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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 말씀으로 일상을 채워라김지찬 교수는 나의 선의지로 계명을 완수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강조한다.
김은홍-김지찬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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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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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
김지찬 지음
생명의말씀사 펴냄



구약학자 김지찬 교수를 다시 만났다. 2008년 CTK 창간호에서는 사사 드보라를 주제로(쇠풀무 땅에서는 젖과 꿀을 먹을 수 없다), 2011년 새해 첫호에서는 사사기를 펼쳐들고서 우리 시대를 진단하는 대담(가나안 이방 풍습은 정작 이스라엘 백성 안에 있었다)의 자리에서 그를 만났었다. 다시 5년이 흘러 이번에는 ‘데칼로그’로 구약학자 김지찬을 만났다. 그가 최근 데칼로그: 십계명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생명의말씀사)를 냈기 때문이다. 학자는 학자로서 본분에 충실할 때 가장 아름답다. 그가 아름다운 이유다.

 

     

십계명과 ‘데칼로그’를 구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약성경은 출애굽기 20:1-17의 내용을 “십계명” 또는 “계명”이라고 부르지 않고, “열 가지 말씀”(히브리어로 ‘아세레트 핫데바림’)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데칼로그’decalogue란 이 “열 가지 말씀”을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한 ‘데카 로구스’에서 나온 말이다. ‘데카 로구스’라는 헬라어 두 단어를 영어로 음역하여 한 단어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굳이 ‘십계명’이냐 ‘데칼로그’냐로 명칭을 구분하는 것은 단순한 명칭의 문제가 아니라, 각각의 명칭이 십계명의 본질적 성격을 잘 드러내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명’이라고 부르고 이해해온 그것을 ‘말씀’으로 이해하고 보아야 한다는 관점의 취지는 십계명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전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십계명의 본질을 그동안 깊게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차가운 어감의 종교적 계명이나 도덕적 계명으로 이해를 하게 됐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것을 더 풍부하고 바르게 이해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계명’이 아니라 ‘말씀’으로 볼 때 그 본래 의도와 의미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십계명은 ‘윤리’가 아니라 ‘진리’다. 십계명을 진리로 보고 그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의도한 참 행복과 기쁨,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윤리로 보면 인간을 억압하는 계명이 되는 것이다. 십계명은 억압과 강요가 아니라 자유로 풀어야 한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윤리가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계명을 주시는 맥락을 보면 ‘말씀’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낸 다음에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고 내 소유가 되리라”(출19:5-6)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물론 십계명 자체가 하나님의 엄위 가운데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움을 느낀 것이 사실이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고 ‘대화’이며 ‘의사소통’이다. ‘일방적으로 주어진 계율’이 아니다.

 

십계명 중에서 동양적 세계관과 가장 친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인 것 같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본래 맥락에서 분리한 제5계명은 말씀이 아니라 유교의 효 윤리와의 이종 교배에서 태어난 ‘비非 말씀’ 또는 ‘유사 말씀’이 아닐까?

어릴 적에 나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집안의 가장으로서 책임 있는 행동을 안 하시는 걸 보면서 말이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끊임없이 나에게는 숙제였다. 대학시절에 “유교적 효 윤리의 기독교적 조명”이라는 논문을 대학생 논문 경연대회에 출품했다. 서울 예선에서 뽑혀 전국 본선에 올랐는데 논문의 요지는 ‘유교적 효 윤리는 괴물로서 기독교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과 효 윤리를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시절이었기에 효 윤리는 부담스럽기 그지 없는 괴물이었다. ‘부모가 3년 동안 자식의 어린 시절을 돌봤으니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은 3년간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지내야 한다’는 식의 효 윤리는 내게는 너무 비인간적인 ‘괴물’이었다. 그냥 논문 한 편 잘 써서 상 받으려고 잡은 주제가 아니라, 나에게는 그야말로 실존적인 문제였다.

그 후에 구약을 공부하면서 프랑크 크뤼제만이라는 독일 학자의 견해에 공감하게 되었다. “십계명의 대상이 누구인가? 10대가 아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보자. 10대에게 아내가 있는가? 그러므로 십계명은 기혼 30, 40대 가장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공경의 대상인 부모는 70, 80대다. 한 마디로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어진’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제5 계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는 크뤼제만의 주장은 개안의 체험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성경 본문을 보니 이는 해방이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부모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을 자녀에게 물려준 분들이다. 또한 부모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날들”을 살도록 생명을 전해 주신 분들이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분이자 생명을 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그러면 부모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자라난 10대 아이들이 커서 부모를 공경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노년에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데칼로그의 가르침이다.

 

“괴물”이라는 표현이 참 적절한 것 같다. 십계명 증에서도 우리가 특별히 오독하거나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열가지 계명 전부 다라고 할 수 있다. 나도 십계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예를 들어,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자.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간음하지 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본문을 보면 이웃의 가정을 보호하는 것이 간음 금지의 핵심 요지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 데칼로그의 가장 중요한 의도 가운데 하나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적극적 계명 이전에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십계명을 해석해야 한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이 책은 일상의 살인, 일상의 간음, 일상의 도둑질, 일상의 거짓말을 진지하게 지적한다.

구약학자로서 본문을 볼 때 다른 전공의 학자들보다 십계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데칼로그에서 “살인하지 말라”라고 할 때 쓰인 동사 ‘죽이다’는 히브리어 ‘라차흐’다. 그런데 이 동사는 ‘죽이다’를 뜻하는 구약의 다른 흔한 동사들―‘하라그’와 ‘헤미트’―에 비해서 자주 쓰이지 않는 동사이다. 굳이 데칼로그에서 흔하지 않은 이 동사를 쓴 이유는 이 ‘라차흐’ 동사가 고의든 과실이든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야기하는 일체의 살인행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칼로그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의 그 살인에는 간접살해, 처녀성을 빼앗는 혼의 살인, 인격 살해 등을 모두 포함한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는 예수님의 말씀도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데칼로그의 원래 의도를 생각하면 얼마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율법주의와 방종, 우리는 그 사이 어디쯤에서 어정쩡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경우를 보면 목적어가 없다. 히브리 동사에 목적어가 없다는 것은 그 대상에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다. 간접살인도 안되고 처녀성을 빼앗는 것도 안 되고 합법적인 것을 가장한 살인도 안 되고…자살도 안 된다. 그렇다면, 전시 상황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가능할까? 사실 주류 교회는 ‘정당 전쟁’을 수용한다. 그런데 정당 전쟁 이론은 정당한 전쟁의 조건을 굉장히 까다롭게 규정한다. 심지어는 정당 전쟁 안에서도 어떻게 전쟁을 수행해 낼 것인가의 문제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포괄적인 말씀이 효력을 미쳐야 한다. 정당 전쟁의 요건에 부합한 그런 전시 상황이라 하더라도 민간인 학살이나 대량살상 무기 사용은 과연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자유로울까? 그런 면에서 나는 이것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부분들을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또 많은 자유를 주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또,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거룩하게 지킬 것이냐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수많은 방법을 얼마든지 취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율법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말씀을 자유롭게 지킬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율법주의로 치우치거나 방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셨다. 놀라운 역전이다. 직관적으로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적인 반추와 상상력을 요구하는 해석이다.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다고 하면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기준’으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다. 물론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절대 볼 수 없는 분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보고도 살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이다. 어찌되었던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은 예외이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형상이 아니라 음성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가시적인 피조세계 안에 비가시적인 하나님이 어떻게 내재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셔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 자신을 대표하고 재연하는 가시적인 대리인으로 우리를 만드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우리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이기 때문에, 데칼로그는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가시적인 형상으로 우상을 만드는 것, 즉 무엇을 하는 죄(“작위의 죄”)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지 않음으로써 죄를 범할 가능성(“무작위의 죄”)이 더 크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드는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내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진리에 대한 침묵이 무작위의 죄에 해당할 것이다. 절반의 진실만 말하는 것은 절반의 거짓말이 아니라, 완전한 거짓말이다.

어떻게 보면 완전한 거짓보다 ‘유사진리’가 가장 위험하며, 더 악랄하다. 이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우리는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고 윤리적으로 강조하는 우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강조한다고 해서 거짓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교회가 펠라기우스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어 걱정이다. 거짓말에서 벗어나려면 긍정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과거의 신앙의 선배들에게 배워야 한다. 왜 그들이 찬양과 기도를 그렇게 강조하였는가? 거짓말하지 말자고 결심하기 보다는 우리의 입에서 찬양과 기도가 지속적으로 나와야 비로소 거짓의 언어, 거짓의 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의 경우에도 예배드리고 말씀을 암송하고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거짓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밀어낼 수 있는 것이지,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방식으로는 거짓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채워야 유혹이 안 들어오는 것이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느냐 안 품느냐 이런 문제도 어디까지가 음욕이냐라는 문제로 논란할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어떻게 해야 충만하게 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아내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면 음욕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게 된다. 이것이 어거스틴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15 문답이 인상적이다. “문: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토록 십계명을 설교하게 하십니까? 답: 첫째, 평생 동안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더욱더 알게 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의로움을 더욱더 간절히 추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둘째,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목적지인 완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더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 성신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이다.”

이 책에서 거듭 강조했듯이, 데칼로그는 우리를 옥죄려는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 헌장이다. 데칼로그를 다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데칼로그를 통해 우리의 죄성을 깊이 깨닫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총을 갈구해야 한다. 이렇게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데칼로그를 시내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이 땅의 우리에게 주신 이유이다. CTK 2016:11

[게시: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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