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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선교사 '서서평'과 '유화례'를 말하다한국에서 순교자적 삶으로 선교한 두 명의 으뜸 선교사
김은홍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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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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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김승범

국주 선교사를 두 번 만났다. 지난 5월호 “여인천하”에 함께 실은 기록사진과 “쪽복음을 들고 전도부인이 되다”는 그의 것이다. 그때 그를 만났을 때 유화례 선교사 이야기가 곧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자리에서 양 선교사는 한국 선교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줄줄이 풀어놓았다. 그냥 듣기 아까운 이야기들이었다. 이번 인터뷰는 그때 이야기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CTK 독자를 그의 이야기 한마당의 청중으로 초대한다. 이번 인터뷰는 사실상 그의 일방적인 이야기다. CTK는 마당만 폈다. 이야깃거리만 청했고, 그가 알아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편집은 되도록 절제했다. 이 인터뷰의 동영상을 CTK 누리집에 곧 공개할 예정이다.)_CTK

1978년 이후 운크라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는 한국이 더 이상 원조대상 국가가 아니라고 결정하고 유엔에서도 철수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선교단체들도 1970년대 이후부터는 한국에 선교사를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했던 시절은 1884년부터 1983까지 약 100년 기간을 잡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사역했던 2500여 명 정도의 선교사들 가운데 저는 엘리자베스 쉐핑이라고 하는 서서평 선교사를 으뜸으로 꼽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플로렌스 루트라고 하는 유화례 선교사를 꼽습니다. 두 분이 모두 독신여성으로 우리나라에 오셨다가 가셨습니다. 미국 교회가 북장로교와 남장로교로 분리되어 있을 때였는데, 이 분들은 뉴욕 출신인데도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1912년에 우리나라에 왔고 유화례 선교사는 15년 후인 1927년에 왔습니다. 당시 미국의 신학교는 여성들에게는 입학 허가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선교부가 회의를 할 때도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196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여성들의 신학교 입학 허가와 투표권 모두 1960년대부터 시작됐습니다. 보편적으로 가장 민주화되고 선진화된 미국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대접이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분이 우리나라에 와서 다른 선교사들과 달랐던 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한국 선교를 위해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돌아보아 좋은 자양분으로 삼아야 합니다. 많은 교훈이 우리 선교사들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남자를 좀 삶아주시오」라는 유화례 선교사의 삶을 담은 책을 냈습니다. 이 분의 삶을 보면 선교의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선교가 무엇인지, 선교사로서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할 가치가 무엇인지, 이 책이 담고 있습니다.

저는 선교나 모든 문제에서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갈증’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선교사들이 현장에 나가 학교도 세우고 고아원도 운영하는 등 선교현장에서 많은 일을 합니다. 이것도 매우 귀한 일이죠.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저는 선교사들의 삶을 놓고 볼 때, 항상 그 점을 먼저 파악하려 합니다. 이 분이 어떤 방법으로 살아 왔는가….

선교의 요체는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갈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 가운데 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1910년 한국에 왔을 때 받는 당시 연봉이 독신 기준으로 500불에서 600불 선이었습니다. 기혼자는 1000불이고 한 자녀 당 100불씩 추가됩니다. 어떤 선교사들은 자기 사역을 위해 후원자들을 통한 펀드레이징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선교사들은 선교사가 되기 전에 부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 같은 경우에는, 언더우드 가문 자체가 지금으로 따지면 애플을 설립한 스티브 잡스처럼 획기적인 벤처기업가 집안이었습니다. 언더우드 가문은 타자기로 유명했거든요. 언더우드는 그런 많은 돈을 가지고 조선으로 건너와 남대문 밖에 3000평이라는 거대한 궁궐을 짓고 조선의 하인들을 거느리며 살았습니다. 당시의 한 신문은 조선에 온 선교사에 대해 “백만장자의 자리에 앉아 조선의 남녀하인들을 거느린다”라고 표현했죠. 미국에서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자신이 지닐 수 있는 많은 조건들을 누렸습니다.

자신이 지닐 수 있는 많은 조건들을 내려놓고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선교사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프레스턴 같은 선교사는 1년에 자신이 받는 봉급이 1100불정도 됐는데요. 자신이 그 전에 미국에서 지닌 채권, 재산에 대해 벌어들이는 이자가 소득수준으로 따지면 연간 2만 불 씩 수입이 나왔습니다. 그분이 목포, 광주, 순천에서 사역을 했는데 어디에 가도 본인의 돈을 내놓았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선교의 방식에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사역의 취지를 가지고 후원자들을 찾아 펀드를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역자라고 한다면 자신이 가진 것까지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서서평 선교사(Elise Shepping, 1880~1934)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후 간호사가 되어 미국 장로교회의선교사로 1912년 내한했다. 22년 동안 자신을 버리고 조선의 영혼들을 위해 헌신하다 1934년 광주에서 54세를 일기로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죽었다. 사진은 1914년 광주병원 여성성경공부반에서 조선 여인과 함께 한 사진. 그는 평생을 버림받은 아이들과 여성들을 위해 살았다.

서서평 선교사는 한국에 와서 많은 사역을 한 분입니다. 그 당시 간호사들을 길러내기 위해 조선간호원을 만들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간호학교를 총괄했습니다. 개척교회의 목사들을 돕기 위해 여전도회를 만들고 성미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성미는 당시 목회자들의 생활비로 쓰였고 이것이 목회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전주에 있는 한일장로회신학교의 전신이 되는 이일학교라고 하는 여자성경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이 분의 업적을 살펴 볼 때, 여전도회도 중요하고 간호사 양성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름도 없고 사람으로서 존경받지 못했던 가난한 여자 고아들을 데려다가 50여 명을 딸로 입양해 성경학교에서 가르치고 먹이며 재워 준 것입니다. 이 분은 복음에 대하여 예수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고, 예수 아니면 다른 것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쳤습니다. 이 분은 사회의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또한 한센병자들을 돌보며 자신의 삶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홀로 수 십 명을 보살피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다가 정작 본인은 영양실조로 죽습니다. 당시 미국 사람이 한국에 와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남에게 내어주다가 영양실조로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한국 선교 역사에 순전한 의미에서] 순교자는 없지만 순교자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은 많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서 서서평 선교사를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19세의 미혼모에게서 태어납니다. 그녀가 4살 때 어머니가 자신을 떼어 놓고 미국으로 떠나 외할머니의 손에서 크게 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고 살았던 것이죠. 20살 때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가게 되고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 분의 표현에 따르면 ‘성령께서 내 몸에 들어와서 내 모든 혈관의 피를 예수의 피로 다시 채우셨다’고 합니다. 1929년에 17년 6개월 만에 안식년을 갖게 되고 1930년에 안식년을 마치는데 그 때 이 분이 한국에 있는 학교 및 자기 사역지를 위해 돈을 모금하기를 바랐는데 불행하게도 모금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 교회는 경제대공항의 여파로 선교지를 위해 헌금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때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벽돌을 굽기 위해 많은 자재를 주셨는데 강퍅한 바로의 마음을 더 강퍅케 하셔서 이스라엘에게 지푸라기를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어야 한다 강요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지난 1년간 미국에 와서 후원자들을 통해 모금하길 바랐지만 나는 무일푼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듯이 비록 내가 벽돌을 만들기 위해 많은 자재들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이번에 조선에 가면 하나님께서 선한 방법으로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옛날 조선의 길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처럼 포장도로도 아닌 험한 진흙길을 노새를 타고 가면서 조선인의 집을 전전하며 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생활을 두세 달 하고 자신의 광주 집으로 돌아오면 학생들이 서서평 선교사를 목욕시키며 머리끝에서부터 이와 서캐를 긁어냅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생활했는데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던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958년 광주 수피아여고에서 코리 덴 붐과 함께 한 유화례 선교사(사진 오른쪽). ‘주는 나의 피난처’의 저자인 코리 덴 붐은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자신의 집에 피신시켰다가 나치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유 선교사는 코리 덴 붐과 한 평생을 자매처럼 지냈다.

유화례 선교사는 스펙으로 따지면 미국에서 최고의 명문대학을 나오셨습니다. 이 분은 여성 3대 명문대 중 하나인 스미스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콜롬비아대학교 대학원 과정을 마쳤습니다. 유화례 선교사는 서서평 선교사와 함께 광주에서 8년을 동역했습니다. 두 분의 신실함과 복음에 대한 열정이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유화례 선교사는 서서평 선교사를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유 선교사는 광주에 있는 수피아여고에 교장으로 부임했는데 서서평 선교사가 죽고 난 이후 인생의 전환기가 두 번 찾아 왔습니다. 1941년에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적대감이 고조되어 일본 정부가 일본과 한국에 있던 모든 미국 선교사를 내어 쫓을 때 유화례 선교사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일본 정부는 이 분을  6개월 정도 구금했다가 추방합니다. 그리고 이 분은 1947년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후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조선에 있던 모든 선교사들이 하나 같이 일본이나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나이든 선교사는 미국으로 돌아가 은퇴했고 한국에 대한 선교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선교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전쟁 이 후에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장담 할 수 없으니 그들의 선택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유화례 선교사는 고통 받는 조선인들과 삶을 마감하겠다고 결심하며 어디도 가지 않습니다. 바로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자세로 자신이 양육한 사람들을 품는가를 살펴볼 때 선교사로서의 삶의 진정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예로 주기철 목사가 왜 믿음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존경을 받습니까? 그 분도 남들처럼 편안하게 신사참배하고 창씨개명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의 정초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1976년 당시 84세 때의 유화례 선교사. 유 선교사는 은퇴 후에도 한국에 남아 축호 전도와 교도소 방문 등 자비량 전도활동을 이어갔다.

유화례 선교사가 수피아여고에 교장으로 있으면서 신사참배 문제가 강요되자 1937년도에 학교의 문을 닫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 주일부터 7월 23일 주일까지 한 달간 이 분이 한 일을 살펴볼까요? 전라도 광주에 있으면서 자신의 선교부의 트럭을 이용해 광주에 있는 모든 고아를 목포와 해남 같은 시골 변방으로 나누어 내보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부산으로 피난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분은 본인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저는 사랑은 기적을 낳는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당장 자기의 목숨에 연연하고 살기를 바라는데, 유화례 선교사를 살려야겠다는 광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동광원 사람들’이라 하는 수양 공동체입니다. 동광원 사람들은 당시 기성교회로부터는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남녀의 차별 없이 모두 지게를 지고 농사를 짓고 일을 하면서 자신들의 수입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이처럼 남녀의 차별이 없고 빈부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동광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공동체의 믿음의 본질은 대단했습니다. 이 사람들 여섯 일곱 명이 바작[지게에 얹어 짐을 싣는 데 쓰는 소쿠리인 ‘발채’의 전라도 사투리]에 이불을 덮어 씌워 등에 지고 유화례 선교사를 화순 화악산에 있는 동굴로 피신시킵니다. 사실 그 동굴을 올라가는 길에 공산군을 만났지만 공산군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유화례 선교사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공산군에게 알려지면서 뒤쫓기 시작합니다. 유화례 선교사가 화악산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5개 군 병력이 모여 총에 죽창을 꽂아 숲을 구석구석 찌르며 유화례 선교사를 추적합니다. 결국 유화례 선교사는 산 위에서 찬송을 부르다가 붙잡히게 됩니다. 이를 통해 이 분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경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사역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고통 받는 조선인들 속에 같이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조선인을 다 피난시키고 자신의 일이 없어졌을 때 하나님은 까마귀를 동원해서 유화례 선교사를 구원하는 사랑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유화례 선교사(앞 줄 가운데) 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선교부의 트럭을 이용해 고아들을 대피시켰다. 광주까지 인민군이 밀려오자 그녀를 화악산으로 대피시킨 이들이 동광원 사람들이었다. 결국 유 선교사를 살리기 위해 동광원 사람 5명과 옥과교회의 전도사 두 명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사진은 혈육처럼 지냈던 동광원 사람들과 함께 한 모습.

유화례 선교사가 잡히고 난 후, 인민군들이 이 분을 죽이려 할 때 동광원 사람들이 서로 나서서 조선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하신 이분을 죽이지 말고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섯 명의 동광원 사람이 죽게 됩니다. 마침내 유화례 선교사를 쏴 죽이려 할 때 다른 인민군이 유 선교사를 죽이려 하는 아군을 죽여 저지합니다. 그가 후에 회개하고 동광원의 식구가 됩니다. 그는 인민군으로서 사람들을 많이 죽였던 것이 하나님 앞에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게 되어 부산의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하고 결국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유화례 선교사의 행방불명은 국제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까지 수색을 지시했던 사항이었습니다. 이 분이 화악산에서 내려 올 때 도와주던 전도사 두 명도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을 살리기 위해 모두 7명의 사람이 순교를 당합니다. 자기 하나를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어 준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진 셈이죠. 유화례 선교사는 전쟁이 끝나고 1978년도까지 28년 간 더 사역을 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돈 한 푼 쓰지 않으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는 뭐든지 다 내어주었습니다. 앞서 이야기 했던 서서평 선교사와 같이 자신의 삶을 하나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었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동굴로 숨어 다닐 때 유화례 선교사를 보좌했던 여성이 지금은 여든 일곱이 되어 동광원에 원장으로 있는 김금남 수녀입니다(그들은 기독교인이지만 여성을 수녀라고 부릅니다). 저 역시 김금남 수녀를 통해 이 증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1945년 해방 이래로 이북에서 약 500만 명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내려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내려오고 1953년도에 장로교가 분리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박형룡 박사의 “삼천만환 사건”이 계기가 됐지만 사실 이면에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자들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깊었습니다. 6.25 동족상잔을 거치면서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거치고 있는데 목회자들은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유화례 선교사는 광주에 있는 자유주의, 중도, 보수주의 세 부류의 목회자들을 모아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유 선교사의 영적 카리스마,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은 이 분의 제안을 목회자들이 감히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자유, 중도, 보수 할 것 없이 모든 목사들이 모여 언쟁할 때, 유 선교사는 언쟁을 그치게 하고 성경말씀을 듣고 기도하게 합니다. 3일 기도 후에 목회자들이 회개하고 서로 부둥켜안으며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기도의 능력 이 외에는 한국 교회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세미나 등을 해봐야 자기 의를 드러내는 자랑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성을 회복하고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기도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거제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광주에도 포로수용소에 수감자가 2000여 명이 있었습니다. 유화례 선교사가 포로수용소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포로수용소 사역을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일반교도소까지 다니면서 1978년까지 교도소 사역을 하게 됩니다.

제가 이 분을 지켜 본 바 산동네, 판자촌 지역의 교회에서 초청할 때 사례비를 전혀 받지 않고 집회를 가십니다. 이 분의 관심은 항상 낮은 곳에 있었습니다.

   
 

‘남자를 좀 삶아주시오’는 다른 뜻이 아닙니다. 요즘 한국에 경건한 책들이 읽히지 않습니다. 경건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도 거리낌이 있죠. 일단 책이 예뻐야 하고 제목이 튀어야 합니다. 유화례 선교사가 한국어를 처음 배울 때 전라도 진안에 갔는데 교인들이 ‘밤에 출출하실 텐데 뭐 좀 드릴까요’라고 물었는데 감자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아 ‘남자를 좀 삶아주시오’라고 했다는 일화를 따서 이 책의 이름을 ‘남자를 좀 삶아주시오’라고 정했습니다. CTK
「남자좀 삶아주시오: 유화례의 사랑과 인생」
   양국주 지음 | 서빙더피플 펴냄


 

양국주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Serving The People 국제대표의 직함으로는 부족해서 그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다. 돌아온 그의 답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게 “지독한 역마살이 있다”고 한다. 학생운동을 함께 한 이태복(전 보건 복지부 장관)은 날보고 “길에서 죽을 팔자”라고 한다. 사람은 길에서 죽든 나무에 매달려 죽든 언제나 죽음을 직면하고 산다. 올해 나이가예순 여섯임에도 사건이 터지면 언제나 사진기 하나만 둘러메고 세계의 구석구석을 누빈다. 아프리카와 중동, 중앙 아시아, 주로 내전을 치르는 나라, 지진과 홍수로 고통 받는 나라가 나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연민이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목사가 되고 싶었던 그 꿈이 박정희라는 괴물을 만나면서 시대정신의 가장자리에 머무르게 했다. 한 때는 이스라엘 문화원장이라는 외도도 했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이라는 포커스를 통해 세상을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공평하신 사랑을 바라보게 된다. 전라도 정읍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떠나온 이래 나는 내 뜻대로 살아본 적이 별로 없다. 박정희 유신정권에 밉보여 강제로 입영해야 했고 정보기관의 지속적인 사찰로 잠시 몸도 마음도 추스르려고 옮겨 산 미국 생활이 어느덧 28년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 자리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자연도 봄부터 가을까지 채색 옷을 바꾸어 입다가 겨울에는 벌거벗은 몸뚱어리를 드러낸다. 나는 겨울이 좋다. 봄에는 초록으로, 여름은 푸른 입새로, 가을은 갈색으로 자신을 감추지만 겨울은 누추한 육체의 비밀을 드러낸다. 내 나이가 무얼 숨기고 살 나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감춰진 비밀보다는 드러난 진실과 겸손이 필요한 때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 살기, 이것이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이다."

그의 사진을 찍던 날 사진작가에게 그는 대뜸 “내 누드사진을 꼭 찍고 싶다” 했다.


 [ 인터뷰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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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람
"남자를 삶아주시오"를 한 권 사고 싶습니다. 그리고 몇가지 작은 오류가 보입니다만, 이것만은 고쳐야 할 듯합니다. 동광원 원장 김금난 --> 김금남
(2015-05-21 04:32:40)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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