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
상태바
"나도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
  • 피터 친 | Peter Chin
  • 승인 2019.11.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빠의 고백]① 온전한 아버지의 소망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은 아빠가 되는 것쯤이야 문제없다고 자신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내가 어쩌면 형편없는 아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날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날 나는 두 살배기 첫 아이의 손톱을 깎다가 그만 손톱 아래 살점까지 함께 잘라 버리고 말았다. 아이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어찌해야 할 줄 모르던 나는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와락 들쳐 안고 욕실로 달려가 아이의 손가락에 반창고를 감고 또 감으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염없이 되풀이했다(영유아기 아이들의 손톱 깎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 있다면 아이들 손가락에 맞는 반창고를 찾아 붙여 주는 일이리라.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누구나 선뜻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아이는 왜 내가 미안하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솔직히 말해, 아이는 무슨 사고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듯했다.

젊은 시절에 나는 완벽한 아빠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이 내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에서 귀여운 아기들을 보면 다가가 기쁘게 보듬어 주었고 중고등부 교역자로 삼 년간을 섬긴 터였다.

나는 준비된 아빠였던 셈이다. 그러다가 첫 아이가 태어났다. 내가 좋은 아빠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손톱 깎기 사고 이후로도 나의 육아 기술을 의심해야 하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네 명의 아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기보다는 훨씬 중요하고 심오한 일, 이를테면 하루에 열 번씩 페이스북 상태를 확인하는 일에 정신이 팔리곤 했다.

그 결과는 ‘쿵, 쿵, 쿵, 쾅!’ 그리고 이어지는 울음소리. 모든 형편없는 부모가 아는 바, 아이가 계단에서 뒹굴다가 마침내 바닥에 머리를 찧는 소리다.

나는 아이들이 칭얼댄다고, 말을 안 듣는다고, 그것도 아니면 못마땅하게 군다는 이유로 성을 냈다. 아이의 체온이 39도까지 치솟은 줄도 모른 채 자세가 흐트러졌다고 아이들 타박만 하기도 했다.

육아 기술도 부족했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좀 더 중요한 문제는 나의 태도였다.

너그럽게 말해 “조급함”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많은 경우 “속좁음”이라 하는 편이 좀 더 정확할 나의 태도. 나는 아이들에게 바른 태도를 깨우쳐 주기보다는 잘못을 들춰내기 바빴다.

좋은 습관을 익히게 하기보다는 벌을 주는 편이었다. 아직 배우는 과정 중에 있는 어린아이가 아닌 작은 어른인 양 아이들을 대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행동할 때마다 나는 내가 정말 형편없는 아빠임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도 스스로에 대한 그러한 평가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좋은 아빠는 태어나는 것인가?

최고의 아버지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나는 거라는 생각을 나는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유전적 요인이든, 양육 과정의 요인이든, 또는 그 둘이 합쳐진 결과 때문이든 훌륭한 아버지의 품성은 애초부터 타고 나든지 말든지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만일 좋은 아버지의 특성을 타고 나지 못했다면, 약간의 개선 정도는 가능하겠으나 아버지 역할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우리 인생에서 유전에 의해 확정되는 면이 크다는 갈수록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신체적 특징, 특정한 병에 취약한 유전적 소인, 심지어는 성격의 요소까지 유전적 요인의 지배를 받는다. 육아 기술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유전된다고 보아도 이상할 게 없다.

둘째, 흔히 남성 정체성의 핵심으로 제시되는 직업에 대해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는 것은 소질이다. 우리는 타고난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 부모 역할에 대해 이러한 사고방식을 적용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조금도 없다.

놀이터와 학교 복도에서 활약하는 아버지들을 관찰하면서 나의 이러한 믿음은 견고해졌다.

이들 훌륭한 아버지들은 자녀들과 소통할 줄 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도 알며 스마트폰은 항상 주머니에 넣어 두었으며, 영유아기 아이들 양육 과정에서 겪게 마련인 위기 상황에 처해서도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초짜 아빠는 거인과도 같은 훌륭한 아빠들을 보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런 아버지들이야말로 애초부터 내게 없던 무언가를 갖고 태어난 사내들인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과 나 사이에 자리한 이 거대한 심연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자기 자신을 바꿔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 장본인들이 있는데, 내가 자라면서 목격한 정형화된 아버지상이다.

나는 드라마 ‘못 말리는 번디 가족’의 앨 번디, ‘심슨네 가족들’의 호머 심슨, ‘패밀리 가이’의 피터 그리핀 같은 아버지들을 보면서 자랐다. 이들 아버지들은 하나같이 어설프고 행동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할 뿐 아니라 항상 어딘가에 정신을 빼놓고 다니며 가족사에는 일절 관심이 없다.

형편없는 아버지상이 정상적인 것인 양 내 속에 각인되었고, 애초에 아버지 역할에 무능하게 태어났다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인상이 심어졌다.

그들은 더 나은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굳이 더 나은 아버지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는 이들이었다.

한 손에는 맥주병, 다른 한 손에는 티브이 리모컨을 들고 하루 종일 소파에 기대 앉아 있는 아버지에게 도대체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훌륭한 아버지로 성장할 수도 있었던 나의 소양들은 이런 생각들로 인해 힘을 잃었다. 아버지 역할에 실패할 때마다 그것은 좋은 아버지가 될 소질이 나에게 없음을 확증해 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처럼 보였다.

만화에서 섭취한 정형화된 아버지상은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의 싹을 잘라 버릴 뿐이었다. 결국 나는 체념하고 나의 숙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껏해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아빠가 되기로 한 것이다. 완벽한 아빠가 될 운명이 아니라면 애써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향해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완벽한 구주로 태어나셨는가?” 히브리서 2:10은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께서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셨다고 증언한다.

이런 서술은 예수께서 어떤 면에서 불완전하다거나 죄가 있으시다는 암시를 줌으로써 신학적으로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런 게 아니다.

여기에 사용된 “온전함”이라는 단어는 도덕적 완벽함을 뜻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4장에서 저자는 예수께서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으시되 영원히 죄는 없으시다고 말함으로써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도덕적 의미가 아니라면 예수께서 온전하게 되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 불완전한 부모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CT

[전문 보기 : 형편없는 아빠의 고백]

 


 피터 친 Peter Chin  아내와 네 명의 자녀와 함께 워싱턴에 살고 있다. 첫 책 「하나님의 기습」이 2015년 출간될 예정이다. 홈페이지(peterwchin.com)와 트위터(@peterwchin)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Peter Chin, "Confessions Of a Bad Dad" CT 2014:6 박명준 옮김

[게시:2014.05.27]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