에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소수이고 무언가 변화를 일구어 내기에는 그들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한다. 한 작가는 “진짜 문제는 작가들이 아니라 제작자들(방송국과 영화사)이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거나 그들이 전파를 타도록 허락하는 내용이 문제다”라고 말한다.

음모 이론에 가담할 필요는 없겠지만 남가주대학교USC의 피터 스타크 프로듀싱 프로그램에서 한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할리우드에서는 전통적인 결혼을 탐구하고 싶은 동기부여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특히 독신 남녀의 이야기가 극적으로 흥미진진할 때는 더욱 그렇다.

또 다른 작가는 “자기가 모르는 것, 곧 좋은 결혼에 대해서 쓴다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전체 결혼의 60퍼센트가 이혼으로 끝나는 마당에,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꿈만 같은 현실을 이야기로 쓴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가가 플롯을 변화시키길 원한다 해도 수백 명이 참여해 1회 분량의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에서 작가들의 존재감은 소금을 치는 수준에 불과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장편 영화는 말할 것도 없다. <뉴요커>에서 “스파이 드라마로 위장한 결혼 드라마”(내 아내와 나는 FNL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라는 평을 들었던 <아메리칸>의 작가는 시즌마다 한 방송국에서 500개의 이야기가 경합을 벌이고 그중 단지 5개만 새롭게 방영될 시리즈로 선택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결혼의 뉘앙스를 풍기는 장면이 포함된 이야기의 성공 가능성은 1퍼센트밖에 안 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 걸까? 우선 빅 아이디어 프로덕션이나 셔우드 영화사가 기울인 노력의 가치만큼 나는 우리가 할리우드의 중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볼리우드의 중심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Bollywood는 봄베이Bombay(현재는 ‘뭄바이’)를 거점으로 한 인도의 영화산업을 일컫는 말이다.]

할리우드가 있는 LA에서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작지만 용감한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예술 연예 업계의 작가, 프로듀서, 제작자들을, 그들이 비록 공익을 위해 숟가락 하나 얹는 정도의 일을 한다 하더라도, 전심을 다해 지원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예술가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고 우리 모두 예술가의 친구가 되자. 어린 예술가들이 기술을 연마할 수 있도록 돕자. 금전적이고 실질적인 후원을 하자. 그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훈련에 1만 시간 동안 매진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그들에게 메시지가 담긴, 구성이 독특하고, 명랑하고, 심금을 울리는, 거기다가 재미까지 있는 이야기를 하도록 하고 그 이야기로 하여금 관객들에게 진정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일도록 하는 것이다. 젊은 예술가들이 진정한 소명을 구체적으로 알아내도록 돕자. 그들이 좋은 공동체와 연결될 수 있도록 돕자.

그리스도인들이 예술과 오락산업이라는 대중의 광장을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시킬 수 있으려면 한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될 것이다. 전체 교회의 노력으로 가능할 것이다. 자신의 소명에 매진하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이 곳곳에서 나와야 한다. 또한 TV 프로그램이나 영화 몇 편 만드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수백 편의 프로그램이 나와야 한다. 여기저기에 잠깐 열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의 오랜  노력이 필요하다. 간혹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뜻을 포함한 모든 좋은 것들을 향한 우리의 모든 노력과 욕구의 겸허한 포기가 요구될 것이다.

예술 활동을 넘어, 교회가 성생활과 결혼생활에 대한 용감하고 명석하고 명확한 설명을 계속해서 내놓기를 독려한다. 좋은 가르침과 설교는 필수이다. 우리는 또한 관계적 노력과 정치적 노력이 대립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 두 노력에는 각자의 자리가 있다.

우리 중 결혼한 사람들은 이웃들보다 먼저 투명한 삶을 살도록 스스로에게 허락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은총의 순간만큼이나 결혼의 불완전성과 긴장감을 우리의 이웃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결혼생활에 금이 가고 있거나 완전히 깨져버린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항상 그렇듯 우리의 삶을 내려놓고 동성애자들을 포함한 우리의 이웃을 섬길 기회를 찾아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환대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고정관념에 집착하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웃은 적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남자와 여자이다. 우리가 받았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앙에 충실한 생활과 더불어 신앙에 기초한 예술성은 우리 이웃이 삶을 “그저 그렇게” 여기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가졌을 법한 삶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좋은 결혼

비평가들은 종종 어떻게 FNL의 극중에서의 결혼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 <뉴욕 타임스>의 비평가 A. O. 스캇은 에릭과 태미의 결혼은 결코 편안하지도 예측가능하지도 않았지만 평생 한 배우자만을 사랑하는 일을 흥미롭게 하는 산만한 즐거움과 약간의 짜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답이라고 말한다. 메신저는 “그들의 결혼 이야기에 전략은 없었다. 교묘한 구성의 비틀림도 없었다. 꿈같은 이야기도 없었다. 또 다른 남자나 여자가 등장하지도 않고 싸구려 연출이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없었다”고 평한다.

다시 말해 FNL은 메신저가 정서적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시청자들은 한 주 한 주 지날 때마다 이 정서적 진실을 깨닫고 흡수하고 섭취하게 된다. 내 경우엔 이 드라마를 보고 나면 종종 더 좋은 배우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든다.

FNL은 우리가 TV나 영화 속에서 재생시킬 필요가 있는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상상하고 그런 결혼을 원하도록 만드는 이야기인 것이다. 관계가 와해되고 이데올로기적 혼란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해도 성공적인 결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그러한 TV와 영화를 만들도록 요구할 수 있는 인재들에게 투자할 의향이 있다면, 그것이 설령 권력의 중심이든, 민중의 노력이든 그것이 잘 되기만 한다면, 우리가 대중의 광장에서 기독교적 상상력이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혼란과 기쁨 속에서 부부의 사랑이라는 선물을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관객들 입장에서는 그 선물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CT


W. 데이비드 O. 테일러 풀러신학교 ‘예배·신학·예술을 위한 브렘 센터’Brehem Center의 ‘브렘 텍사스’ 프로그램 책임자이며, 블로그 ‘예술 목사의 일지’Diary of an Art Pastor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교회의 아름다움을 위하여」For the Beauty of the Church의 편집자이다. 
W. David O. Taylor, “How We Lost the Marriage Plot” CT 2014:11 

CTK 2015:3 "어쩌다 우리는 ‘좋은 결혼 이야기’를 잃어버렸을까"

[수정:2015.03.07]
[게시:201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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