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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반칙하실 때우리를 씨름판에 불러올리기도 하신다. 그래도 항상 견뎌댈 수 있는 은총을 주신다
마크 S. 지닐리아  |  Mark S. Gign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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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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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ORD 나를 바꾼 말씀] No.11 창세기 32:22-31

바르트는 1917년에 “성경 안에 있는 낯설고 새로운 세상”이라는 강연을 했다. 이 스위스 신학자는 실제로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말만 했는데, 이 강연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낯설고”라는 단어가 덧붙었고, 덕분에 그의 생각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정말이지 성경은 낯선 책일 수 있다. 서사에서 운문과 잠언과 담화에 이르는 성경의 광대한 지경 안에 발을 들여놓을 때, 독자는 길을 잃고 헤맨다. 성경의 지세는 익숙하지 않다. 바르트가 보기에 성경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세상과,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기본적인 직관의 논리를 혼란스럽게 꼬이게 만든다. 성경은 우주를 제시하는데, 하나님은 그 우주에서 초월해 계시고 충만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중심이기도 하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흘러가고 그분에게서 흘러나온다. 성경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은 곧 실재하는 세상―비록 낯설다 하더라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창세기 32장만큼 낯선 성경 본문도 별로 없다. 라일라(
라일라Lila 인생의 달콤함에 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는 여주인공을 다룬 소설)가 이 본문을 좋아했을 거라고 상상해 본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세기 32장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던 흙먼지가 걷히면, 우리 눈에 야곱과 하나님이 뒤얽혀 씨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이야기에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아이러니가 치고 들어온다. 야곱 내러티브들이 절정의 순간을 향해 전개된다. 야곱과 에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게 남아 있다. 야곱은 이 한 가지 조우에 온 에너지를 집중한다. 야곱은 에서와 유쾌하지 않게 헤어졌었다. 야곱은 자기를 향한 에서의 분노가 사라졌을 거라는 확신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장자권은 여전히 야곱에게 있다. 에서는 여전히 부당한 처지에 있다. 그러니 야곱은 암울한 운명이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그래서 야곱은 작전을 짠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다. 야곱은 다시 한 번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한다. 그는 에서의 분노를 흐려놓기 위해 기만적인 술수를 쓴다.

야곱은 돈과 가축, 선물을 자기 일행에 앞서 보낸다. 아마도 에서는 넘어갈 것이다. 전에도 효과가 있었다.

야곱은 자기 가족을 얍복 강 저편으로 보냈다. 그는 “홀로 남았다.” 24절의 이 말이 좀처럼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독자들은 왜 야곱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혼자 남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마르틴 루터는 야곱이 뒤에 머문 것은 기도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하는 그 기도는 몹시 힘든, 누구라도 엿듣고 싶지 않은 그런 기도이다. 이런 해석도 물론 가능하지만, 본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석에 따라 상황이 좀 완화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야곱은 혼자다.

갑자기 이야기가 무섭게 전개된다. 한 남자가 야곱과 밤이 새도록 씨름하는 이야기가 불쑥 튀어 나온다. 성경은 종종 이런 식으로 우리의 기대에 어긋난다. 성경은 일관된 역사적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할 자세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열왕기하 23장에서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바로느고 2세에게 죽임을 당한다. 왜? 그 본문은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요시야가 죽었다는 것이 전부다. 창세기의 이 본문에서는 야곱이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한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가 우리를 문학적으로는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만, 우리는 이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갖지 못하는 관점을 얻게 된다. 야곱은 자기가 한 사람과 씨름을 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과 겨루고 있는 그 사람이 한 남자이자 또한 훨씬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에게 야곱이 주님의 천사와 힘을 겨루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여호와 하나님과 씨름했다고 말한다(호12:4-5).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약 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지 말기 바란다. 야곱은 한 사람과 씨름하고 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다. 성경은 이렇게만 말할 뿐이다...[전문 보기: 하나님께서 반칙하실 때]

마크 S. 지닐리아 비슨신학교 구약학 교수이며 앨라배마 버밍엄 어드벤트성공회주교좌교회 캐논 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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