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게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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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게 이런 일이?
  • 오스 기니스 | Os Guinness
  • 승인 201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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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찾아 온 고통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제럴드 시처는 대학교수이며 그의 가족은 미국의 노스웨스트에 살았다. 여섯 식구가 짐을 챙겨 할머니와 함께 아이다호의 인디언 보호구역을 향해 출발하던 날은 그야말로 지극히 평온했다.

시처 가족은 아이들을 가정에서 교육시켰다.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화를 배우는 순서가 되자, 그들은 아이들을 아메리카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데려가서 그곳에서 직접 인디언의 주술의식을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제럴드의 어머니까지 여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나서자, 가족들은 여느 때보다도 마음이 들떴다. 이들은 생생한 체험학습을 하게 되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다. 그날 저녁 식사시간에 시처 가족은 인디언 부족의 지도자들과 더불어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인디언들의 계획과 그들 사회가 직면한 문제(예를 들면, ‘알코올중독’)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녁식사를 마친 시처 가족은 이윽고 인디언 주술의식을 관람하기 위해 체육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디언 지도자의 곁에 앉아 의식을 감상했다. 인디언 지도자는 인디언 춤과 춤을 출 때 입는 복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긴 하루일정을 마친 시처 가족은 이제 미니밴으로 돌아와 집을 향해 출발했다. 하루 종일 현장학습을 하느라 모두들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참으로 행복했다.

그런데 10분 뒤에 그들의 운명은 영원히 바뀌고 말았다. 술에 취한 운전자가 시속 140킬로미터의 속도로 중앙선을 넘어 시처 가족의 미니밴을 정면으로 덮쳤기 때문이다. 그 음주운전자의 곁에는 임신한 아내가 함께 타고 있었다.

제럴드는 고통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정신은 멍했고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나머지 가족들의 상황을 살폈다.

살아 있는 자녀들의 얼굴에는 공포감이 짙게 감돌았고, 주변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의 아내와 네 살 된 어린 딸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었으며, 생존한 나머지 자녀들은 다친 상처와 충격으로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제럴드는 속수무책으로 아내와 딸과 어머니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가족 삼대가 불과 몇 분 만에 생명을 잃고 만 것이다.

당시의 순간이 제럴드 시처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되었다. 번쩍이는 불빛, 현장을 에워싼 응급차들, 명령을 내리는 소리, 머리 위를 나는 헬리콥터 소음, 살아남은 자녀들의 울부짖음 등 사고현장은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미 숨이 막힐 듯한 고뇌가 엄습하면서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말았다는 두려운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가 알고 있던 예전의 가족은 잊혀진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단 1분 만에 세상이 온통 변해버린 것이다.

1분은 얼마만한 길이의 시간인가? 1분이란 시간은 고작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먹거나 교향곡의 첫 소절을 들을 수 있는 시간, 또는 책 한 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 시간이거나 낯선 사람의 첫인상을 잠시 훑어볼 시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1분이 한 가족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순간은 행복을 느끼는 순간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삶에 대한 신뢰

시처 가족의 이야기에서처럼 개인의 삶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불행한 일들은 수없이 일어난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라도 그런 순간을 맞을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줄곧 행복하게 살아오다가 느닷없이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영원히 변하고 마는 것이다.

불행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만일 그랬더라면…’이라는 후회다. 불행을 당한 사람들은 끔찍했던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그와 같은 아쉬움과 탄식을 느끼게 된다.

치명적인 사고에서 다행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또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에 시달린다. 시처 가족은 사고가 난 지 3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런 가능성을 곱씹곤 했다.

살아남은 아들은 “아빠, 내가 인디언 주술의식이 끝난 뒤에 화장실에만 갔다 왔어도 엄마가 아직 살아 계실 거예요. 그날, 아빠가 조금만 더 바빴어도 엄마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만일 그랬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다. 만일 그들이 주술의식을 2분만 더 관람했더라면, 만일 그들이 자동차 연료를 조금만 더 천천히 주입했더라면, 만일 상대편 운전자가 맥주를 한 잔만 덜 마셨거나 한 잔 더 마시기 위해 술집에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등, 조금이라도 마음에 위안이 느껴질 때까지 가능한 모든 생각을 떠올려보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하지만 현실로 되돌아와 이미 일어난 사태를 자각하는 즉시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본능적인 물음이 되살아난다.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유를 매우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불행을 당했을 때는 자유에 대한 필요보다 질서에 대한 필요가 훨씬 더 근본적인 욕구로 떠오른다. 인간이 무정부 상태에서 혼란스런 삶을 살기보다 차라리 독재정권을 선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질서가 없는 삶은 그야말로 감당하기 어렵기에, 인간은 삶의 안전과 세상의 의미를 느끼게 해줄 질서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개인이나 사회는 물론, 우주 안에서도 질서를 발견하고 싶어 한다.

이렇듯, 삶 또는 세상에 대한 신뢰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저명한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한밤중에 어린아이가 울면 엄마는 즉시 ‘아무 일도 없단다. 안심하거라’ 하고 달래준다. 이런 점에서 엄마는 질서와 보호를 가져다주는 여사제와 같다”고 말했다.

엄마는 “혼돈을 내어 쫓고 질서 있는 세상을 회복하는 힘”을 가진다. 왕이나 대통령은 물론이거니와 부모 역시 세상을 건설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와 같은 신뢰는 진리에 근거할 수도 있고 환상이나 투사된 염원에 근거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이든 유대인이든, 이슬람 신자든 불교신자든 또는 무신론자든 누구나 부모가 될 수 있다. 또한  각자 자신의 종교에 따라 신뢰의 의미를 설명해 줄 것이다. 하지만 피터 버거는 종교의 차이와 상관없이 인간의 경험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똑같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것이 괜찮다. 모든 것이 질서가 있다”는 말은 “존재를 신뢰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하지만 악은 정확히 이러한 질서의식을 무너뜨린다. 삶에 질서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곧 무질서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불행이 닥치는 찰나, 견고한 바닥이 갈라져 밑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 아가리를 벌리고 우호적으로 생각했던 삶이 얼굴을 정면으로 가격한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장 아메리는 「생각의 한계에서」At the Mind’s Limits를 통해 “경찰에게 구타당한 그 사람이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첫 번째 주먹을 얻어맞는 순간, 그는 틀림없이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 대한 신뢰’였다”고 말했다.

왜 하필 나인가?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런 일을 당할 만한 일을 내가 했던가? 때로는 분노에 못 이겨, 때로는 자기연민이나 절망감에 사로잡혀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들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는 악과 고통으로 인해 질서가 깨진 것에 대한 항변의 의미가 담겨 있다. 마치 코르크 마개뽑이처럼, “왜 나인가?”라는 물음은 마음의 저변에 존재하는 삶에 대한 배신감을 밖으로 끌어낸다.

처음에는 우리 자신이 상황을 올바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피어오른다. 현대 사회의 약속 가운데에는 통제와 선택이 포함되어 있다. 탄생과 죽음과 성별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그 외의 것들은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교육, 직업, 배우자, 친구, 가정, 휴가, 자동차, 취미활동, 은퇴 등이 그러하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선택하거나 통제할 수 있으며, 최소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한 순간 재난과 질병, 죽음이 그런 믿음을 산산이 부서뜨리면 인생의 대부분이 통제불능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왜 나인가?”라는 질문은 인생의 부조리를 향한 항변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완전하다고 믿지도 않으며, 또 결함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대개 우리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공로에 따라 우리를 심판해 달라고 요구할 자신이 없다. “왜 나인가?”라는 물음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세상과 삶, 곧 그 둘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관련되어 있다.

게임을 하며 속임수에 넘어가는 바람에 속이 상한 어린아이에서부터 법정 소송을 제기한 분노한 원고나 중요한 명분을 위해 격렬히 항의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주장에는 한결같이 본능적인 욕구, 곧 정의와 공평함을 요구하는 욕구가 담겨 있다.

정의를 요구하는 대상은 하나님이나 전통 또는 경제적인 이익이나 권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함축된 의도는 언제나 한결같다. 곧, 삶이 공평하다면 보상받을 사람이 보상을 받고 벌을 받을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이 터무니없이 불공평할 경우에 우리는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보상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하고, 또 복수를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권리가 있다. 어떤 명분이나 그 누구의 의지도 우리에게 부당한 삶을 강요할 수 없다. 때로는 분한 마음에서, 때로는 단순한 넋두리로 “왜 나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만, 그 마음에는 우주를 향한 법률적인 항변을 제기하고 싶은 심정이 담겨있다.

물론 우리는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사악한 자들이 번영을 누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착한 사람들이 꽃다운 나이에 죽어 가는 일도 허다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불행을 겪는 모습은 여전히 추상적이다.

그러다가 우리가 직접 불공평한 일을 당하면 그때서야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변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불행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서서 인생의 불공평함을 굳이 지적해 줄 필요가 없다. [전문 보기 : 왜 내게 이런 일이]
 


오스기니스 세계적인 기독교 변증가이자 사회비평가다. 허드슨 테일러의 동역자로 영국에 남아 중국내지선교회를 후원한 헨리 기니스의 증손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중국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1951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추방되었다. 고든 맥도날드와 함께 트리니티 포럼을 설립했으며, 「소명」「도전받는 현대 기독교」「회의하는 용기」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이 글은 「오스 기니스, 고통 앞에 서다Unspeakable: Facing Up to the Challenge of Evil의 일부를 역간 출판사인 생명의말씀사의 허락을 얻어 간추려 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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