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사랑 때문에 죽었다”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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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사랑 때문에 죽었다” [구독자 전용]
  • 이문식
  • 승인 201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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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에 향한 증오를 버리다, 사랑을 배우다.

국의 작가 류 월리스의 소설 「벤허」가 국내 최초로 완역되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1880년 11월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었을 때 당대의 평론가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작품이다. 이미 월터 스콧트 류의 역사 소설의 시대가 끝났고, 초기 리얼리즘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할 때에 출판된 이 역사 소설은 시대에 뒤떨어진 소설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1899년 윌리엄 영이 희곡으로 각색하여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되면서 관객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고, 그때부터 판매량이 크게 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1925년 아카데미상을 받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벤허〉의 대성공 때문이었다.

대체로 서점가의 소설 「벤허」보다 브로드웨이나 할리우드에서 시각화된 연극이나 영화 〈벤허〉가 더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소설을 읽는 인간의 상상력보다 훨씬 더 압도적으로 시각화시킨 연극이나 영화의 스펙터클한 장면이 분명히 대중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진 이후로 소설 자체의 판매량은 상당히 줄어드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았다. 무려 800쪽(한글판)에 이르는 이 소설을 처음부터 차분하게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요즘처럼 속도가 빠르고 수많은 복선과 반전이 깔려있는 대중 소설들과 달리 전개 방식이나 묘사도 상당히 느리다. 미국에서 50년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이 작품의 전성기는 1920년대에서 이미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사회적 자아탐구의 소설로서 「벤허」는 마치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장편들처럼 이제 현대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이미 영화로 ‘벤허’를 먼저 접한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영상 텍스트를 전이해前理解로 삼아 이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책을 펼쳤다. 그러다 보니 영화 속에서 내게 깊은 각인을 남긴 몇몇 장면들을 류 월리스가 어떻게 글로 묘사했는지를 대조해 보고 싶은 성급한 욕구가 내내 앞섰다. 영화 〈벤허〉에서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주목한 장면들은 주인공 유다 벤허Judah Ben-Hur가 예수와 만나는 몇몇 장면들이다.

나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이 영화를 보았고 나중에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그런데 늘 새로운 감동이 임하고 이전보다 더 주목하여 보게 되는 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노예로 끌려가던 유다에게 나사렛의 한 목수가 물을 주는 장면이다.

이 물 한 모금이 없었다면 유다는 노예선으로 가기 전에 아마 길에서 죽었을 것이다. 가혹한 노예 호송 책임자인 십부장이 조용히 유다에게 다가가 물을 주는 이름 없는 나사렛 마을의 그 목수를 향하여 화난 모습으로 다가갔다가 조용히 돌아선 나사렛 목수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면서 그 표정이 놀랍게 변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초반에서 가장 압도적인 종교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폭력과 증오에 익숙한 로마 병정의 표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알 수 없는 영적 영향력에 순식간에 사로잡혀 잃어버렸던 자신의 본래 모습, 인간성을 되찾는 이 장면은 당시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의 마음속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소설 「벤허」에서는 류 월리스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짙은 파란색 눈은 부드러웠지만, 사랑과 거룩한 기운이 넘치고 가슴에 호소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강한 의자와 위엄을 느끼게 했다. 그때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유다의 마음은 굳어지고 그저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갈기갈기 찢겼던 마음이 이 낮선 젊은이의 눈빛으로 당장 부드러워져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되찾았다. 유다는 물병에 입을 대고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그동안 젊은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유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십인대장도 마을 사람들도 그의 움직임을 그저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다.…십인대장의 기분에 다소 변화가 생겼는지, 그는 죄수를 부축해 일으키더니 병사가 타고 있는 말 뒤쪽에 태워주었다. (180쪽)


두 번째 장면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와 그를 지켜보던 유다의 만남이다.

영화에서는 예수가 골고다를 향하여 올라가던 중 지쳐 쓰러진 14처 중 어느 한 곳에서 주인공 유다는 지쳐 쓰러진 나사렛 예수에게 물을 먹인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 서두에서 나사렛 목수 예수가 죄수 벤허에게 물을 준 장면과 오버랩 되는 전형적인 수미상관 구조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주인공 유다가 나사렛 예수에게 물을 먹이는 이 유명한 장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아마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아주 탁월한 각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류 월리스는 소설 속에서 이 순간 유다 벤허가 나사렛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희미하게 감지하기 시작하는 놀라운 영적 각성의 전환점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는 나병환자가 된 유다의 어머니와 누이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 후 쏟아진 빗물 속에 섞여 흐르는 예수의 피를 접하고 나서 즉시 나병이 낫는 놀라운 기적을 아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영화와는 달리 이미 5일전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도중 유다의 모친과 누이의 문둥병을 놀라운 이적으로 치유한다(683쪽).

그래서 이 이적 경험 이후 유다 벤허는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심각한 내적 고뇌와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이런 유다 벤허의 내면의 변화를 묘사하는 특성이 이 소설을 단순하게 로맨틱한 대복수극이나 정치사회적 역사소설의 장르를 넘어서서 자기 탐구적인 종교 소설로 분류하게 되는 점이다. 류 월리스는 소설에서 비아 돌로로사의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 유다 벤허의 내면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예수는 신음 소리는커녕 원망하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벤허 일행이 쉬고 있는 집 근처에 올 때까지 얼굴을 들지도 않았다. 일행은 모두 연민에 사로 잡혔다.…벤허는 저도 모르게 “오 주여, 주여!”하고 외쳤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아니면 그 외칠 소리를 들었는지, 예수는 창백한 얼굴을 벤허 일행 쪽으로 돌리고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평생 기억에 새겨질 순간이었다. 이분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고 계시는구나. 그리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축복을 죽어가는 눈으로 우리에게 주시는구나.(729쪽)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영화 〈벤허〉를 보면서 최후로 다시 한 번 깊은 신앙적 감동에 사로잡히는 장면은 유다 벤허가 예수님을 쫓아가 골고다 언덕에서 숨지시는 마지막 모습까지 다 목격하고 난 후 집으로 돌아와 이후 그의 아내가 될 여종 에스더에게 이렇게 고백하는 장면이다. “그 분의 마지막 말이 내 손에서 칼을 놓게 했어….”

유다는 자신의 평생의 원수 로마 장군인 메살라에 대한 복수심에 깊이 사로잡혀 있던 인물이다. 영화에서 유다 역의 찰톤 헤스턴은 그 이글거리는 증오의 눈빛으로 이 복수심을 아주 잘 드러낸 바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인 로마 원형경기장의 전차경주에서 드디어 유다 벤허는 메살라에 대한 개인적 복수를 끝낸다. 그러나 이것으로 유다의 증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유다 벤허는 자신의 가족을 넘어서서 자기 민족의 삶에 깊이 드리운 로마의 잔혹한 폭력에 대한 더 깊은 증오를 품게 되었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반로마 무장투쟁을 결심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양부이자 은인인 로마의 장군 퀸 투스 아리우스에게 양자의 표시인 반지를 되돌려 보낸다. 그는 이제 로마인 아리우스 2세가 아니라 유대인의 아들이다[유다 벤허라는 이름은 ‘허’(씨)의 아들 ‘유다’라는 뜻이다]. 그의 손에는 이제 증오와 복수와 민족 구원의 칼이 들려 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열심당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예수 대신 풀려난 바라바는 마가복음에는 ‘저는 강도요 민란을 일으키려 한 자라’(막15:7)고 묘사된 유대 혁명당원 즉 열심당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예수의 좌우에 매달린 두 강도도 열심당원이었다. 예수가 십자기에 매달린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사실 예수는 당시 로마의 정치범으로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예수의 제자들 대부분도 열심당적 경향을 가졌던 당시의 젊은 유대 청년들이었다.

유다 벤허도 드디어 원형 경기장에서의 극적인 승리 이후 유대인의 영웅이 되었고, 그는 이미 로마에 대한 무장투쟁을 일으킬 결심을 굳게 하였다. 소설 속에서는 유다 벤허의 이런 모습이 아주 잘 묘사 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여전히 증오에 불타는 눈빛으로 마음속에 칼을 품고 있는 유다 벤허를 향하여 그의 여종 에스더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당신은 마치 메살라 같아요….”

원수에 대한 증오는 우리의 내면을 원수와 똑같은 상태로 바꾸고 만다. 증오의 대상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복수를 맹세하다보면 우리는 어느덧 원수를 닮아버린다. 에스더는 이미 개인적 복수에 성공했고 더 나아가 민족적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유다 벤허를 바라보며 또 다른 모습의 메살라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당신은 마치 메살라 같아요”라고 비명처럼 부르짖는다.

그러나 이런 벤허의 모습은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난 후 완전히 바뀐다. 그는 집에 돌아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가 내 마음속에서 칼을 놓게 했다는 놀라운 고백을 한다. 드디어 그는 증오를 넘어서는 예수의 사랑을 가슴속에 품기 시작했고 오랜 증오와 복수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제 그는 하나님 나라의 자유인이며 초월적 사랑의 존재로 변화되었다. 그는 이제 예수의 마지막 모습을 통하여 진정한 영적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마디 중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저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눅23:34)라는 최후의 용서의 기도를 통하여 벤허가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의 용서와 사랑의 기도 때문에 그는 자신의 증오를 내려놓게 된 것이다. 예수의 원수사랑은 모든 원수 관계를 근원적으로 소멸시킨다. 이 사랑만이 가문과 민족과 인종과 계층과 계급과 이념으로 대립하고 증오하는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 밑에서 겪게 되는 벤허 내면의 결정적 변화의 계기를 류 월리스는 원수 사랑의 메시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오직 예수의 신적 초월성에만 두고 있다. 이 점은 소설 「벤허」에서 매우 아쉬운 점이다. 유다 벤허의 변화를 오직 종교성을 매개로 해서만 설명했다는 점에서 소설 「벤허」는 상당히 상투적이고 관념적이다. 오랫동안 유혈혁명을 꿈꾸어 왔던 벤허의 증오를 초월하는 예수의 원수사랑에 좀 더 집중하여 대조적인 묘사를 하고, 이것이 유다 벤허의 내면을 뒤바꾸는 변화 과정을 좀 더 심층적으로 치밀하게 종교 심리적 묘사를 하였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라는 일말의 아쉬움을 갖게 된다. 류 월리스는 유다 벤허가 겪게 되는 회심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모두 예수를 보고 있었다. 지금 저 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연민일까. 벤허는 자기 마음속에 변화가 찾아온 것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그때 어디선가 나사렛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벤허는 가시관을 쓰고 언덕 위에 쓰러져 있는 예수의 모습을 응시하면서 물었다. 누가 부활이고 누가 생명입니까?

“나다.”

그 모습이 벤허에게 대답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벤허는 그때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의심이나 수수께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랑과 믿음, 그리고 명석한 이해를 얻은 편안함이 마음속으로 퍼져갔다.(737-738쪽)

벤허는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가로 달려가서 해면을 나사렛 사람의 입술에 댔다. 벤허는 그 얼굴을 분명히 보았다. 그 순간, 피와 먼지로 더러워진 얼굴에 빛이 비쳤다.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눈은 하늘 저편의 존재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는 한마디, 그 말에서는 만족감과 편안함, 승리감까지 느껴졌다.(749쪽)

벤허와 주위 사람들은 낮게 중얼거리는 마지막 말을 들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괴로워하는 몸에 마지막 전율이 달렸다. 무서운 고통의 외침 소리가 터져 나오고, 이 세상에서의 소명과 목숨이 끝났다. 사랑에 가득 찬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다. 아아. 그분은 사랑 때문에 죽었다.(750쪽)

스물일곱 살이라는 피 끓는 나이에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손에서 돌멩이와 화염병을 내려놓지 못했던 나는 예수님의 ‘원수사랑’이라는 명제 앞에서 늘 괴로워하였다.

“스스로 먼저 불의한 자들과 원수가 되자, 먼저 원수 관계가 되는 게 우선순위다. 그래야 나중에 원수도 용서하는 것이지, 그래 먼저 군부 세력과 원수가 되는 삶의 방식을 택하자. 예수의 원수사랑은 그 후에야 고민해야할 과제이다.” 이렇게 되뇌며 손에서 칼을 놓지 못했던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은 바로 유다 벤허의 모습과 너무나도 일치한다. 그래서인지 에스더의 “당신은 마치 메살라 같아요”라는 영화 대사는 한 자루 비수처럼 내 신앙과 양심을 찌르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이 말은 나에게 “당신도 저 독재자들과 같아요”라는 말로 울려 퍼졌다. 칼을 내려놓지 못하는 유다 벤허의 고통을 나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래서 “그분의 마지막 말이 내 손에서 칼을 내려놓게 했다”는 벤허의 고백은 나에게 가장 위대한 사도적 신앙고백이다.

열심당원적 경향을 가진 이 땅의 작은 체 게베라들에게 예수의 이 고백이 일어난다면 모든 원수 관계는 원천적으로 소멸될 것이다. 원수사랑은 모든 증오를 초월하게 하고 인간의 복수의 악순환 폭력의 고리는 저절로 끊어질 것이다. 진정한 하늘의 평화는 바로 이 유다 벤허의 고백으로부터 조용히 시작되는 것이다.

「벤허: 그리스도 이야기」는 한국 도서 출판 사상 최초로 완역되었다. 이 완역본이 올해 8월에 리메이크 되어 재개봉할 영화 〈벤허〉와 함께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CTK 

이문식 광교산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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