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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아름답다김남준 목사에게 신학공부법을 묻다
김은홍-김남준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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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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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
 김남준
 생명의말씀사











남준 목사를 만났다. 이번에는 묵직한 책을 들고 그가 나타났다. 그가 많이 탈진한 것 같다는 소문의 진상이 짐작이 갔다. 이런 책을 쓰고도 몸이 멀쩡할 강골이 얼마나 있을까?

638쪽이나 되고, 거기다가, 제목에 ‘신학공부’가 떡하니 박혀 있으니, 요즘처럼 독서의 폐활량이 떨어지는 시대에 과연 읽힐지 걱정이 앞섰지만, 기우였다. 답도 제목에 있었다. ‘나는 이렇게 했다.’ 이 책은 제목처럼, 그가 공부하며 살아온 이야기, 살며 공부한 이야기다. 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사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신학을 해야 한다. 그 이유도 이 책에 있다―이 그 길을 찾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책이다.

 

이 책을 쓰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2012년 총신대학원 개강 수련회 강사로 갔을 때였습니다. 제가 신학 공부한 과정을 반추하면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신학생들에게 신학은 누가 공부하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왜 목사는 학문인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신학공부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커리큘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모든 것이 신학과정이라는 의미에서의 신학공부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신학을 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습니다.
 

책이 상당히 두껍습니다. 부담스런 두께임에도 불구하고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편하게 읽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목사님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열다섯 살 때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한 이야기와 스물한 살 회심 경험 이야기를 보면서, 목사님은 ‘천생 구도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조숙하셨던 건가요? 그런데 요즘 신학생들에게는 구도자의 자세가 얼마나 있을까요? 저는 솔직히 좀 회의적입니다.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노천 광산이라고 있습니다. 호주 같은 데 가보면, 우리는 땅을 파고 들어가서 석탄 같은 광물을 캐지만 그곳에서는 포클레인으로 그냥 퍼 담습니다. 그런 데가 있는가 하면, 땅을 깊이 파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내가 열다섯 살 때의 그 이야기를 했더니, 우리 교회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그러더라고요. “목사님은 워낙 영악하셨으니까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신 것이지만, 요즘 애들은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제가 한 이야기가 이겁니다. ‘교육이란 그 사람 안에 있지만 그 자신도 모르는 것을 끌어내 주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에 대한 책임은 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라 부모에게도 있다.’ 요즘 아이들이 미친 듯이 컴퓨터 게임에 빠지고 감각적인 분야에 빠지는, 이런 시각 중심주의 경향 자체가 결국은 그들 안에 채워지지 않는 질문을 회피하는 하나의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는데, 오늘의 교육이 사유능력을 퇴화시켜 버린 것이지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문제제기한 것도 목사님과 동일한 시각에서입니다. 개인적 관점에서 오늘 젊은이들이 진지하게 사고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보다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진지한 질문을 하는 훈련과 연습과 습관을 체득할 사회적ㆍ교육적 환경과 기회가 갈수록 빈약해진다는 것이지요. 결국 개인의 책임이기에 앞서 가정의 책임이고, 학교의 책임이고, 신학교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책임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책에서 재미있는 어떤 경향성을 발견했습니다. “조국 교회”를 이야기하는 행간들에서 유독 오늘 한국 교회와 신학 교육에 대한 목사님의 염려와 걱정,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읽게 됩니다.

성급한 제안이긴 하지만, 이 책이 이런 현실에 대한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으로, 이 책에 들어 있는 목사님의 신학공부법과 경험이 우리의 신학교육 현장에 일종의 커리큘럼으로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불가능합니다. 왜 우리는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받아도 세계의 존재 의미가 무엇이고 우주가 나에게 주는 질문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말하고 생각하고 토론할 수 없을까요? 교육이 다 갈갈이 찢어져서 옆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별 학문들의 전문화가 핸드폰 만드는 데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인문학 교육에 대한 강조가 계속되고 있지만, 그것도 결국은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잖습니까?

 

동의합니다.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목사님의 공부는 말하자면 ‘통합의 과정’이었습니다. 오늘 교육의 현장은 통합의 교육을 지향하지 않기 때문에, 통합을 주장하는 이 책을 교육현장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님은 저보다 더 비관적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보시는 현재 신학교의 현주소는 무엇입니까?

방향을 잃었습니다. 신학교육은 일반교육과 뗄 수 없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일반교육에서 방향이 잘못 잡혀서 온 학생들을, 설사 신학교가 이상적인 방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교육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보셨겠지만 서재에 5만 5000권의 책이 있습니다. 책하고 씨름하면서 살아 온 저이지만, 저는 12년 동안 단 하루도 학교에 가고 싶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엄청난 지진아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교육으로부터 자유로워

   
 

질수록 공부의 성과가 입증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교실에 붙잡혀서 공부하다가 야간 신학대학교 가서 혼자 자유롭게 공부할 때 행복했습니다. 경쟁률이 20:1이던 시절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석사과정을 마친 다음에 박사과정에 들어갔지만, 그것을 그만두고 나니까 더 많이 공부하게 됐습니다. 제도가 시키는 공부가 아니라, 자유롭게 내가 스스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강요하는 교육은, 그 속에서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지금 신학교육에 대해서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일반학문에서도 교육 자체가 심각한 지경에 있습니다. 신학교육도 교육부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한국 교육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이 신학교육에서도 그대로 노출되고 있을 뿐입니다. 신학교육의 문제는 교회 안에 있는 요인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도 문제의 요인이 있습니다. 밖에 있는 문제들 못지않게 기독교 안에 있는 문제 때문에 신학교육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입니다. 결국, 목사가 되는 이런 식의 과정 속에서 정말 좋은 목회자가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염려들이 있는 것이지요. 이러니 교육의 질은 갈수록 떨어지는데도, 교회 안에는 학력주의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속주의입니다. ‘박사학위 소지’를 담임목사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이 책에서 “객관적인” 목회의 소명을 말씀하십니다. 목회의 소명이 지역교회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상당히 의미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너는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소명을 객관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교회공동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저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개인들이 각자 알아서 판단합니다. ‘주관적인’ 소명만 있습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몇 년을 함께했는데도 어느 날 누가 신학교 간다는 소문이 나면 그때 남 얘기하듯 “쟤, 신학교 간대” 하는 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초대교회 시절, 목회자가 되는 방법은 개인이 어느 순간 목회자가 되어야겠다고 혼자 결정해서 그렇게 신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목사님을 돕는 ‘조사’라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전도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의 전도사는 반드시 신학교를 나와야 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평신도였습니다. 신학 비전문가였지요. 조사는 목사님과 전도여행도 함께 다니고 목사님 가방도 들어주고 외부 설교에도 동행했습니다. 마치 서당에서 스승님을 섬기면서 물도 떠오고 마당도 쓸었듯이, 그렇게 배우다가 저녁시간에 목사님이 조사를 앉혀놓고 강도가 무엇인지, 심방이 무엇인지를 직접 가르치다가 ‘너는 목사가 되는 게 좋겠다’ 해서 목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검증이 있습니까? 자기가 소명 받았다 하면 그냥 가는 것이지요. 그러니 심지어 신천지 같은 이단들도 버젓이 건전한 신학교에 학생을 보내 가짜 목회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정말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가 개인의 소명을 확인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합니다.

 

이 정도는 지금 당장이라도 지역교회에서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현 불가능한 ‘이상’ 수준이라면 모를까. 얼마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공감하는지의 문제, 그리고 의지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담임목사님 찾아가서 “추천서 써 주세요”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추천서마저도 사문화 된 것 같습니다.

교회가 이런 문제에 대한 자각은 하지 않고 좋은 목사만 원하고 있습니다. 사과나무는 안 심고 맛있는 사과는 먹겠다는 것입니다. 공부한 사람은 교회에서 좋아해도 공부하려는 사람은 싫어하는 것이지요. 부담스럽다는 것이지요. 지역교회에서 검증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사의 손에서 검증을 하는 정도의 소명이 아니라, 그가 정말 소명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지역교회를 섬기면서 공동체에서 확인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절차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예담)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신학만이 아니라, 인문학과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30대, 40대에 배운 것들을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요? 말하자면 ‘김남준 목사의 공부법’은 무엇입니까?

저는 사회적인 지위를 위한 공부에는 오래 전부터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이런 학문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공식기관에서 인정받고 그것이 주는 어떤 혜택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에는 그것이 제도적으로 필요했지만, 학교를 떠나서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는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한To live toward God, 공부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원인이고 목적이며 나의 가치 기준이고 모든 것이니까,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해서는 내게 지식이 필요한 것이지요. 지식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런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학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올바른 방식으로 획득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라면 전기나 전자 같은 지식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그 지식 안에는 반드시 사랑이 내포되어 있고, 그래서 배우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신학을 미학적 관점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독특한 용어로 설명하십니다. 신학에 대한 이와 같은 미학적 관점을 보면서, 아마 무신론자일 건데, 작가 알랭 드 보통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어떤 책에서 자연의 숭고함과 장엄함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 앞에서 압도되는 느낌, 거룩함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까요?

미학이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이 17세기입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로 넘어가면서 당시 사조가 낭만주의였는데, 말씀하신 알랭 드 보통은 사실은 무신론자이지만, 칸트와 비슷하게,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신의 존재를 요청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없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신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때, 도무지 무엇으로도 극복이 안 되는 질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으로부터 미학이 시작될 때, 아름다움 그 자체가 숭고미에서 출발합니다. 예를 들면, 노을이 지는 장엄한 광경, 파도치는 바다,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바라보는 황량함을 보면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설명할 수 없음’의 아름다움이지요. 나는 이것을 피조세계에 아직까지 묻어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의 흔적이라고 봅니다.

거룩함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종교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도덕적 완전성은 이성으로는 안보이고, 종교적 초월성은 자연세계에서 남아 있는 게 보이는 것이지요.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웅장한 자연의 세계를 보면서 감탄을 하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두려움이 이상하게도 그저 두렵기만 한 그런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우면서도 도망치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학적으로는 ‘거룩함’이라고 부르고,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아름다움’이라고 하고, 철학적으로는 ‘진리’라고 부르며, 윤리학적인 측면에서는 ‘선’이라고 부릅니다. 똑같은 것을 어떤 면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리 부르는 것이지요. 결국 이것이 “철학박사Ph. D”의 기원이 되는 겁니다. 수학을 해도 Ph. D, 미술을 해도 Ph. D, 어느 쪽으로 접근하든 마지막 올라가는 곳에서는 모든 지식들이 만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정도 되면, 신학은 정말 멋진 학문이 됩니다. 즐겁고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제가 아는 신학생들은 거의 다 찌들어져 있습니다. 현실은 다릅니다. 그게 참 아쉽습니다.

그래서 제 책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 책을 쓰기 전에 집필 구상을 할 때, 먼저 저의 연구를 돕는 팀이 모여서 이런 종류의 책이 있는지 한 번 찾아보자는 차원에서 상당한 조사를 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언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최소한 영어권을 조사해 보자. 유사한 책들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결론은 ‘없다’였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세상에 없는 책을 써보자 했던 것입니다. 이 책은 구성 자체를 어디에서 빌려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의 사상을 섭렵하면서 살아오긴 했지만요.

세상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다, 존재의 원리 자체가 존재와 선의 일치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원래 아름다운 것인데 존재가 아닌 것들이 파고들어가면서 아름답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천문학자가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고, 천재적인 수학자가 좋은 신학도가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겠군요. 제대로 학문을 했다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천문학을 통해서 천문학 자체가 아름다워지는 길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생명의말씀사)에서 오늘날 해체주의가 어떤 식으로 유행하는지를 보여주었는데요, 수학에도 상대주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수학에도 직관주의가 들어옵니다. 1+1=2, 1+1+1=3…, 이렇게 한 없이 올라갔을 때도 동일한 산술이 적용될 것인지는 ‘가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수학적인 사실에 대해 아는 것은 이성의 추론에 의한, 직관에 의해 아는 것이란 주장입니다. 심지어 요리, 의상, 패션, 도시 미학, 미학, 특히 건축, 이런 것들 속에도 상대주의가 묻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아바타> 같은 영화가 나와서 그렇게 어마어마한 흥행을 이루는 현상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 배경에는 정교한 철학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화 속에 몰입하면서, 문화가 주입하려는 다른 신앙 코드를 읽지 못하고, 거꾸로, 신앙에 몰입하면서 반문화적인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둘 다 성경이 원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에서 피 토하듯 얘기했는데, 사람들이 어렵다고 잘 안 읽네요. 그런데 이 책(신학공부, 나는…)은 여태까지 반응이 좋습니다. 굉장히 어려울 줄 알고 샀는데 재미있다는 반응들입니다.

 

고전적인 문제도 하나 던져야겠습니다. 학문과 경건, 지성과 영성, 둘의 통합에 관한 토론에서 이미 정답은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모호하게 얘기합니다.

평신도가 목사에게 성경 읽다가 질문을 했답니다. “로마서 9장에서 이게 무슨 뜻입니까?”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이건 매우 어려운 질문이니 목사가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학교 교수에게 물어라.”

신학교 가서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교수가 말합니다. “난 조직신학 교수라 잘 모른다. 성서학자한테 가라.”

그래서 성서학 전공자를 찾아갔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난 구약학 전공자라 신약학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신약학 전공 교수 왈, “나는 공관복음 전공자니 바울 신학 전공자를 찾아가라.”

바울 신학 전공 교수는, “나는 데살로니가 전서 전공이니 로마서 전공자를 찾아가라.”

어렵게 찾은 로마서 전공자는 ‘나는 로마서 8장 전공자이니 9장 전공자를 찾아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9장에 대해 나는 잘 모릅니다. 8장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게 그 사람의 아우라입니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으면 모른다고 이야기할까요? 다들 엉터리지요.

F22 전투기가 천하무적이라고 합니다. 이 전투기 만드는 프로젝트에 1200가지나 되는 연구과제가 있다고 합니다. 대학 연구소들에 하나씩 뿌린답니다. 연구소들은 뭔지도 모르고, 돈 받고 주어진 연구만 합니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엮어내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지요. 건축학을 “아키텍처”architecture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테크네’라는 말과 ‘아크’라는 말을 합친 것이지요. 병 만드는 기술, 유리창 만드는 기술, 이것은 ‘테크네’입니다. 이 테크네들을 결합해서 하나의 원하는 건물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이런 개별 기술들과는 다른 기술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신학이 바로 그런 학문입니다. 신학을 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공부가 철학공부였는데요, 철학공부가 다른 공부를 통합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신학은 그 철학을 사용하는 학문입니다. 마치 시녀처럼. 그러니까 최고의 지성인들이 하는 공부가 신학공부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학을 공부하는 것 자체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도 공부를 했습니다.

내가 열다섯 살 때,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한 바로 그 순간에 나의 신학공부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봅니다. 신의 존재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나의 인생사가 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무신론은, 말하자면, 또 다른 모양의 신론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때로는 그래서 무신론자가 경건하지요. 적어도 치열하게 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진지하기는 하지요. 경건하지는 않고….

 

말을 바꾸겠습니다. 때로는 그래서 무신론자가 더 ‘진지한’ 것이겠지요. 이 책에서 목사님은 30대에 모든 분과 신학이 아름답게 하나로 통합된다는 것을 발견하셨고, 40대 후반에는 모든 학문들이 역시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통합되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신학에 관심이 있는 CTK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신학에서 배우는 지식들을 성경과 연결하고, 그렇게 연결된 지식을 삶에 적용하고, 거기에서 체득되는 경험을 통해 성경을 더 깊이 볼 수 있게 되고, 그렇게 깊이 성경을 볼 수 있게 된 견해를 가지고 자기에게 가르쳐진 신학이 올바른지를 다시 평가해서 교정하는 순환이 일어나야 되고, 그런 고민 속에서 신학을 한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신학을 가르칠 때에 경험과 학문, 세계관과 인생관을 열어주는 진정한 신학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을 옮겨 적는다.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스스로에게 분을 내거나 천재 같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낙담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자신을 우둔자로 알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저 스스로 학문적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수시로 마음에 새기는 글이 있습니다.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천리마가 한 번 크게 뛴다고 하더라도 열 걸음을 나아갈 수 없고 노둔한 말일지라도 열흘을 달리면 역시 거기에 미칠 수가 있다. 일의 성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데 있다(騏驥一躍 不能十步 駑馬十駕 則亦及之 功在不舍)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 130쪽


그는 이 책을 4년에 걸쳐 1700여권을 찾아 뒤져 읽고 공부하면서 썼다. 그는 노마駑馬다. 무디고 느린 말이다. 그러니, 쓴 책이다.  CTK 20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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