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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목요일ㅣ이것을 행하라. 이것을 논쟁하지 말라.주의 만찬은 분열이 아니라 일치의 식탁이다
존 H. 암스트롱  |  John H. Armst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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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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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1주일에 두 번 교회에 가면서 성장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교회를 싫어했다는 말이 아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나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이해가 안돼 힘들었다는 말이다. 예배 시간 동안 걸핏하면 따분해졌고, 결국 나는 그 따분한 시간을 나 홀로 재미있게 보내는 방법을 찾아냈다. 주보에 낙서를 했고 가끔씩 목사님의 설교 시간을 재기도 했다. 천장에 있는 조명등, 벽면 패널, 스테인드글라스 조각 개수를 셌다. 이런 사소한 장난을 하다가 두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설교단 뒤 성가대석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침례조baptismal pool, 그리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는 예배당 전면 정중앙의 흰색 테이블이었다. 그 테이블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몇 달에 한 번씩 저 테이블에 있는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일까? 빵과 포도주는 누가 먹을 수 있는 거지?

우리 교회는 1년에 네 번 주의 만찬Lord’s Super(성찬Communion 또는 성체성사Eucharist)을 거행했다. 왜 이걸 이렇게 가끔씩 하는지 물어보았던 기억이 난다. 돌아온 답은 한 번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너무 자주 하면, 그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조숙했던 것일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어차피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를 잃어버릴 거라고 걱정할 건 또 뭐람.’ 나이가 들면서, 나는 성찬식을 매주일 하는 교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부터는 예전에 들었던 그 답변이 더 불만족스러워졌다.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인이었든 아니면 최근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든, 다들 주의 만찬과 관련한 이야기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의문이나 좌절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심지어 의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들려준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인지, 그리고 성찬이 우리의 신앙과 실천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기독교 역사 전체를 통틀어 주의 만찬을 실천해 온 그리스도인들은 그 기원을 찾아 하나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의 이야기다. 그날 저녁,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모으셨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고, 그날의 식사가 갖는 일차 목적은 출애굽 이야기를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그날 그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제자들은 노예 생활로부터 이스라엘의 해방을 생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새로운 출애굽―모든 인간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하시고, 주님이시요 구주로 당신의 통치를 시작하실 새로운 출애굽―을 이제 곧 수행하시리라고는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랐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다시는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눅22:15-16

주의 만찬 제정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빵을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다.”(마26:26그 다음에 예수님은 잔을 드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26:28누가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들에게 보여주신 절차를 따르라고 명하셨다고 이야기 한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눅22:19) 유월절이 하나님의 해방을 거듭하여 기억하기 위한 것이듯, 주의 만찬도 그러했다. 따라서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구속된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주의 만찬을 정기적으로 행했다(고전11:24-26).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당신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이 사실을 너무나 쉽게 놓쳐버린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음을,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 식사는 하나의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몇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가장 단순한 이름이 “주의 만찬”(고전11:20)이다. 이것은 또한 “주님의 식탁”(고전10:21)과 “빵을 뗌”(행2:42)이라고도 불린다. 2세기가 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성체성사Eucharist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그 식사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 즉 감사(그리스어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에서 유래; 마26:27고전11:24)를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에 감사드리는 식사라는 뜻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 가운데 하나는 성찬Communion이다(고전10:16, KJV). 이것은 그리스어 코이노니아koinonia에서 온 말로, “함께 참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을 할 때, 우리는 실제로 성령의 증언과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임재에 참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사실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은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 안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일치의 핵심 표지임을 분명하게 인정한다.  

하나 되는 식탁

그렇지만, 주의 만찬에 둘러앉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둘러싸고 서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오래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된다. 주의 만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을 얼마나 자주 행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에 누가 참여할 수 있는지를 두고 우리는 갈라서 있다.

그러나 내가 어릴 때 다닌 교회에서처럼 성찬 테이블에 새겨진 말씀은 ‘이것을 행하라’였다. ‘이것을 논쟁하라’가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주의 만찬에 관한 다양한 신학적 뉘앙스들을 두고 우리가 논쟁을 벌일 때,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불일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이 주의 만찬 교리로 더 나은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우리는 종종 주의 만찬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의 하나를 잊고 있다. 심지어 훼손하기까지 한다. 바로 교회의 일치이다.

성서학자 앨런 스트리트R. Alan Streett는 「전복적 식사」Subversive Meals에서 1세기에 주의 만찬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폭력 저항의 정치 행동”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로마의 ‘위대한 전통’에 도전하며 기독교적 사회 비전을 제시”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을 행하는 것은 오만한 인간 군주에게 저항하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스트리트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우주적 구조 프로젝트로 마무리 된 주님의 만찬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주의 만찬 테이블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한 존재, 하나님의 성령의 선물을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공평하게 받은 사람이 된다.

웰링턴 공작의 일화가 주의 만찬의 사회적 의미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준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무찌른 뒤, 웰링턴 장군이 어느 작은 교회에서 성찬을 받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이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 교회의 성직자가 노인에게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얹고는 귓속말로 공작에게서 떨어져 앉으라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웰링턴 공작은 바로 노인의 손을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로 계세요.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평등합니다.”

주의 만찬은 초대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성령의 능력으로 기억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초대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 만찬의 자리에 함께 나아간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 서로 하나 되기 위하여 그 자리에 함께 나아간다.

주의 만찬에 관한 더 나은 교리를 찾기 위한 토론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하나가 되자.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명백하고 강력하게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그리고 서로에게 화해시키셨다. 여기에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가치가 있다. CT

존 H. 암스트롱  「주의 만찬에 관한 네 가지 관점」의 편집자이다. 

John H. Armstrong, “Feast of Love CT 2014:9 

이 글은 존 H. 암스트롱, "사랑의 테이블 매너"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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