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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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목자
  • 해돈 로빈슨 | Haddon Robinson
  • 승인 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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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모든 것에 찾아오는 죽음이지만 깨달은 사람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이 아무리 돈이 있어도 영원히 살지는 못합니다. 동물들처럼 그들도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영혼을 무덤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이는 그분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49:12, 15(쉬운성경)

 

은 어찌 보면 사자와도 같다. 과부는 개와 같기도 하고 마피아 두목은 사나운 사냥개 같고 농부는 소와 같다. 그들은 다 죽음을 맞는다. 이것이 그들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과부나 마피아 두목이나 농부가 동물보다 못한 깨달음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들은 들판의 동물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죽음 저편에 삶이 있음을 깨닫는 것, 어둠 뒤에 날이 밝아옴을 아는 것은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놓는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혜안이 우리에게 지혜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가 자신의 집 앞으로 배달되는 신문을 펼쳐보고는 신문의 날짜가 자신이 살고 있는 날보다 6개월 후의 신문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신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읽을 수 있었다. 스포츠 면을 읽으면서 아직 열리지 않은 시합들의 결과를 읽는다. 경제 면을 읽으면서 다양한 주식들의 변동을 기록한 보고서를 발견한다.

그는 이를 통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중에 값이 오를 주식들을 값싸게 사들인다면 손쉽게 부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신문을 천천히 넘겨 읽으며 사망 기사를 읽어 내려간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사진과 이야기를 읽게 된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되면서 부에 대한 시각까지 바뀐다.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는 수사들이 무덤을 판다. 매일 아침 수도사들은 무덤으로 가서 그 무덤을 바라본다. 그들 중 누구 한 명이 죽음을 맞이하면 그를 그 자리에 묻고 다시 새로운 무덤을 판다. 그들은 앞일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한다.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 방식이 우리 문화 속에서 죽음을 다루는 방법보다 훨씬 건전하다. 우리는 죽음을 회피하고 포장하고 완화시켜 말한다. 묘지에 가면 황토 위에 초록 잔디를 서둘러 덮는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벌거벗은 채로 죽는다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지만 위로가 되진 않는다. 불의한 자들은 죽는다. 하지만 의로운 자들도 똑같이 죽는다. 무신론자도 죽고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시편 49편에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만한 구절들을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12절에서 잠언의 구절을 다시 말하고 있다.

“사람이 아무리 돈이 있어도 영원히 살지는 못합니다. 동물들처럼 그들도 죽을 것입니다.” 시편 49:20에는 “사람이 아무리 돈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동물들과 같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 원문에서 12절과 20절은 한 단어를 제외한 모든 단어가 동일하다. 12절에 “영원히 살지는”으로 번역된 단어와 20절에 “깨닫지”로 번역된 단어는 철자 하나만 틀릴 뿐 모든 것이 똑같다.

철자를 바꾸면 단어가 바뀌고 단어가 바뀌면 뜻이 바뀐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깨닫지 못한다면 멸망하는 동물들과 같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삶이 끝난다고 끝이 아니다. 1막이 끝나도 연극은 계속된다. 이것은 좋기도 나쁘기도 하다. 

악한 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적용된다. 시편 기자는 13, 14절에 “이것이 자신을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그들의 말을 따르는 사람들이 치르는 대가입니다.

그들은 양같이 죽음 앞에 엎드릴 것이며, 사망이 그들을 치며 다스릴 것입니다. 아침이 되면 정직한 사람들이 그들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들의 육체는 무덤에 묻혀 썩어질 것입니다.

무덤이 그들에게 호화스런 저택이 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49편에서는 죽음이 목자다.

양들을 도살장으로 이끌고 그들을 죽인 후 그 고기를 먹는 목자다. 다른 번역에서 볼 수 있듯이 “사망이 그들을 치며feed 다스릴 것입니다”가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개정개역)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제 죽음은 으스스한 목자로 표현된다. 그리고 악한 자들에게 이것이 바로 그들의 종말을 의미한다. 사망이 그들을 치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16절과 같이 말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된다고 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떤 집이 번성한다고 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로 죽음을 맞이한다. 옷장에 있는 옷가지를 챙겨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산관리 성과를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은행 계좌도 가져갈 수 없고 명예도 가져갈 수 없다.

부유한 사람이 죽음을 맞을 때 우리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를 선망했을지라도 죽을 때에는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 있을 때만 자기가 복받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은 모든 일들이 잘될 때에 그를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그 조상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시49:18, 19)

 

앞에 보이는 빛

몇 년 전, 세계에서 세 번째 거부였던 H. L. 헌트Hunt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달라스의 제일침례교회에서 치러졌다. 20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헌트의 삶을 부러워했지만, 그 누구도 그의 죽음을 부러워하지는 않았다. 그는 떠나고 없었다. 시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는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고대 문명의 사람들은 거대한 무덤을 건축했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은 시체를 무덤으로 가지고 가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안에 마련된 선반 위에 시체를 올려 놓고 무덤의 문을 굳게 닫았다.

시체는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죽었을 때다. 그 순간에만 문이 열리고 새로운 시체가 그 무덤 안에 놓이게 된다. 빛줄기가 무덤 안에 비쳐도 죽은 자들은 이를 보지 못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악한 자들은 무덤의 어둠으로 들어간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동시에 영원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님과 떨어져 사는 이들은 영원히 어둠 속에서 지내게 된다.

그들은 빛에서 멀리 떨어져 산다. 이것이 깨달음의 일부분이다. 삶이 끝난다고 끝이 아니다. 1막이 끝나도 연극은 계속된다. 그들은 영원한 어둠 속에서 영영토록 살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시편 기자는 14절에 “아침이 되면 정직한 사람들이 그들을 다스릴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또 이어 15절에 “그러나 하나님은 내 영혼을 무덤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이는 그분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악한 자들이 영혼의 암흑 속으로, 영원한 어둠 속으로 나아가는 반면, 정직한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성경에는 저녁이 지난 후에 아침이 찾아온다. 암흑을 내몰고 빛이 찾아온다. 정직한 자들 앞에 빛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 영혼을 무덤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이는 그분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한다. 8절을 다시 보면 “사람의 생명 값은 너무도 비싸며, 아무리 많이 내어도 살 수 없습니다”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엄청난 돈을 가져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정직한 자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 대가를 지불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들을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부활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한다.

“여러분이 만일 여러분의 입으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고, 또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롬10:9)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가 2천 년 전에 무덤에서 일어나 죽음과 암흑의 권세를 이기셨음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루어진 언약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죽은 후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아침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대가를 지불하실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분과 함께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깨달음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의로운 이들은 죽음으로, 암흑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본향 집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CT

 


해돈 로빈슨 고든-콘웰신학교 설교학 교수이며, 저서로는 「성경적인 설교와 설교자」가 있다.

Haddon Robinson, “The Grim Shepherd” CT 2000.10.23. CTK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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