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용서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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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용서의 여정
  • 밥 스미에타나 | Bob Smietana
  • 승인 2020.06.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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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턴 총기난사, 일년

 

2015년 6월, 두 가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 잇달아 일어났다. 하나, 테러: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의 유서 깊은 “마더 이매뉴얼”Mother Immenual AME Church의 수요일 저녁 성경공부 모임에 낯선 청년이 찾아왔다.

청년의 이름은 딜런 루프였다. 루프는 약 한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더니 소지하고 있던 45구경 권총을 난사했다. 순식간에 아홉 명―디페인 미들턴 닥터, 신시아 허드, 수진 잭슨, 에델 랜스, 클레멘타 핀크니, 타이완자 샌더스, 대니얼 심슨스, 새론다 싱글턴, 마이라 톰슨―이 목숨을 잃었다. 한 순간에 아내는 남편을 잃었고, 아버지는 딸을 잃었고, 아이들은 부모를 잃었고, 교회는 목사를 잃었다.

그리고 자비: 그 테러가 일어나고 이틀 뒤, 미국 전역이 분노와 불신으로 들끓고 있는 동안 루프의 총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가족들은 폐쇄회로텔레비전을 통해 다른 방에 있는 루프에게 말을 건넸다.

방송사들이 양쪽 방의 상황을 보도했다. 한 쪽 방에는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표정한 루프가 서 있었고, 다른 방에는 희생자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희생자 가족들은 슬픔과 분노로 목소리가 떨렸지만 차례차례 루프에게 용서의 말을 전했다. 가장 단도직입적으로 용서한다고 말한 사람은 희생자 에델 랜스의 딸, 네이딘 코이어였을 것이다.

 

“나는 너를 용서해. 너는 내게서 가장 귀한 것을 빼앗아갔어. 다시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너를 용서할게. 네 영혼에 자비가 함께하길…. 넌 나에게 상처를 주었어. 넌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어.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신다면, 나도 너를 용서해.”

최근 몇 년간의 모든 정황을 보건데 미국인의 삶 속에는 여전히 백인우월주의가 각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찰스턴 총기난사 역시 이를 입증한다. 20세기에 이 나라 곳곳에서 일어난 흑인 집단폭행 사건들이나 21세기에 한 백인 소년이 저지른 총기난사나 그 악의 뿌리는 동일하다.

불법 총기구매 전력이 있는 21살짜리에게도 총기소지를 허용하는 법의 허점을 뚫고 교회에 들어간 딜런 루프는 흑인에 대한 그릇된 반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복수와 인종전쟁을 외쳤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거룩한 능력을 세상에 상기시키는 특별한 용서와 기도와 자비의 사건들이 지난 몇 십 년 동안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이 놀라운 자비는 세속화가 무르익은 이 나라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급기야 입법자들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바꾸는 능력을 발휘했다.

찰스턴 총기난사 3주 만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의사당에 게양된 남부연합기를 둘러싼 논쟁이 일단락됐다. 공공장소에서 남부연합기를 게양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 통과된 것이다. 2015년 7월 10일, 남부연합기는 내려졌다. 6월 17일의 용서가 공직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런 일이 끔찍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 며칠 동안에 일어났다. 우리는 찰스턴의 비극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애도하고, 기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CT가 이 커버스토리에서 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되어야 한다.

 

트라우마, 그리고 용서

“제 슬픔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홉 희생자 가운데 하나인 타이완자 샌더스의 누나가 말했다.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네요. 삶은 여전히 계속되어야하지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슬픔을 냉정하게 바라보기란 일 년이란 세월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그것을 치유하려면 평생이―어쩌면 그보다 더―걸린다. 마더 이매뉴얼의 생존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들은 여전히 비탄에 빠져 있고 앞으로도 수년 동안 거기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찰스턴 1주기를 맞아 보다 깊이 그들을 추모하려면, 먼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가해진 폭력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한다. 그들의 트라우마는 300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 그 사실을 인정받기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더 이매뉴얼의 총기난사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이 교회는 또한 지난 수세기 동안 되풀이 된 비극의 산증인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세운 이 교회는 1822년 덴마크 베시Denmark Vesey의 노예봉기 여파로 잿더미가 되었다. 미국이라는 정치 공동체 안에서 생겨난 가장 원초적인 이 상처를 치료하려면 수 세기는 더 걸릴 것이다.

마더 이매뉴엘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한 평생이 걸린다면, 마찬가지로 6월 17일 그날 불쑥 튀어나온 질문들에 충분한 답을 얻기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질문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루프가 방아쇠를 당기는 그 순간에 어디에 계셨을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찰스턴 사건과 같은 일이 벌어질 때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러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지독한 인내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날 찰스턴 마더 이매뉴얼에서 그 끔찍한 악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지금도 마더 이매뉴얼과, 찰스턴에 있는 다른 교회들에서 계속 예배를 드리고 있다. 혈육과 친구들을 구해주지 않으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 교회들에서.

그 이후로 마더 이매뉴얼은 힘겨운 짐을 지게 되었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입증된 아프리카계 그리스도인들의 인내심을 오늘날에도 보여줘야 한다는 중압감이다. 더구나 이 교회가 전국적으로 관심을 받으면서 그 짐은 더욱 더 무거워졌다.

총기난사 사건 직후에, 이미 나 있던 균열이 더욱 더 벌어지고 흠집 나 있던 관계가 더 악화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찰스턴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마더 이매뉴얼 내부에서도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이 있다. 그 일들은 온 나라의 관심을 받다보니 해결이 더욱 더 힘들어졌다.

버밍햄 16번가 침례교회[1963년 9월 15일 주일, 백인우월론자의 폭탄 테러가 일어난 아프리카계 교회]나 애틀랜타의 에벤에셀 침례교회[마틴 루터 킹 목사가 세례를 받고 담임했던 교회] 같은, 순례지가 된 다른 교회들이 입증하듯이,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교회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트라우마가 쉽게 사라지지 않듯이, 용서 또한 그러하다. 용서란 기나긴 인내를 통해서야 완성되는 고귀한 이름이다. 용서한다고 큰 소리로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가 인정하든 안 하든 용서하는 사람에게는 평생 안고 가야할 아픔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를 용서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지속시키기로 결심하는 찰스턴의 유가족들은 계속 늘어가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견디기 힘든 상처를 견뎌낼 힘을 얻고 치유를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의 분명한 부재를 겪은 고통스런 희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대한 증인으로.

일 년이 지난 지금, 찰스턴의 이 교회는 영원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마더 이매뉴얼의 주일예배에는 “예수 같은 친구 없네, 전혀 없네”라는 찬양이 그치지 않는다.

참혹한 트라우마의 시간에도 함께하신다고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분은 틀림없는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 죽임당한 어린양이시다. 마더 이메뉴얼의 임마누엘, 우리 모두의 임마누엘이시다.—CT [전문 보기: 힘겨운 용서의 여정]

 


Bob Smietana, “A Fragile Forgiv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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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home 2017-07-05 05:20:23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