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종종 왜 하고픈 일보다 하고 싶지 않은 걸 시키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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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종종 왜 하고픈 일보다 하고 싶지 않은 걸 시키실까?
  • 매기 존슨 | Maggie Johnson
  • 승인 202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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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꿈에 사로잡히곤 했다. 인생을 바꿔 놓을만한 책을 쓰고, 숱한 군중이 모인 스타디움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드는 설교를 하고, 세계를 누비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꿈이다.

그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행4:32)는 말씀을 공동체에서 몸소 실천하기를 원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세계의 정의와 화해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열정이 넘치는 피스메이커peacemaker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큰 단체 일원으로 뭔가 큰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꿈과는 달리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중소도시 한 가운데에 작은 교회를 개척하게 하셨다. 내 계획과는 동떨어진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게 되었다.

 

 

평화를 일구는 수고

하나님은 이 작은 교회 개척을 통해 나를 사용하셨다. 아마도 지금까지 내 삶에서 나를 가장 크게 사용하신 것 같다. 그리고 크거나 작거나 하나님의 다스림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나로 하여금 작은 교회에 큰 열정을 쏟아 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5:9)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고, 해외 성매매와 싸우는 것처럼 구체적이고 눈에 띠지는 않지만 나는 내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데 일상생활 속에서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평화를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매일 매순간의 선택을 의미했다. 평화를 위해 수고한다는 것은 싸움을 피해 달아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내키지 않을 때라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나서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말하는 평화는 전쟁 종식이나 세계분쟁 조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일도 중요하다.)

내가 말하는 평화란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일구어 내는 평화이다. 기분을 상하게 한 친구와 화해하는 것이 평화이다. 알고 지내는 싱글 맘이 장도 보고 혼자 쉴 시간을 갖도록 아기를 대신 돌봐주는 것이 평화이다. 서비스가 좋지 않더라도 후한 팁을 주는 것도 평화이다. 그밖에도 평화를 일구는 일은 아주 많다.

평화를 일군다는 것은 매일 지속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구원 이야기를 삶으로 드러내는 단조로운 일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의 믿음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입니까?”

나는 일상 속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쓸 때 믿음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일상 속에서 평화를 위해 애쓴다는 것은 하찮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하찮아 보이는 작은 걸음이 반복되다보면 어느 순간 정상에 가까워진 자신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 꿈은 여전히 크다. 그러나 작고 후미진 곳에서도 큰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내게 가르쳐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

예수님은 사람들을 격동시키고, 역동적이며 거리낌 없는 사역을 하셨지만 궁극적으로 평화를 이루셨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특성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분의 관계성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섬기는 법, 기도하는 법,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각자 처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가르치셨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물을 마시기 위해 멈추신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우물에 온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서 마실 물을 청할 때 당황했다.

예수께 묻는 그 여자의 목소리에는 경계와 의심이 잔뜩 배어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그녀의 질문은 두 사람을 대화로 이끌었고,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 곧 복음에 관해 말씀하셨다. 우물가 그 사마리아 여자는 성경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 예수님이 당신의 신분, 곧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직접 드러내셨던 첫 번째 인물이다.

이 이야기는 늘 나를 놀라게 한다. 예수님의 사역 대부분이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는 많은 무리 앞에서 행해졌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없었던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려주셨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예수님은 의외의 방법으로 그 여자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는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 속에서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이 된다.

평화는 복음전파 사역을 통해 널리 퍼진다. 나에겐 사역과 삶을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 방식과는 다르다. 예수님은 매순간 한결같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나 골짜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에서도 그렇게 하셨다.

평화는 인종이나 성별 같은 장벽에 갇히지 않는다. 예수님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다. 사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뒤처진 사람들을 각별히 좋아하셨던 것 같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접촉하기 꺼리는 이들을 가까이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하라고 도전하신다. 평화는 신분이나 결점, 고정관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평화는 안락함에 안주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유대인 남성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 그녀에겐 틀림없이 불편했을 것이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이룬다는 것은 힘 안들이고 절로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삶과 사역 속에서 본을 보이심으로써 불편하더라도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서 역할을 하라 촉구하신다. [전문 보기 : 일상의 피스메이커]

 


매기 존슨 사회정의에 취한 작가이며 가정주부이다. 턱수염이 난 남편과 함께 인디애나폴리스에 살고 있다. 교회에서는 여성사역의 조력자로 봉사하고 있다.

Maggie Johnson, “Everyday Peacemaking” Todays Christian Woman 2015:11; CTK 20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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