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지막 날들을 하나님께 맡기자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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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지막 날들을 하나님께 맡기자 [구독자 전용]
  • 킴 쿠오 | Kim Kuo
  • 승인 201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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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력자살을 옹호하는 것은 생의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생명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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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미국의 사회적 논쟁거리는 무엇일까? NPR 라디오 방송의 토크쇼 진행자인 다이안 렘은 한 캠페인에서 단언했다. 그것은 바로 조력자살이라고.

시한부 환자들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끝낼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렘과 같은, 사람들은 자살suicide이라든가 자비로운 살인mercy killing 같은 단어는 피하려 한다.

이런 단어들에 들어 있는 자명한 진실이 자신들의 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렘은 시한부 환자들을 “안락사”시켜 살인죄로 복역한 잭 케보키언은 “시대를 앞선 사람”이었으며, 당시 미국은 이러한 문제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외쳤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히 준비가 되어 있다. 의제도 설정되어 있다. 안락사가 이제는 승기를 잡았다.

환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수단―주로 독극물―을 의사가 제공한다는 개념의 조력자살assisted suicide은 현재 미국 5개 주[오리건, 버몬트, 몬태나, 뉴멕시코, 워싱턴]에서 합법이다. 캘리포니아 주를 포함하여 몇 개 주가 더 ‘삶의 마감 선택 법안’을 고려하고 있다.

지난해에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기보다는 치사약물을 복용하겠다고 선언하고 실행에 옮긴 브리타니 메이나드에 대한 기사가 11개 주 20개 신문에 보도되면서 “존엄사”에 대한 지지 여론에 불을 지폈다. 메이나드의 영향을 받은 한 여성 암 환자는 “죽을 권리”를 보장하라며 캘리포니아 주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여성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메이나드의 죽음과 같은 사건을 언론이 다루고 난 다음에는 “자살 전염” 현상이 뒤따른다는 사실이 몇 가지 연구에서 확인되었다. 한 프로라이프 비영리단체는 2014년 11월에 죽기 전까지 메이나드가 언론의 관심을 끄는 동안 오리건 주의 월평균 독극물 처방전 발급 수가 39퍼센트나 높아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시한부 불치병은, 찰스 디킨스의 표현을 빌면, “막연하고 불확실한 공포”로 우리를 위협한다. 우리 가운데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치료가 불가능한 병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안쓰러워하는 우리의 마음은 견고하지만, 그들이 앓고 있는 병이 시한부 불치의 병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믿음의 사람들은 시한부 불치병을 대할 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권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기꺼이 맡기고 있는가? 우리 생의 마지막 날에 대해 우리는 그분을 실제로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복잡한 그대로의 생명보다 죽음의 권리라는 개념을 선택하는 쪽으로 빠르게 기울고 있다. 미국인 10명 가운데 7명 정도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긴다.

그리고 2015년 갤럽 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69퍼센트가 환자가 원한다면 의사가 환자의 생명을 마치게 하도록 법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적어도 40퍼센트가 자신이 죽을 환경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음을 의미한다.

낙태와 동성결혼 운동에 대한 논쟁이 점차 뜨거워지다가 결국 수용하는 쪽으로 기운 것과 매우 흡사하게, 우리의 몸, 우리의 생명과 사랑,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죽음까지 마음대로 할 권리가 각자 개인에게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국가의 법이 우리의 신앙과 완전히 일치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교회에서 우리는 “죽을 권리”라는 신조에 맞설 많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명백한 두 가지 원리를 고린도전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3:16-17)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나에게 이 문제는 단지 신학적인 논제가 아니다. 많은 CT 독자들이 잘 알다시피 백악관 공공정책실 종교 담당관이었던 내 남편 데이비드 쿠오는 존엄성과 용기를 가지고 암과 싸웠다.

데이비드는 화학요법, 방사선치료, 대체요법, 임상실험을 거치면서 10년을 버텼다.

그 과정에서 정신과 육체, 감정에 손상을 입었지만, 데이비드는 결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암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성경 말씀들에 우리를 온전히 맡겼고 우리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다짐했다.

하나님께서 데이비드를 고치실 수 있다고, 설사 고쳐주지 않으시더라도, 하나님께서 데이비드가 살아있는 날들을 온전히 사용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었으며 그 믿음을 결코 져버리지 않았다.

데이비드가 6개월에서 12개월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2003년부터 세 번씩이나 들었다. 메이나드가 받았던 것과 똑같은 진단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마지막 날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사람이, 설사 의사라 할지라도, 할 수 있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진단을 받고서 메이나드는 자신이 죽을 날을 정했다. 그녀와 똑같은 진단을 받은 데이비드는 그 뒤로 10년을 더 살았다. 그 동안에 우리는 예쁜 두 자녀를 갖게 되었고, 데이비드는 암과 씨름하고 싸우면서도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하나님의 보좌 아래 있는 그 누구도 인생의 여정이 어떻게 나아갈지 예견할 수 없으며, 앞날을 아는 척해서도 안 된다.

메이나드처럼 데이비드도 걸을 수도 없을 때가 수없이 많았다. 나중엔 글도 쓸 수 없게 되었다. 수술과 방사선 치료, 투약의 부작용으로 성격도 확연히 변했다. 갈수록 걱정과 좌절과 분노가 쌓여 갔다. 명랑했던 얼굴도 어두워졌다. 임종을 앞두었을 때엔 처참했다. 몸의 모든 기능이 서서히 무너졌다.

그래도, 데이비드의 하루하루는 소중했다.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도 데이비드는 중환자실 의사에게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홍성사 역간)를 읽어보라고 강권했다.

데이비드와 노숙인 암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신경종양과 전문의는 훗날 실제로 그 사역을 시작했다. 데이비드의 마지막 날들은 적대 관계에 있던 정치인들과 화해하고 친구와 가족들 사이에 있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고통의 시기에 우리는 더욱 담대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어루만진다.

2011년 췌장암으로 죽은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 축사에서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말을 했다.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천국에 가기 원하는 사람들조차 그곳에 가기 위해 죽고 싶어 하지 않지요.

그러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종착지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야말로 삶이 만드는 최고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삶을 변화시킵니다.”

데이비드와 나는 우리와 함께 암과 싸웠던 수십 명의 친구와 가족들 가운데서 스티브 잡스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았던 십 년 동안, 죽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다. 우리의 믿음을 단련했고, 우선순위를 다시 세웠으며, 하나님과 공동체와 더욱 깊은 교제를 이루었다.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이 오히려 우리 자신은 물론 다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우리 삶의 목적이 정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우리 삶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힘든 과제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힘든 과제이다. 불치병 환자들에 대한 공개 정책 토론을 펼칠 때 우리는 연민에 빠져 판단이 흐려질 수 있다. 그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원치 않고, 그들을 돕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듯이, 조력자살은 “연민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든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지은 것과 똑같은 죄, 곧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이다.

진정한 긍휼은 시한부 환자들을 사랑하고, 돕고, 완화치료palliative care를 받게 하면서 그들 곁에 있는 것이다. 호스피스 케어를 통해 죽음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죽음은 몸과 영을 가혹하게 갈라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감정이입에 근거하여 대중 정책을 내놓기보다는, 조력자살의 합법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보라. 조력자살이 정책으로 시행되려면 누군가가 그 구체적인 대상 범위를 규정해야 한다.

이를테면 어린아이들도 대상에 포함시켜야 할까? 정신질환자는 어떻게 할까? 환자가 생존해 있는 동안 들어가는 비용에 따라 결정해야 할까? 조력자살이 합법인 오리건 주의 보건당국은 최근까지 생존율이 낮은 암 치료처럼 의료비용이 많이 드는 곳에 의료 예산을 책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명 연장을 위한 치료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독극물 예산은 책정했다.

조력자살이 합법이 된 나라에서 안락사―환자의 생명을 끝내기 위해 의사가 (독극물 주입 같이) 직접 시행하는 조력자살과는 다른 것이다―가 부쩍 늘었다.

2014년 벨기에에서 “자비로운 살인”의 수는 27퍼센트 증가하여 평균 하루 5명에 이르렀다. 벨기에는 나이에 상관없이 시한부 어린이들도 안락사를 요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조력자살이 불법이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법을 사실상 무시하고 있다.

이 나라에는 집에서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동 안락사 유닛이 있다. 삶이 단지 지겨워진 70세 이상의 노인들을 안락사 대상에 포함하는 법을 만들 준비도 하고 있다. 영국이 조력자살 합법화를 고려하고 있을 때, 네덜란드의 윤리학자 테오 보어는 영국 상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이여,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어떤 비탈길은 정말 미끄럽습니다.”

이 말은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조력자살 논쟁에서 핵심이 되는 질문의 정곡을 찌른다: 우리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미국 사법 체계의 기본 원칙은 무죄 추정이다: 무고한 한 사람이 고통 받느니 차라리 범인 10명을(나중에는 100명으로 늘어났다) 놓아주는 것이 낫다.

이 원칙은 정부와 법원은 무죄에 무게를 더 실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원칙은 창세기 18장, 의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소돔을 멸하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는 아브라함의 탄원의 연장선 위에 있다.

“자비로운 살인”에서 변론을 맡는 부담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법안을 확대한다면, 세금이나 자원을 낭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안락사가 합법인 나라들의 장례 기록을 연구한 결과를 보면, 벨기에 조력자살의 32퍼센트가 환자의 동의 없이 행해졌다.

스위스에서는 어느 건강한 여성이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끔찍하다는 이유로 조력자살 비용 2만 달러를 지불했다. 나중에 그녀의 가족은 그녀의 화장한 재와 사망 진단서를 받고 나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벨기에에서 극심한 좌절감에 빠진 한 여성이 가족과 상의 없이 단독으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안락사를 시행했다. 자살을 지지하는 정책을 폭넓게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런 “변칙 조력자살”을 막을 세이프가드를 마련하는 데는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닐까?
 

 

진정으로 용기 있는 죽음

지난 1월 미국 스포츠 전문 방송 ESPN의 앵커 스튜어트 스코트가 충수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멋지게 맞은 스코트는 삶을 위해 계속 싸워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 모두에게 심어 주었다.

“여러분의 삶의 방식, 삶의 이유, 삶의 태도가 암을 이겨 냅니다. 그러니 사십시오, 사십시오. 지옥과 같을지라도 싸우십시오. 너무 지쳐 싸울 수 없고, 끝내 몸져누울 수밖에 없을 때에라도 누군가 당신을 위해 싸우게 하십시오.”

대학 농구 선수 로렌 힐도 스코트처럼 그녀의 마지막 날들을 살아냈다. 메이나드처럼, 힐도 불치의 희귀 뇌종양과 투병하는 자신을 공개했다. 힐은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 있는 마운트 세인트 조세프 대학교의 1학년 농구선수였다. 그녀는 극심한 편두통과 위장질환, 몸을 쇠약하게 하는 여러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란 기치를 내걸고 그녀는 팀 동료와 팬과 소셜 미디어 팔로워들을 모아 치료법 연구를 위한 펀드를 조성했다.

의료진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살아서 2014년 성탄절을 맞이했다. 며칠 후 그녀는 캠페인을 통해 조성한 펀드가 150만 달러가 넘는다고 발표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삶의 매순간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어느 순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은 아닌가? 고통을 피하려고 부지불식간 조력자살을 용인하는 것은 아닌가?

문화의 조류에 휩쓸린다면, 우리는 조력자살이 긍휼을 베푸는 행위라고 믿는 쪽으로 기울고 말 것이다. 메이나드는 언론의 찬사를 크게 받았다.

그녀는 CNN이 선정한 ‘2014년 올해의 인물’이 되었으며, 〈피플〉은 그녀의 머리에 “영웅”의 왕관을 올려놓았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표현 그대로 “끔찍하고도 끔찍한 방법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뇌종양에 맞서기보다는 자살을 선택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불치병에 맞서 가장 존엄하게 싸우고 있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던진다. 이것은 마치 좌절에 빠져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어서 뛰어내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힐의 단호한 메시지를 함께 나누어야 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야 한다(고전13:7). 이것이 사랑의 길이듯이 또한 죽음 앞에서 선 우리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불치의 병과 처절한 좌절감, 극심한 고통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진정한 긍휼의 행동을 하라. 그들의 삶의 자리에 함께하라. 고통 받고 있는 그들 곁에 있으라. 그들의 치유를 간구하라. 죽음이라는 진실이 당신의 삶을 바꾸게 하라. 생명을 지키는 것이 무자비하거나 비난받을 일이 아님을, 그리고 조력자살을 옹호하는 것은 희망을 포기하는 것일 뿐임을 명심하라. CT
 


킴 쿠오 작가이며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로 노스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Kim Kuo, “Giving our final days to God” CT 2015:9 ; CTK 2015:10

[게시:201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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