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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함으로 올바르게 회복될, 기억“기억의 방패”가 칼로 변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로슬라브 볼프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한다.
미로슬라브 볼프-콜린 핸슨  |  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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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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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종말
미로슬라브 볼프
홍종락
IVP

 

예일 신앙과 문화 연구소 소장 미로슬라브 볼프가 기억의 종말The End of Memory을 출간했다. 볼프는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대한 구속적redemptive 목적을 갖고서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조국 크로아티아(당시는 구 유고슬라비아에 속해 있었다)에서 겪은 심문의 기억을 들려준다. CT 에디터 콜린 핸슨이 예일 신학대학원 그의 사무실에서 볼프를 만났다.
 

기억이 매우 긴급한 신학 주제가 되고 있는데,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학이 기억에 관심을 가지는 일부 이유는 우리가 굉장히 빨리 돌아가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 며칠만 지나면 증발해버리다 보니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문화입니다. 끝없이 바뀌고 변하는 현재에 집착하다보니 기억이 우리에게서 빠져나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을 붙잡아 두고 싶어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과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관계에 대한 기억이 우리의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정체성도 과거에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일정 부분을 차지합니다.
 

기억이라는 주제가 당신에게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갈등에 불을 지피는 것은, 그것이 개인들 사이의 갈등이든 공동체들 사이의 갈등이든,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합니다. 미래에 유사한 폭력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나는 “기억의 방패”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방패가 너무나 빨리 칼로 변질됩니다. 기억은 나의 고국 크로아티아에서 발생한 최근의 갈등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나의 관심은 우리의 기억이 방패에서 칼로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기억이 화해의 수단이 될 수 있는 방식을 찾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단순히 기억 자체가 아니라, 바르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신학적이면서도 개인적입니다.

내가 유고슬라비아 비밀경찰과 군대에서 심문 받은 이야기가 이 책의 뼈대 역할을 합니다. 내가 신학자이고, 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인과 결혼했다는 이 단순한 사실 때문에 그들은 나에 대한 거대한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내가 체제 전복을 꾀하는 불순분자인지 아닌지 알아내야 했습니다. 기억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기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기억과 화해가 치유의 도구가 되는 데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인격의 빛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그 실례를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심문당한 경험과 심문관들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성경은 기억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는 것, 이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화해가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바르게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조나난 에드워즈의 표현을 빌리면, “완전한 사랑의 세상”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세상을 만드시려는 원대한 화해의 비전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기억이 하나님의 원대한 화해의 비전에 보탬이 되어야 합니다.
 

‘올바르게 기억하기’에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고유한 기여를 할 수 있습니까?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안경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한 기억의 안경을 씁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누군가가 나에게 한 잘못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했지만 바로 그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기억해야 합니다. 설사 그 사람이 그 구속을 인정하지 않더라고 말입니다. 그 다음에 나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나에 대한 그 잘못을, 어떤 죄도 짓지 않은 순전한 ‘나’에 대한 잘못으로 기억할 수 없습니다. 나는 빛 가운데 있고 그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다, 그는 완전히 바뀌어야 하고 나는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다.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나의 기억의 틀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나를 해친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어떻게 해야 고통 없이 기억할 수 있을까요?

기억에 관한 토론 경향을 보면, 우리에게 일어난 것,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한 것, 또는, 우리가 좀 더 도덕적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것에 대한 기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조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한 행동과 우리가 당한 고통에 관한 기억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고통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압제에서 그들이 고통당했던 것만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 기억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기 위한 배경이었습니다. 그들이 기억한 것은 해방의 기억, 구원의 기억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우리도 바르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기억이 교회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요?

우리에게는 기억의 의식, 성찬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빵을 떼며 그리스도의 찢긴 몸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가 흘리신 피를 기억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올바르게 기억한다면, 성찬식에서 우리가 하는 그 의식적 행동 역시 화해를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면서 나 자신을 성자가 아닌 죄인으로 기억합니다. 나의 원수를 어둠에 던져져야 할 경멸스런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신 것이 바로 이 사람을 위해서임을 기억하면서 나는 주님의 만찬을 기념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그리스도의 그 행동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고 대할 때 그리스도를 따라하게 됩니다.
 

우리가 당한 악행을 우리는 언제 잊을 수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 망각이란 치유된 관계의 선물로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 세상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으면 우리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경험은 콘서트홀에 앉아서 멋진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바로 두 시간 전만 하더라도 그 사람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그 음악에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잊으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그 음악에 빨려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음악이 과거의 기억에서 그를 꺼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치유된 자아, 치유된 관계, 그리고 새로워진 세상이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잊을 수 있습니다. CTK 20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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