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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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길, 길
  • 김은홍
  • 승인 201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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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길, 저항의 여행
 


셔널 지오그래픽이 제작한 「예수의 발자취」 280~281쪽에 ‘바울의 선교 여행’ 지도가 있습니다. 바울이 4차에 걸쳐 걷거나 배를 타고(말 따위의 다른 교통수단 이용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행한 여정을 화살표와 지명으로 표시한 지도입니다. 찬송가 뒷장에도 붙어 있는 그런 지도 말입니다.

이 지도를 보고 있자니 궁금하네요. ‘바울이 여행한 거리는 얼마나 될까?’ 바울이 거쳐 간 도시들 사이의 거리를 파악하면, ‘바울의 도보 세계 여행’ 최소 근사치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행기를 타고 ‘건너뛴’ 거리는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하긴, 제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면 벌써 오래 전에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겠네요.

바울의 여행 거리에 관한 정보는 제게 없지만, 예수의 여행 거리에 관한 정보는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여러 차례 팔레스타인을 두루 다니셨다. 추측컨대 예수님은 3대 절기를 지키기 위해 매해 세 번은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가야 했을 것이다. 이 거리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지름길을 이용할 경우에는 대략 120킬로미터 정도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최소한 2만 1600킬로미터를 걸었을 것이다. 공생애 동안에도, 여리고를 경유하여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까지 대략 260킬로미터를 걸어서 여행하셨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예수님이 이 땅에서 걸어 다니신 거리는 대략 총 2만 4000킬로미터에 이른다.

CTK 2009년 5월호에 실은 “길 위에서”에서 고고학 교수인 메릴린 하기스가 내놓은 추정치입니다. 2만 4000킬로미터면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옛 실크로드 길을 왕복하는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대략 400킬로미터라고 했을 때) 서른 번 왕복하는 거리라고 하면 더 실감날 걸, 웬 ‘이스탄불~시안’이냐고 물으실 분도 있을 겁니다.

몇 해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꽤 바람을 일으켰던 「나는 걷는다」(효형출판)의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4년에 걸쳐 고집스럽게 걸었던 그 길이 제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평범한 한 남자로 팔레스타인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 다음에 “나, 2만 4000킬로미터 걸었다”며 책을 내셨다면,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가볍게 제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 봅니다.


칠 사이에 세 권의 신간이 제게 도착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예수의 발자취」와 「도마리아 조선에 길을 묻다」 그리고 「여행, 관광인가 순례인가」입니다.

「예수의 발자취」를 낸 출판사는 이 책을 “300여점의 풍경화와 예술작품, 유적과 성물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직접 제작한 25개의 지도가 예수 생애의 중심축은 물론 당대 생활상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복원해준다”고 소개합니다. 진짜 25개인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한 쪽 한쪽 넘기면서 먼저 지도부터 죽 훑어보았습니다.

저는 지도를 엄청 좋아합니다라. 헌책방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꽤 많이 사 모았는데, 기사보다는 부록으로 끼어있는 지도 때문입니다. 15년 전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방문했다가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판도를 공들여 ‘그려 넣은’(인쇄 지도지만, 전혀 고급용지가 아닌 듯 보이는 얇은 종이에 거의 채색 없이 그려 넣은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대형지도를 어렵사리 손에 넣었습니다. 출국하는 날 벤구리온 국제공항에서 이스라엘 보안요원들이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걸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터라 숨겨둔 이 지도 때문에 혹시 비행기 못 타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도는,  “실감나게” 합니다. 제가 지도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것인 것 같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러 지명들을 그냥 글로 읽는 것과 그 지명들을 지도 위에서 확인하며 보는 것은 ‘실감’(리얼리티)의 정도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이 책 201쪽 ‘예수의 갈릴리 밖 여정’이나 2018쪽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39쪽 ‘예수 수난의 주요 장소’를 보면서, 복음서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내년 고난주간(아쉽게 올해는 좀 늦은 것 같습니다)에는 더욱 그렇게 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번째 책, 「도마리아 조선에 을 묻다」에도 ‘길’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녀는 1912년 이 땅에 도착하여 38년을 광주와 전남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입니다. 우리도 낯선 100년 조선 땅에서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요? 1921년 5월 3일에 쓴 그녀의 ‘일기록’ 한 토막입니다.

시골에서 두 주를 보냈습니다. 전도부인과 저는 매일 5킬로미터에서 10킬로미터를 걷는데 많은 시간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글 쓰는 일을 완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 지역에 새 교회가 많이 생겨나서 도보로 나닐 수 있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복음을 듣기를 원하는지,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큰 기쁨이었습니다.

100년 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한 이들도 을 걸었습니다. 이 책은 도마리아 선교사와 무명의 전도부인들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다.
 

 

번째 책 「여행, 관광인가 순례인가」의 저자 요르그 리거는 “기독교 신앙은 길 위에서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길’은 은유가 아닙니다. 히브리 성경과 신약 성경은 ‘길 위의 경험’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아브라함의 이주 여행,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 여행, 바빌론 포로 난민 여행…, 구약성경은 곧 여행의 기록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2만 4000킬로미터를 걸으신 여행 기록이며, 사도행전과 여러 사도의 서신서들 역시 사도들이 복음을 들고 걸은[行] 기록입니다.

이 책은 그리 간단치 않은 책입니다. 길 위의 경험을 여행과 이주, 관광으로 구분하여 비판적으로 논합니다. 순례와 종교 관광, 심지어 단기 선교 여행의 이면을 들추고 본질을 따져 묻습니다. 한 마디로 여행이라고 다 같은 여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했던 가장 최근의 여행(그것이 관광이었든 성지순례였든, 단기선교였든)을 성찰하게 만듭니다. 그가 지향하고 권고하는 여행은 한마디로 “저항 행위”로서의 여행입니다. 복잡하고 난해한 개념이 아닙니다. 이렇게 접근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여행을 가서 무엇을 했는가?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 가서 돈으로 그들에게 서비스를 당당하게 요구하고, 그들 위해 군림하지는 않았는가? ‘나’의 여행에도 이미 자본주의의 권력 불평등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이미 익숙해져버린 이 여행에 ‘저항’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저항의 여행을 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행을 통해 예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거의 접촉하지 않았던 여성을 비롯한 일반 대중을 만났다.…[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려면 길거리로 나가야 했다.…예수가 회당에서 쫓겨난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61쪽)

바울의 여행은 관광객도 아니고 사업가의 출장도 아니었다. 바울은 엄청난 압박과 긴장이 팽배한 여행을 했[다](고후11:25-27)…물론 이런 고생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도전거리를 들고 가는 여행자는 스스로 도전을 받는 위치에 설 것이다.(62쪽)

요르그는 이 책의 ‘나가는 말’에 제목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이제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나는 어떤 길에 설 것인가? 나는 어떤 여행을 할 것인가? 세 권의 책이 나의 '길'을 묻습니다. CTK 김은홍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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