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만나게 될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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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만나게 될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라
  • 미로슬라브 볼프 | Miroslav Volf
  • 승인 2019.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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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서 함께할 수 없는 이들과 어떻게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

 

예일의 동료 교수인 칼로스 아이어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뵈러 갈 때면 그분의 친구들이 모여 사는 작은 쿠바 이민 공동체에 들러 그들의 신학 상담자가 되어 드리곤 했다. 한 여성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카스트로가 죽어가면서 회심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예, 갈 수 있습니다.” 아이어 교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바로 그게 기독교 신앙이지요. 속죄의 범위 밖에 있는 사람은 없답니다.” 그녀가 대꾸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네요.”

칼 바르트는 쿠바 카스트로 정권에서 쫓겨난 이 여성의 질문과 반대 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언젠가 천국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사실인가요?”

바르트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랍니다!” 위대한 신학자의 이 예리한 한마디―당신이 싫어하는 사람들도 천국에서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로 천국을 가득 채우고 싶어 하는 우리의 바람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천국의 공간을 함께 나누고 싶지 않은 나만의 ‘카스트로들’이 있다. 그들이 있는 천국이라면 마치 지옥 앞마당 같을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한다.

이 딜레마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도전을 던지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것을 신학적으로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또는 서로를 증오할 만한 이유들이 있는 사람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 유명한 설교 제목처럼, “천국, 사랑의 세계”Heaven, a World of Love에서 어떻게 함께 지낼 수 있을까?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들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랑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원수들이 친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어두웠던 지난날들과 찬란한 빛으로 물든 영원 사이에서 언젠가, 다시 말해, 다음 세상에 가기 전에 어디쯤에서,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관계들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천국은 완전한 사랑의 세계가 되지 못할 것이다. 최선의 경우에도 숭고한 사랑마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차가운 무관심이 판을 치고 끔찍한 증오심이 불타오르는 곳, 곧 이 세상의 되풀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심판의 범위

우리의 신학은 불행히도 이 질문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못해 주고 있다. 로마가톨릭의 연옥 교리도 우리가 사랑의 세계에서 살 수 있으려면 일어나야 할 변화의 사회적 측면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독교 종말론에 설명의 자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종말론의 “최후의 두 가지”―최후의 심판과 죽은 자의 부활―가 이 세상과 천국 사이에서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은 이 문제에서 제껴둘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부활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육체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응답이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도덕적 영역을 다루기 때문에 우리가 던지는 질문과 관련이 깊다.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범죄와 인간들 사이의 범죄라는 문제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최후의 심판과 관련한 사유 방식에서 두 가지 기본적인 유형이 있다. 첫 번째 유형의 전형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최후의 심판이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을 구분하여 “참되고 충만한 행복”은 “오로지 선한 사람들의 몫”으로, “당연히 받아야 할 최고의 불행”은 “오직 악한 사람들의 몫”으로 확정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심판의 기능은 “선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악한 사람들”과 구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 전에 이미 완전한 사랑의 피조물인 경우에만, 최후의 심판 후에 완전한 사랑을 하게 된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 번째 사유 방식은 마르틴 루터와 관련이 있다. 루터는 최후의 심판을 하나님의 공의―이것은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을 구분한다―와의 만남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이것은 “선한 사람들”이 못되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한다―와의 만남으로 설명한다.

신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이란 무엇보다도 죄인이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건이라고 루터는 강조한다. 최후의 재판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비로우신 구주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분이 아니시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그분은 의사요, 도움을 주시는 이요, 사망과 악마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는 이시다.”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속죄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칭의를 완성한다. 하지만 최종의 칭의가, 말하자면, 사랑의 세계를 만들어낼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물론 우리가 지금 여기서 그다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스럽지 않은 그 사람들을 사랑하려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나야 한다.

첫째, 나는 이 말을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하는데, 우리가 직접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를 그렇게 생각할 것이므로, 그들도 역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서 이와 같은 “칭의”를 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또한 서로 친교하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세계로 안내 받으려면, 지상의 존재에서 천상의 존재로의 변화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최후의 심판)으로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사건(최후의 화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을 하나의 명제 형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천국이 사랑의 세계가 되려면, 현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전환―하나님께서 이것을 이루실 것이다―에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측면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 그럴까? 인간의 본성, 죄의 성격, 구원의 모습에 그 답이 있다. [전문 보기: 천국에서 만나게 될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라]

 


Miroslav Volf, “Love Your Heavenly Enemy” CT 2000.10.23; CTK 20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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