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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워도 눈을 뜨고 '다시' 보아야 한다상처가 있는 곳이 성지다. 고통의 시간, 바르게 기억하라.
송길원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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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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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 없게 하겠다”던 대통령의 약속은 부도수표가 되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지겹다.” 이제 그만 하잔다. 아니 이제는, “잊자” 한다.

6·25동란을 필두로 근대사의 가장 아픈 사건들 중 다섯 번째로 기억되는 세월호 참극이 그 몇 마디에 잊힐 것인가? 제이티비씨JTBC는 ‘손석희 뉴스룸’에서 앵커 브리핑을 통해 말한다.

“지겹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자식이 어떻게 지겨울 수 있습니까?”

‘476명 승선, 사망 294명, 실종 10명, 구조 172명’으로 멈춰선 365번째의 4월 16일이 다가오고 있다.

‘위험사회론’의 창시자인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 그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부패한 정치와 근대화한 위험을 승인한 위험사회Risk Society에 대한 시민사회의 도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154명의 구속으로 모든 일을 덮어버리려 한다. 마치 구제역에 걸린 가축들을 ‘살처분’하고 나면 그만이라는 착각에 빠진 듯하다. 농가의 시름과 슬픔은 어찌하라고? 아니, 환경오염은 누가 감당하라고? 국민 불안감은 누가 달래라고? 이런 걸 두고 위험사회 중의 위험사회라 한다.


세월호와 인터스텔라

학생들은 착했다. “가만히 있으라.” 방송을 통해 들려지는 그 한마디가 덫인 줄 몰랐다. 한 시인의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라는 인생의 허망함은 우리 모두의 때늦은 탄식이 되고 말았다. 300여 명의 목숨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어린 학생들을 구해야 할 위치에 있는 그들조차 방송을 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지금도 제발 가만 있으란다. 과연 어쩌자고?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존 브랜드 교수는 우주비행사들을 우주로 내보내면서 웨일스 시인 딜런 토마스Dylan Thomas(1914~1953)의 시를 인용해 말한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요.
노인들이여 저무는 하루에 소리치고 저항해요.
분노하고, 분노해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해.”


왜 하필 노인인가? 노인은 지칠 대로 지치고 무기력한 인류의 상징이다. 희망은 사라졌다. 저무는 하루는 스러져 가는 시간이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왔던 ‘가만히 있으라’는 규범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분노’가 울리히 벡이 이야기했던 위험사회의 틀을 깨뜨리는 도전이다. 그 도전이 희망이 된다. 분노는 희망보다 더 적합한 삶의 에너지다.

마치 플라톤의 연설을 듣는 듯하다. 그는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소리쳤다.

“스스로 쇠사슬을 끊고 뒤를 돌아보라. 횃불 앞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환영의 실체를 보라. 지금까지 당신이 믿고 있는 실체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말고 어두운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보라”

플라톤 철학의 요체는 간단하다. ‘태양을 보았다면 이제는 동굴로 들어가라.’ 하필 동굴인가? 국가론의 후반부에서 그는 말한다. “그 동굴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노예처럼 살고 있는 불쌍한 내 형제 자매를 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고, 가능하면 그들이 쇠사슬을 끊고 어둠의 동굴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
 

닻과 덫 그리고 돛
 

   
 

바로 여기에 지식인의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있다. 주전 593년경에 활동했던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다. 

“네 선원들이 힘차게 노를 저어, 너를 큰 바다로 데려간다. 그때 동쪽에서 폭풍이 불어와 바다 한가운데서 네 배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전부 가라앉는다. 네 귀중한 물품과 상품들, 선원과 승무원들, 배의 목수와 군사들 모두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대침몰이다. 선원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해안까지 울려퍼진다. 다들 배를 버린다. 베테랑 선원들은 뭍을 향해 헤엄친다. 침몰하는 너를 보며, 모두가 통곡하여 울부짖는다. 함께 비가를 부른다. 얼굴을 재로 문지르고 머리를 밀고 거친 베옷을 입은 채, 대성통곡한다. 목놓아 애가를 부른다.” (겔27:26, 「메시지」)

겉보기에는 화려했다. ‘자색 수’를 놓은 돛을 달았다. 두로 성읍의 명망가들이 승선했다. 선원들은 그 출신들로 가득 채워졌다. 선장은 박사였다. 그런데도 위험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줄행랑치는 일이었다. 대성통곡한다. ‘두 손을 들고 혀를 내두르면서’ 눈을 감아버리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 멸망 받을 두로의 성읍 같다. 마치 세월호 주변을 맴돌며 골든타임을 놓친 구조선 같다. 교회도 위험사회의 바이러스에 감염돼 위험교회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눈먼 이가 아니라면 애써 감은 눈을 떠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오스카 와일드가 이야기했던 ‘슬픔이 있는 곳이 성지’聖地라던 그 곳을 향해 눈길을 돌려야 한다. 계란 하나 까먹고 내팽개쳤던 부활신앙을 제대로 이야기해야 한다. 업신여겼던 죽음교육을 제대로 시작해야만 한다. 그때 우리는 위험한 사회, 아니 위험한 교회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CTK
 

송길원 하늘나라 우체국장, 가족생태학자,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슬픔이 있는 곳이 성지다(해피홈)의 지은이다.

[게시:201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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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
이 사회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노예처럼 살고 있는 불쌍한 나 자신을 봅니다. 나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이 쇠사슬을 끊고 어둠의 동굴로부터 탈출하하고 싶습니다.
(2017-04-19 09: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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