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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여행의 불편한 기억들단체 수련회에서 고독과 만나는 여행으로
박명철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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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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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를 지어
휴가철이었다. 춘천에서 가평 청평으로 이어지는 경춘선에는 예나 지금이나 많은 젊은이들로 붐빈다. 그 무렵 가평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보낸 두 시간 동안 내 눈에 들어온 이상한 풍경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다.

가평역은 기차가 들어오기 전과 들어온 뒤의 풍경이 엇갈렸다. 서울로 가는 기차가 들어오기 전,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젊은이들이 떼를 지어 역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적게는 열 명, 많게는 50명 이상인 그들은 둥그렇게 서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조회할 때처럼 줄을 맞춰 서서 인원점검을 하였다. 교회에서 온 젊은이들의 경우 그렇게 모여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날씨에 종교가 다른 이들의 귀에는 그 노래들이 오히려 짜증을 유발했다. 그들은 그렇게 머물러 있으면서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을 경우 누군가 오버하는 한두 사람이 꼭 나타나게 마련. 유치한 농담과 극성스런 웃음, 요란한 반응 등을 어쩔 수 없이 듣는 사람들로서는 불쾌하여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뿐이다.

다행스럽게 기차가 들어오고 이들이 빠져나가면 아주 짧은 시각 가평역은 일상의 풍경을 되찾았다. 잠시 뒤 이번에는 서울에서 온 기차가 들어오면 다시 수 백 명의 젊은이들이 또 떼를 지어 역사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들도 도착과 함께 역사 주변에 옹기종기, 때로는 넓은 공간을 차지한 일군의 무리로 모여 인원점검을 시작했다.

어쨌든 이제 휴가를 시작하기 위해 가평역에 도착한 젊은이들은 한껏 부풀어 있게 마련이어서 목소리도 평소보다 더 크고 웃음소리도 유난스러웠다. 개중에는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역에서 시간을 더 보내야 할 경우 아예 조별로 흩어져 게임을 하거나 심지어 댄스 배틀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평역은 아직 그들만의 공간이 아니어서 여러 사람들의 눈이 지켜보고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듯했는데, 마치 ‘1박2일’이나 ‘무한도전’의 멤버들처럼 스스로 여기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대체 왜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여름만 되면 이렇게 떼를 지어 엠티니 수련회니 하는 이름의 집단 모임을 가지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나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대학교에 다닐 때 나의 여름방학은 선교단체의 전국수련회를 시작으로 지역별수련회에다 심지어 학교별수련회까지 있었으며, 교회에서는 교회학교수련회와 청년부수련회까지 있었다. 물론 모든 수련회에 참석할 때도 있었는데, 결국 여름방학 두 달은 수련회 준비하고, 수련회 다녀오고, 수련회 뒤풀이하는 것으로 몽땅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 아침저녁으로 가을바람이 느껴질 때면 ‘나는 올 여름에 무엇을 한 것일까?’ 자문하였고, 대답 대신 빠르게도 흐르는 세월이 못내 아쉽거나 때로는 슬프기도 했다.

   
 

‘단합’이라는 이름으로
단체 수련회에서는 늘 ‘고문관’(주로 군대에서, 어수룩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 미군정 때 한국어를 모르는 미군 고문관들이 어수룩하게 행동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이라 불리는 낙오자가 한두 사람 등장한다. 그들은 대개 ‘단체생활 부적응자’ 쯤으로 분류되어 마치 결격사유라도 있는 사람처럼 취급받기도 한다.

“나는 수련회 부적응자였다”고 고백하는 ㄱ씨에게서 단체 수련회의 허점이 보인다.

“수련회에 모인 사람들은 잠시도 혼자 있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었다. 여러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희생되는 걸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나는 잠시라도 홀로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어서, 교회 수련회에 가면 아침마다 개울가나 조용한 장소에 나가서 홀로 있는 시간을 즐겨야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이미 아침식사가 끝난 뒤여서 함께 간 누나는 아침을 못 먹은 동생이 안타까웠던지 화를 내며 ‘너는 비정상이야’라고 말했다.”

ㄱ씨는 단합을 위해 자신의 ‘개성’을 억눌러야 했다. 사람들은 관계의 단절을 두려워하지만, ㄱ씨의 경우 관계 또는 단체에 둘러싸여 혼자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더 큰 두려움이다. 대중 속의 고독보다 고독의 부재가 가져다준 고통이다. 이들에게 단체 수련회의 계절 여름은 혐오스럽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는 여름마다 교인들의 인원점검을 해야 하고, 공동체훈련이라는 목표 하에 엠티를 떠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단합’은 언제나 선이고 ‘다양성’은 가끔, 그러니까 대부분은 단합의 힘에 장악되고 아주 일부에서만 선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의 교회문화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단합의 계절 여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 다양한 형태의 수련회를 통해 단속하고 교육해야 한다.

그러나 건강한 ‘단합’이란 ‘다양성’과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을 때이다. 엄기호 씨는 「단속사회」(창비 펴냄)에서 “자유의 최고봉은 무엇을 할 자유가 아니라 ‘함’으로부터 물러설 수 있는 자유”라고 말하며 “쉼을 통해서만 인간은 내면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18쪽). 자유로운 개인의 발견이야말로 근대의 가치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전근대를 살고 있거나 전근대로 회귀하는 중이다. ‘나를 좀 내버려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절규를 듣지 않고자 귀 막은 채 여전히 ‘일치’와 ‘하나 됨’을 위해 병영처럼 관리된다.

여기서 건강한 단합을 존중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모든 게 불편한 것과 마찬가지다. 핸드폰은 곧 관계이다. 그리고 우리는 핸드폰이라는 ‘관계’를 달팽이처럼 지고 다니는 사람이다. 심지어 ‘순례’라는 단어조차 그 뒤에 ‘단’이라는 ‘집단명사’가 붙은 형태로 널리 쓰인다는 사실을 보면, 우리는 모든 개인적인 것을 단체적인 것으로 전환해야만 비로소 편안해지는 사람들이다.

   

외로워지고자
여행이다. 단합을 위한 엠티의 강박으로부터 조금 벗어나는 일, 여행은 그 가능성을 열어준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은 외로워지고자 떠나는 여행에 대하여 말해준다. 여행이란 모름지기 낯익은 모든 관계로부터 떠나 외로움에 도달하는 일이 그 본질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여행의 안내자로 시인 샤를 보들레르를 초청한다. 보들레르는 평생에 걸쳐 항구 부두 역 기차 배 호텔방에 강하게 이끌린 시인이었다. 파리의 대기가 자신을 짓누를 때나 세상이 단조롭고 작아 보일 때 보들레르는 떠났다. 항구의 배를 보며 “배야, 나를 여기서 몰래 빼내다오!”라고 절규하는가 하면 또 이런 목소리도 들려주었다. “저들은 우리에게 소리 없는 언어로 ‘너희는 언제 행복을 향해 돛을 올릴 것이냐?’라고 속삭이는 것 같지 않은가?” 보들레르는 목적지가 어디든 좋았다. 그는 여행 그 자체가 욕망이었다. 그곳이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어디로라도 떠나는 것이었다.

보들레르와 함께 초대한 또 한 사람은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이다. 호퍼도 보들레르처럼 고독, 도시생활, 근대성, 밤이 주는 위로 등에 대해 공유하였다. 호퍼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혼자 앉아 있으며, 호텔 침대 가장자리에서 편지를 읽거나 바에서 술을 마신다.

여행은 떠나 고독해짐으로써 공동체를 그리워한다. 여행이 떠나는 데 본질적인 욕망이 있다면, 모든 여행은 귀향 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다. 떠날 때의 욕망은 외로움이라는 비에 맞아 깨끗이 씻긴 하늘처럼 맑은 상태로 돌아온다. 그럼으로써 공동체라는 구심력의 크기는 여행이라는 원심력의 크기로써 활력을 띤다.

여행은 나아가 숭고함이 주는 기쁨과 놀라움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은 영국의 시인 힐테브란트 제이콥Hildebrand Jacob의 글을 인용하며 잔잔하거나 폭풍우가 치는 넓은 바다, 석양, 절벽, 동굴, 스위스의 산맥 등에서 우리는 숭고함이라는 귀중한 감정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이런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하는데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229쪽) 등이 그것이다. 숭고함은 이처럼 종교로 연결되며, 조지프 에디슨의 말처럼 “전능한 존재의 관념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알랭 드 보통이 이 감정의 절정을 이야기하고자 욥기를 인용한 부분은, 적어도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매우 적절하다. 왜 의인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그 질문에 하나님은 욥의 눈길을 전혀 엉뚱한 데로 옮기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그날 새벽에 별들이 함께 노래하였고, 천사들은 모두 기쁨으로 소리를 질렀다. 바닷물이 땅 속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구름으로 바다를 덮고, 흑암으로 바다를 감싼 것은, 바로 나다.”(욥38:4-9) 숭고함이다. 여기서 인간은 얼마나 하찮고 연약한지를 깨닫는다.


다시, 떠나고 싶다
여름이 주는 불편한 기억들 저편에서 ‘여행’의 가능성을 생각한다. 지금 이 낯익은 곳을 떠나 외로움과 고독의 비로 나를 씻은 뒤 돌아오고 싶다. 숭고함이 주는 인간의 보잘것없음에 대해 뼈저린 공감을 한 뒤에야 다시 공동체 속으로 스며들고 싶다. 그래서 올 가을, 또는 내년 여름에는,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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