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부에 대한 기독교 해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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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부에 대한 기독교 해석의 역사
  • 존 뮤터
  • 승인 2019.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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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 부 ③

재침례파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는 돈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으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지만, 재침례파는 이에 대한 주요 반대 세력이었다. 재침례파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있어서도 종교개혁자들이 개혁을 충분히 끌고 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메노 시몬스Meno Simons는 종교개혁자들이 복음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고 성례를 “쓸데없이 빵만 나누는 일”로 만들었으며, 가난한 자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 가난한 사람들이 진정한 기독교의 표지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은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을 소유한 참된 교회라고 자랑하는 것은 슬프고도 참을 수 없이 위선적인 일이 아닌가? 왜냐하면,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비단과 벨벳으로 만든 옷을 입고 은과 금으로 장식하고 화려하고 멋진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며, 집을 온통 값비싼 가구로 장식하고 보석함을 채우고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리고 고통당하며, 늙고 절뚝거리고 앞을 보지 못하고 병든 사람들이 문간에서 빵을 달라고 구걸하도록 내버려두고 있으니 말이다.

 

 

시몬스에게 복음이란 가난한 자의 돌봄에 대한 급진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재침례파 대부분이 개인소유권을 허용했지만, 일부 재침례파 분파는 사유재산을 포기하기까지 했다. 후터파Hutterites는 “재화의 공동체”를 실행하면서 기독교 공산주의를 제도화했다. 울리히 슈타들러Ulrich Stadler의 다음과 같은 말은 후터파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 소유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드러낸다. “하나 됨과 공동체는 순수하며 주의 집을 세우지만, ‘나’의, ‘당신’의, ‘그’의 소유는 주의 집을 나누게 하고 순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유권이 있어서 이 사람은 이것을 갖고 있고, 저것은 다른 사람에 속하며,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를 바라지 않고 혼자 살고 죽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와 교제할 수 없으며 하늘에는 아버지도 없다.”
 


청교도

그러나 재침례파는 핍박받는 소수였으며 그들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사이에 경제에 관한 종교개혁의 유산은 청교도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갔다. 청교도들은 근면과 절제와 검소한 생활의 윤리를 추구했다. 역설적으로 이 윤리는 막대한 부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청교도의 노동윤리와 자본주의의 사업윤리의 유사성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를 자극해 종교개혁, 특히 칼빈주의 신학이 자본주의를 초래했다는 논제를 발전시켰다. 베버는 유명한 저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칼빈주의자의 검소와 정직과 절약의 덕목이 중세의 “내세적  금욕주의”를 대체해 “현세적 금욕주의”를 만들어냈고 부의 축적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베버의 논지는 감동적이지만, 칼빈은 부를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따르는 필연적 징조로 여기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를 철저하게 파헤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일반은총으로 이교도들에게 부유함을 허락하신다. 마찬가지로 청교도들은 부유함에서 그 어떤 내재적인 고귀함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이것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이렇게 경고했다. “우리 마음속에 소유를 집착하게 하는 세상은 우리를 하나님께 불성실하게 만들며, 사람에게 불성실하게 만들며, 우리가 받은 소명에 불성실하게 만들며, 종교 자체에 불성실하게 만든다.” 청교도들은 풍요가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코튼 매터Cotton Mather는 당대의 물질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종교는 번영을 초래했고 그 딸(번영)이 어머니(종교)를 잡아먹었다.”

그러므로 베버의 비평가들은 칼빈주의에서 자본주의를 합법화하는 증거를 찾는 것에 불편해 하며, 반대로 자본주의의 발흥과 칼빈주의의 쇠퇴의 상관관계를 찾기도 한다. 종교개혁 이후에 자본주의는 칼빈주의 윤리를 세속화시켰다. 개신교는 중산층의 고결한 지위와 동의어가 되었고, 기독교의 덕목은 부르주아의 가치와 동의어가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시대는 종교개혁자들의 사회 혁명적 사고를 버렸다. 개신교는 종교개혁을 특징짓는 가난에 대한 구조적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초대 교회의 개인적 자선행위 모델로 회귀했다. 산업화에 따른 경제적 희생자들을 개선시키려는 개신교의 선교적 노력들은 대체로 사회 구조적 변화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미국 기독교 경제학

미국 복음주의자들에게 가난의 문제는 전도와 사회행동social action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논하는 쟁점과 연결되어 있다. 19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복음주의적이고 자비로운 제국은 교회가 관여하는 이 두 가지 활동이 상충한다고 보지 않았다. 역사가 티모시 스미스Timothy Smith는 개혁적 사고를 가진 복음주의자들이 영적인 관심과 사회적 관심을 성공적으로 통합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구원에 대한 열망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도시빈민의 고통을 경감시키려는 조직적 노력들을 수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저물 때쯤, 염세적 전천년설주의는 사회개혁을 가망성이 없는 목표라고 여겼다. 자선행위는 다시 개인화되었고 교회의 관심은 복음전도로 귀착했다.

예를 들면,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는 개인적 회심을 사회변화의 가장 중요한 희망으로 여겼다.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의 특징인 사회행동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냈지만, 교회가 어떻게 가난과 다른 사회적 이슈들을 가장 건전하게 언급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지속한다.

경제적 이슈들에 대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논의에서는 부와 가난의 구조적 뿌리들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된다. 일부 현대 저술가들은 부에 대한 전통적인 염려를 접어두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오늘날 세계에서는 단지 부의 양적 측면이 죄악이 됨을 발견한다.

 

 

제3세계의 궁핍, 그리고 서구의 소비풍토에 나타난 천박한 향락주의는 그들로 하여금 가난의 해결을 재분배에서 찾도록 만들었다.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와 사회복음 운동은 “맘몬의 법”보다는 “그리스도의 법” 아래 경제구조를 둠으로써 19세기 미국의 자유방임 자본주의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의 비전은 정당한 임금, 낮은 실업, 그리고 부의 재분배를 특징으로 갖는 경제정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었다.

더 최근에, 그리고 더 급진적으로 해방신학은 제3세계의 가난의 근거가 서구의 풍요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해방신학은 돈을 중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해방신학은 돈이 악마적 특징을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와 전쟁을 수행하는 어둠의 “정사와 권세”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부자는 세상의 억압자들이며 출애굽과 성육신에 대한 성경의 에피소드들(눅 4장)은 혁명적 행동의 모델―권세자들의 지위를 바꾸시며 가난한 자들을 해방시키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하나님―을 제시한다. 많은 해방신학자들이 사유재산을 정죄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가 인간의 이기심을 압도하는 사회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이상주의자이다.

사회복음과 해방신학이 사회주의적 경제 해법을 추천하겠지만, 현대의 또 다른 사상 흐름은 민주적 자본주의 안에서의 “대안적 해방신학”을 옹호한다. 이 조류는 돈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재분배주의의 ‘제로섬’적인 전제(가난한 자가 가난한 것은 부자가 부유하기 때문이다)에서 결점을 발견한다.

이 흐름은 생활수준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성의 미덕과 성공을 인용하며 새로운 부의 창출 속에서 가난한 자를 위한 소망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학파는 해방보다는 발전의 모델을 더 선호한다. 그리고 이 학파는 해방신학의 비전이 비현실적이라고 여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소망할 수 있는 최선은 이기주의의 제거가 아니라 이기주의의 통제라는 것이다.

성경 해석의 역사 속에서 현재의 논쟁과 긴장을  놓고보면 성경이 돈에 대해 제시하는 증언의 이중적 특징이 드러난다. 돈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죄다. 이 두 개념은 부에 대한 개인적인 태도 속에서, 청지기직에 대한 성경 개념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청지기직은 돈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지만, 우리의 소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한시적으로 그 소유를 위탁받은 것이며 그것의 사용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남부 장로교신학자 로버트 대브니Robert Dabney는 청지기직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소유를 가능한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능력의 범위 안에서 돈을 더 선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쓸 수 있었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해가 되지는 않지만 덜 유익한 곳에 돈을 사용했다면, 우리는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죄를 지은 것이다.” 대브니는 하나님의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이런 간단한 시금석을 제공한다.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더 유능한 종이 되도록 만드는가?” CT


존 R. 뮤터는 올란도 리폼드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장로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ith reverence and awe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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