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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춤추다예배에는 왕조차 체면 생각 않고 춤추게 하는 힘이 있다
마크 뷰캐넌  |  Mark Bucha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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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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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춤을 춘다.

한 남자는 나자빠져 죽고, 한 여자는 불임을 선고받는다. 이 긴박한 사건들 한가운데서도 다윗은 펄쩍펄쩍 뛰고 빙빙 돌고 온몸을 흔들고 팔다리를 한껏 휘젓는다.

다윗의 나이 어언 마흔. 숱한 전쟁에, 사울에게 쫓겨 도피 생활과 타향살이에, 만신창이가 된 육신이지만 이제 안정을 누린다. 더 이상 먹을 것을 구걸하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갑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군사들을 모으지 않아도 되고, 동굴에 숨을 필요도 없으며, 미친 척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이스라엘의 주인이다. 그는 왕이다. 계략과 내핍과 곤궁의 시대가 끝나고 비로소 번영과 풍요와 평안의 시대가 왔다.

아마도 다윗의 몸도 이 모든 변화를 느꼈을 것이다. 쌀쌀한 아침이면 팔다리 뼈마디가  장작개비처럼 뻣뻣해지고, 몸은 마냥 늘어져 천근만근이 된다. 나태와 무료함이라는 상처가 그를 짓누른다.

그런데 오늘 다윗은 춤을 춘다. 거의 벗다시피 한 채로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온 힘을 다해 춤을 춘다.

한 달 전에도 다윗은 그렇게 춤을 추었고, 그때 한 사람이 죽었다. 제사장 웃사였다. 다윗이 춤을 추는 바람에 일이 터진 것이다. 소들이 뛰어서 하나님의 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 했다. 하나님의 궤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려는 순간이었다.

웃사의 본능은 예리했고 신속했다. 웃사는 이런 돌발 상황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우려하던 상황이 마침내 벌어졌고, 그는 즉각 대처했다. 그는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궤를 붙잡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이셨다.

그리고 오늘은, 다윗의 춤은 격한 부부싸움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게 된다. 사울의 딸이며 다윗의 첫째 부인인 미갈은 남편의 춤이 못마땅했다. 사실, 역겨워했다. ‘다 큰 남자가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지. 더군다나 왕이. 왕답게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하는데 이렇게 볼썽사납게 행동하다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미갈의 태를 닫으셨다.

한 남자는 죽고 한 여자는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었지만, 다윗은 춤을 춘다. 새가 날듯,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대는 듯, 춤을 추려고 태어난 사람이 마지막 춤을 추는 듯, 그렇게 춤을 춘다. 그의 춤사위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필사적이다. 갈망과 경이로움으로 빚어진 그의 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이 추게 하신 춤이다. 불 속에, 절벽 끝에, 높은 줄 위에, 목숨을 건 모험 속에, 죽음과 불임의 저주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춤이다.

웃사는 잔뜩 긴장하여 걱정스레 지켜보다가 죽는다. 미갈은 한심하다는 듯 냉소를 지으면서 지켜보다가 자식 없이 죽는다.

그리고 다윗은 춤을 춘다. 살아서 온 힘을 다해 춤을 춘다.

정말 기이한 이야기요 충격적인 이야기다(삼하 6:5-7, 16, 20-23). 비통과 역설과 공포와 갈등이 뒤섞인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애써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도식화된 극히 일부, 행복하고 뛰놀 듯 춤추는 왕의 모습만 기억할 뿐이다. 손을 들고 손뼉을 치는 워십 댄스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나 인용될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죽음의 기운이, 불임의 저주가 있다. 이 이야기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왕권의 상징으로 삼으려는 데서 시작된다.

사울 왕가와 북 왕국에 맞서 7년이 넘도록 음모와 치열한 전쟁을 치른 다윗은 드디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좌에 앉았다. 이제야 한숨 돌리게 되었다. 이제 모든 힘을 국가 발전과 문화 진흥, 기술 연구, 통치 체제 강화, 예배에 쏟아 부을 때가 되었다.

언약궤는 다윗의 정치력과 왕권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할 것이다. 미완의 모자이크, 다윗 왕조의 정통성에 마지막 한 조각을 채워 넣을 것이다. 따라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겠다는 계획에는 다윗의 정치적 동기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윗의 결정은 치밀한 정치적 계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늘 그러했듯 다윗의 동기에는 훨씬 높은 차원이 있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려는 동기는 정치적 제스처가 우선이 아니었다. 예배가 우선이었다. 언약궤를 되찾아옴으로써 다윗은 하나님이 이 왕국의 왕이시며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이시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하려 했다. 진정한 왕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단지 하나님께 충성할 뿐이라는 것을 다윗은 인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을 위해 다윗은 춤을 추었다.

드디어 언약궤는 차가운 헛간을 벗어난다. 위험천만한 성물(聖物)로 여겨지던 언약궤는 삼사십 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다윗의 통치 초기에도 어수선한 상황 때문에 잊혀 있었다. 아마도 더러는 이 케케묵은 고대 유물을, 고색창연한 이 종교적 상징을, 왕정 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이 원시적인 전쟁부적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에 대해 당혹스러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잊은 적이 없다. 그에게 하나님의 궤는 깊은 현실deep reality―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127:1]―을 깨닫게 하는 살아 있는 상징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언약궤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윗은 춤을 춘다. 억누를 수 없는 기쁨에서 터져 나오는 역동적인 춤이다. 믿음과 순종―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의 팬터마임이다. 다윗은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 그래서 춤을 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비극이 따른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불같은 노여움을 사서 그 자리에서 죽는다.

왜? 웃사는 그저 언약궤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 했을 뿐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우리도 웃사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이셨다. 왜?

짐작해 본다. 웃사는 다소 진보적인 성향에 인습타파에 앞장섰을지 모른다.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문제 삼는 독선자요, 반체제 성향이 강했을지도 모른다. 관습보다는 자기 자신의 법을 더 중요시하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뻔히 알면서도 언약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 싣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어떻게 운반해야 할지 조목조목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궤는 고리에 대를 끼워 제사장이 운반해야 한다.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방식이다. 아마도 이 방식을 밀어붙인 사람이 웃사였을 것이다. 웃사는 더욱 편리하고, 더욱 효율적이고, 더욱 우아한 블레셋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예배에 가장 새로운 방식과  도구를 이용한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생각지 못하셨지? 그럼, 우리가 바꾸면 되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늘 다른 나라를 흉내 내려고 애썼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 밖에서 모두들 한다면, 틀림없이 교회 안에서도 할 수 있고 그게 바로 발전이 아니겠어?’

로드니 클랩Rodney Clapp은 「구별된다는 기쁜 의미」Peculiar People(서로사랑 역간)에서 교회의 특수성을 이야기했다. 그는 교회의 힘은 구별됨Peculiarity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그 어떤 기준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별스럽고 색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그렇다. 우리는 별난 사람들이다.

바로 이 구별됨으로 인해 우리는 부담을 느끼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도시에서 시골 사투리를 쓰거나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으면 손해 볼 것 같다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시대를 주도하는 블레셋의 혁신과 세련을 쫓으려 애쓴다. 최신 유행이라면 무조건 따른다.

물론 성경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내 생각에 웃사는 새롭고 신기한 것에 열광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이러한 성향은 얼핏 보면 별 문제가 안 될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웃사는 또 전통의 묘미도 적절히 살릴 줄 알았던 인물인 듯하다. 전통을 무기화 한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서, 웃사에겐 바리새인 같은 기질이 있다. 새로운 것을 적극 도입하고 수용한 다음에는 죽기 살기로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려 한다. 그래서 웃사는 수레를 도입하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지휘한다. 최신 유행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전통도 고수하려 애쓴다. 그렇지만 그는 정작 중요한 한 가지, 예배는 잊고 있다.

나는 웃사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목사이고 예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회중의 감정이 어떻게 고조되고 어떻게 흐르는지를 파악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하면서 지켜보는 것이 내 의무다. 솔직히 말하면, 예배에 몰입하면서 동시에 회중을 인도하기란 쉽지 않다. 이성이 마냥 깨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나 자신을 던지기란 쉽지 않다. 이를테면, 설교 주제에 맞으면서도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고 감동과 엄숙함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찬양을 부르는지 누군가는 확인해야 한다. ‘기타 2번 줄이 반음 낮게 조율된 것 같은데. 헌금은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소가 날뛰고 언약궤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언약궤가 떨어지면 누가 붙잡지? 누가 하나님을 보호하지? 누군가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야 해. 모두 춤을 출 수는 없어.’

 

   
 


웃사가 죽다

개인적으로 큰 희생을 치른 웃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안전을 염려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수호신이 아니며 우리가 지켜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선지자이건 왕이건 제사장이건, 아니면 은행원이건, 이 땅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혹시라도 사고나 난감한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것은 우리의 책무가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돌보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하나님은 무섭고 두려운 분이다. 마음 놓을 만한 분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보다 더 두렵고 위험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웃사의 죄 가운데 가장 무섭고 위험했던 것은 하나님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련된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안전한 조처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전통을 고수하든, 새로운 유행을 좇든, 하나님을 보호한답시고 오로지 자기 방식대로 직무에만 열중한다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분이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체험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춤추는 것을 잊게 된다.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는 벌써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

석 달이 지나, 다윗은 다시 시도한다.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기 위한 절차가 다시 한 번 시작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블레셋의 유행을 좇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따른다. 그리고 다윗은 또다시 춤을 춘다. 이번에는, 모든 일이 잘 되어 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윗의 가정에서 골치 아픈 일이 불거진다. 그날 미갈은 궁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아마도 두통이나 요통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성경 본문을 토대로 미갈의 기질을 추측해 보면 그녀는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거리를 두고 지켜보면서 판단한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삼하 6:16)

이런 기미를 모르는 다윗은 들떠 돌아온다. 기쁨에 겨워 얼굴이 환하고 한없이 너그럽다. 그는 “자기 집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집에 들어서자 미갈은 싸늘함과 경멸과 냉소로 다윗을 몰아세우고 그의 기쁨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오늘은 이스라엘의 왕이 체면을 잃었군요. 당신은 당신 신하들의 여종이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었어요. 당신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몸을 드러내는 바보 같았어요.”(삼하 6:20)

아마도 미갈은 체면을 지키고, 언제나 위엄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경건은 여러모로 유익하다. 경건한 여종이 은그릇을 훔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미갈이 이처럼 신랄하게 비난을 쏟아 붓는 이유는 자신의 감정표현을 자제하지 않고 그대로 표출하는 것은 천한 것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다면 얼마든지 참고 받아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위태위태하다. 미갈이 신경 쓰는 것은 엄숙과 절제인데, 예배가 늘 이 엄숙과 절제를 위협하고 깨뜨리려 하기 때문이다.

예배에는 왕조차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펄쩍펄쩍 뛰며 춤추게 하는 어떤 힘이 있다.

미갈은 깊은 물에는 절대로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굳이 뛰어들고 싶다면, 얕은 데 뛰어들어라.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극도로 흥분하여 남이 구해 내야 하는 상황을 맞는 것보다는 차라리 팔다리가 마비된 듯 꼼짝 안하고 있는 것이 낫다. 그저 물에 뛰어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아예 개울을 건너지도 말라. 굳이 소란 피울 것 없다. 어린애들이 물놀이를 하느라 꽥꽥거리며, 첨벙거리고, 물을 튀기는 곳에서는 가급적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것이 상책이다. 아예 그냥 집에 남아서 창문으로 내다봐라. 그게 최고다. 

미갈의 입장이 이해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목사가 회중과 정확히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예배에 몰입하여 영적 감동이 넘칠 때 그것을 몸으로도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한다면 회중은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아마 그들은 당혹스러울 것이다. 회중은 목사가 침례교 전통을 충실히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목사로서의 내 자질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서서 정황을 파악하고 분위기를 가라앉혀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하려고 애쓸 것이다.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할 것이다. 엄숙한 예배를 지켜내려고 할 것이다.

‘목사들이 자리를 박차고 통로로 나와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춤을 춘다면 어떻게 될까? 회중이 자제력을 잃고 흥분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회중의 체면과 위엄은 누가 지켜주지? 누군가는 좀 떨어져서 정신 바짝 차리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뛰노는 사람이 없도록 지켜봐야 한다. 모든 사람이 춤추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미갈의 태가 닫히다

 

   

개인적으로 큰 희생을 치른 미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또 하나의 귀중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체면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점잔을 빼는 우상들과 다르다. 저만치 떨어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몸에 밴 예의와 격식을 철저하게 지키는 분이 아니다. 선지자이건 왕이건 제사장이건, 아니면 가정주부이건, 이 땅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건, 한껏 점잔을 빼면서 체면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책무가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돌보신다. 체통을 지키거나 못 지키거나, 고관대작 앞이거나 여종들 앞이거나, 옷을 입었거나 벗었거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 앞에 나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미갈은 죽는 날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태가 말라 있었다.

그리고 다윗은 춤을 춘다. 죽음과 불임의 저주 사이에서, 극도의 두려움과 분노를 뛰어넘어, 춤을 춘다.

이따금 우리는 고조된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고 난 뒤 무엇인가가 남게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때가 있다. 그것은 곧 가장 깊은 현실deepest reality이다. 세상 사는 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때도 있지만 이면에 감출 때도 있다. 제사장으로서 예배를 인도하는 것, 아내로서 남편의 체면을 생각하는 것, 왕으로서 반쯤 벗다시피 한 채 이리저리 뛰고 맴돌면서 춤을 추는 것, 이 모두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실일 뿐이다. 이면에 있는 가장 깊은 현실은 그 사람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가장 깊은 현실을 보고서는 재밌어 할 사람도 있다. 돌처럼 굳어질 사람도 있다. 감정이 너무 복받쳐 목이 멜 정도로 기뻐하는 사람도 있다. 초인적 평강을 누릴 수도 있고, 불가항력의 두려움으로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다. 자신에게서 전혀 딴 사람을 볼 수도 있고, 진짜 자신을 볼 수도 있다. 왕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도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가장 깊은 현실deepest reality을 다루는 몇 가지 방식이 있다. 꼬치꼬치 따지는 관료가 되거나 바리새인이 된다. 멀찍이 떨어져 있거나 비아냥거린다. 거만을 떨거나 겸손한 채 자기를 숨긴다.

아니면, 춤을 춘다.

우리 교회에도 춤을 추는 성도가 한 분 있다. 반주가 엉망이더라도, 음정이 제대로 맞지 않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불평을 하더라도, 입을 다문 채 눈총을 주더라도,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온 힘을 다해 예배한다. 하늘을 향한 그녀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활짝 펼친 양팔은 천사와도 같고 십자가와도 같다. 포기와 수용이 어우러진 자연스러운 몸짓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활기차다. 모두들 거인 앞에서, 적군 앞에서 벌벌 떨 때에도 하나님의 크심을 보는 사람이 있다. 미친 통치자가 잔혹한 법령을 포고할 때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다. 모두들 자기 할 일만 하거나 책임을 떠넘길 때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 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초조해 하는 제사장과 냉소하는 아내는 금을 입힌 언약궤와 열광하는 군중을 보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보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있는 순간의 다윗과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반미치광이나 현실감이 결여된 사람으로 여기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바로 그 순간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춤추는 다윗이야말로 참으로 왕답지 않은가? CT

Mark Buchanan, “Dance of the God-Struck” CT 2002.10.7; CTK 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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