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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시대에 희망을 노래하다많은 사람들이 시편 23편에 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크누트 M. 하임  |  Knut M. He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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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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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ll De Haan

RE-WORD 나를 바꾼 말씀  No.9 시편 23:4-6

 

   
 

글: 크누트 M. 하임  손멋글씨: 질 드 한

크누트 M. 하임 영국 트리니티 칼리지 브리스톨Trinity College Bristol의 구약 강사이며, 올 여름부터 덴버신학교에서 구약 교수로 가르칠 예정이다.
 

시편 23편은 다른 시편들 같지 않게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이 짧은 시편에서 위로를 찾는다. 그들의 인생에 닥친, 죽음을 포함한 크나큰 도전들 앞에서 말이다. 특별히 시편 23편의 두 구절, 4절6절에 그와 같은 위로의 힘이 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새번역)

그러나 어떤 현대 독자들은 이 시편이 구사하는 언어가 낯설고 건방지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은 양에 대해서 쉽게 속는 멍청한 가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인 신앙심으로 떼를 지어 지도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이 유순한 동물에 빗대기도 한다. 현대 문화는 우리에게 독립심과 자립심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사람을 양에 비유하는 것은 그 사람을 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록 밴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가 시편 23편을 풍자한 곡 <양>을 보자.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이름을 따온 1976년 앨범 <애니멀>Animals에 들어있는 곡이다. 이 노래의 도입 부분을 들으면 시편 23편의 목가적 풍경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불길한 느낌(“대기에 감도는 불안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다”)과 희미한 종교적 암시(“나는 요단강을 바라보았다”)가 감돈다.

그 다음 부분은 양처럼 행동하는 인간의 유순함을 강조한다. “마치 위험은 실체가 아닌 듯, 유순하고 순종적인 당신은 그 지도자를 따른다.”

세 번째 부분은 시편 23편으로 시작하지만, 시편 23편과는 달리, 경고와 위협의 메시지와 톤이 이어진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부족함이 없어

그는 나를 눕게 하셔

푸른 풀밭을 지나 나를

조용한 물가로 이끄시지.

날선 칼로 내 영혼을 없애버리지.

나를 꼬챙이에 끼워 높은 곳에 매말지.

그는 나를 양고기 구이로 바꾸지.

 

핑크 플로이드의 “시편”은 이제 목자의 가면을 벗겨 그가 자본가라고 폭로한다.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은 양을 착취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양의 종착지는 도살장이다.

심지어 일부 성서학자들도 시편 23편의 언어에 떠름하다. 셰필드대학교의 성서학 교수 데이빗 클린스David Clines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말하자면 이타심에서, 양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목자는 양털과 양젖을 얻으려고 양을 지킨다. 그리고 사실은 최종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도살하기 위해서이다.…시편 23편의 끝에서 양은 “주의 집” 곧 성전에 도착한다. 이 구절의 이면에는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 모두들 알고 있듯이 양이 성전에 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클린스는 시편 23편이 불의와 억압과 착취의 수동적 수용을 전파한다고 확신한다. 이와 같은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종교 조직을 억압자로 보거나 아니면 억압자의 공범으로 본다.

이런 현대적 거부감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시편 23편이 야만적인 불의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노래하고 있음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시편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반추동물

먼저 우리는 시편 23편이 우리와는 매우 다른 환경과 시대에 지어진 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시적 심상과 상상력을 잘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양과 고대 근동에 대해서도 잘 이해해야 한다. 시편 23편의 히브리 원문의 언어구사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NIV와 NRSV 같은 많은 현대 역본들은 KJV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valley of the shadow of death를 “어둡고 어두운 골짜기”로 대체한다. 이렇게 바꾼 데에는 기술적technical이고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고 성서학자 아드리안 커티스Adrian Curtis는 말한다. “‘사망’이라는 말은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human mortality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치명적인 어두움”deathly shadow처럼 최상급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극히 또는 극심하게 어두운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망’이라는 말은 죽음이 아니라 위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커티스는 말한다.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양이 가장 위험한 지형을 통과할 때 목자에게 의존할 수 있듯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표현한다. 시인은 목자의 막대기staff와 지팡이crook로 보호받는다(시23:4). 여기서 막대기는 아마도 일차적으로는 무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앞의 막대기는 들짐승을 쫓아내기 위한 것이며, 뒤의 지팡이는 돌보는 수단이다.

목자는 위험으로부터 양을 지키는 일을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히브리 전통은 “사망의 그늘”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칠십인역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역본을 따르는 영역본들은 “사망 그늘의 한 가운데서”in the midst of the shadow of death로 옮긴다.

양이라는 동물의 행동습성에 대한 이해와 고대 이스라엘 지형에 대한 지리학ㆍ지형학적 이해가 있어야, 왜 히브리 전통이 “사망의 그늘”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양은 되새김 동물이다. 특별한 소화 체계를 갖고 있는 채식 동물이라는 말이다. 먼저, 양은 이빨로 풀을 자른 다음에 꿀꺽 삼킨다. 일차로 위에서 소화시킨 다음에 그것을 다시 게운다. 그리고 드러누워서 게운 것, 즉 “되새김질 감”을 입에 물고 오랫동안 씹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되새김질”이라고 부르는 과정이다.

   
morguefile

양은 반드시 되새김질은 해야 하고, 반추동물은 일반적으로 드러누워서 되새김질할 때 의식이 절반쯤 나간 상태에 빠져든다. 이 상태에 있을 때 양은 포식자의 공격에 가장 취약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반추동물은 “풀을 뜯는 곳”―2절의 푸른 풀밭―과 “쉬는 곳”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포식자는 풀을 뜯는 곳에 가면 양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반추동물은 서둘러서 풀을 뜯어먹은 다음에는 다시 은신처로 몸을 숨긴다.

시편 23편의 양은 비교적 안전한 “쉬는 곳”에서 다시 “풀을 뜯는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양의 일반적인 행동양식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지형적 특성상 풀을 뜯는 곳과 쉬는 곳을 이어주는 통로는 제한적인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그런 통로를 “어쩔 수 없이 지나가야 하는 길”이라고 부른다.

양들은 가파르고 좁은 계곡을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한다. 그런 계곡에는 큰 바위가 군데군데 가로막고 있어서 양들이 지나가는 바로 옆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포식자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포식자는 바위 그늘이 가리고 있는 덤불에 숨어서 양들을 기다린다. 그런 까닭에 그곳은 말 그대로 ‘사망의 그늘’이 된다.

시편 23편의 시인에게, 양은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대상이며, 목자는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새기게 하는 대상이다(5-6절). 이 시편은 또한 독자들이 목자 이미지를 자신들이 직면한 모든 위험―심지어 죽음―에 적용하고, 실수 없으신 사랑의 하나님을 확신하면서 살아가도록 한다.

스페인 성서학자 루이스 알론소 쉐켈Luis Alonso Schökel은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킨다. “상상력을 가지고 쓰인 것은 상상력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상상력이 풍부한 해석은 우리의 지성과 우리의 감성을 모두 필요로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시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은유metaphor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형성한다. 왜냐하면 은유는 우리가 익숙한 것들을 갖고서 삶의 복합성과 난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목자-주인 예수님

목자-양 은유가 심오한 만큼, 시편 23편의 마지막 두 절에 특이한 점이 나타난다. 주인과 손님으로 심상이 이동하는 것이다. 삶은 복합적이다. 그래서 양과 목자의 심상만으로는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망라할 수 없다.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식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두 가지 은유를 섞어 넣는다.

양을 “푸른 풀밭에 눕게”(2절) 하시는―비밀스런 쉬는 곳에 숨지 않고, 포식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되새김질을 하게 하시는―목자이신 하나님과, “원수의 목전에서”(5절) 시인을 위하여 상을 베푸시는 주인이신 하나님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해 보자.

우리의 인생에는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하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위험과 질병, 고민, 폭력이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목자이시요 주인이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신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심지어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일 수도 있는 죽음 앞에서도.

물론, 이 목자-주인 은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시편 23편의 심상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며 우리에게 “나는 선한 목자”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양과 함께 사망의 골짜기를 걸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에는 당신의 생명을 당신의 양떼를 위하여 내려놓으셨다. 그리하여 그 양떼가 영원히 단번에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게 하셨다(요10:11).

목자-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의 2004년 뮤직 비디오 <예수께서 걸으시네>Jesus Walks에서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그 가사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다. “사망이 있는 어둠의 골짜기를 내가 걸어가네.” 시편 23편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후렴 “예수께서 나와 함께 걸으시네”는 예수님―그 노래에는 목자 대신 예수님이 나온다―이 그 비디오에 등장하는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심을 드러낸다. 우리는 그 뮤직 비디오에 함축되어 있는 신학을 전부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카니예 웨스트가 시편 23편과 이 시편이 제시하는 희망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부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다음 구절이 그렇다.

 

우리는 전쟁

우리는 테러, 인종차별과 전쟁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전쟁

(예수께서 걸으시네)

하나님이 나에게 그 길을 보여주시니

악마가 나를 넘어뜨리려 하기 때문이지.

(예수께서 나와 함께 걸으시네)

Jesus Walks

 

이천년 전에 예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나와 여러분과 함께 걸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폭력과 불의의 무고한 희생자들, 누구도 목소리를 대변해 주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신다.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조차 모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 좋은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라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지금 여기’의 희망

시편 23편의 마지막 절의 히브리 원문이 KJV 성경의 번역,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점차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원문은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 여러 날 동안 내가 주님의 집에 돌아갈 것이다.”(글쓴이 옮김)

시편 23편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신자들에게 영원한 삶을 직접 약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실망스러운 상실일 수도 있지만, 이곳이 아니더라도 성경에는 그런 축복을 약속하는 곳이 매우 많다. 6절은 고난에 빠져 있는 순례자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이 그의 평생 동안 그와 함께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킨다. 이 양-손님-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터무니없는 일들이 밀어닥치고 너무나 약해서 혼자서는 헤쳐 나갈 도리가 없을 때조차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정말 확실하게 알고 있다.

시편 23편은 ‘지금 여기’의 희망을, 죽음 앞에 있는 생명의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우리의 육신이나 영혼의 어두운 밤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그 어두움 안에서 말이다.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탄압을 받고, 고삐 풀린 테러리즘이 들풀처럼 번져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절제되지 않은 탐욕과 소비에 빠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유명한 라틴 격언은 이렇게 말한다. 호모 루푸스 호미니Homo lupus homini.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하지만 우리의 포식자들은, 그것이 사람이든 다른 어떤 것들이든, 우리를 궁극적으로 넘어뜨릴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걸으신다. 우리와 함께 그 골짜기를 지나가신다. 그리고 우리를 주님의 집, 우리를 먹이시는 희망의 풀밭으로 이끄신다. CT

Knut M. Heim, “Psalm 23 in the Age of the Wolf” CT 2016:1/2; CTK 20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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