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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특권을 누리는 우리답게이풍인 목사는 우리가 히브리서를 절반만 알고 있다고 말한다. 나머지 절반에 놀라운 은혜가 있다.
김은홍-이풍인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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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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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히브리서 설교자가 시간이 부족해 더 말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영웅담을 들으면서 우리는 자랐다. 교회 좀 다녔다는 그리스도인치고 히브리서 11:1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믿음 장”에서 교훈을 얻고 믿음을 다져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리고 저 믿음의 사람들 앞에서 항상 기가 죽는다. 그런데, 여기까지라면 히브리서를 절반 밖에 못 본 것이라고, 히브리서 강해: 은혜와 책임의 저자 이풍인 목사는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핵심 결론을 놓치고 있으며, 이 결론에서 도출되는 권면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히브리서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만 생각하면 항상 기가 죽는 우리에게 새 언약 백성으로 사는 특권을 말해준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이 온전하게 될 수 없다’는 엄청난 선언을 통해 구약성도들이 멀리서 바라보았던 새 언약의 실체를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만이 아니다. “더 큰 은혜를 입은 우리에게 더 큰 책임도 있다”고 히브리서는 강조한다. 이풍인 목사와 함께 히브리서가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와 더 큰 은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히브리서 강해:은혜와 책임
  이풍인 지음
  킹덤북스 펴냄

 

이 책의 부제가 ‘은혜와 책임’이다. 우리는 은혜에서 그친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만, 책임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삶을 통해 돌려드려야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히브리서는 우리가 삶의 자리 곧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강하고 분명하게 권면하는 성경인 것 같다.

히브리서에는 ‘청유형’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그 강도도 다른 성경에 비해 매우 세다. 히브리서는 중간지대를 남겨두지 않는다. 은혜 입은 자답게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둘 중에서 선택할 것을 촉구한다. 권고와 경고의 메시지가 어마어마하게 강력하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의 제사로 피 흘렸다. 다른 제사는 없다. 이제 다른 기회는 없다. 이런 표현들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가장 많이 부족한 부분이 아닐까?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서 동감한다. 성도들에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을 제대로 못 전하는 경향이 굉장히 강하다. 두려우니까 그렇다. ‘이렇게 전했을 때 반응이 어떨까?’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가 타협하는 경우가 많다.

 

값싼 은혜라는 말조차도 흔한 표현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성도의 책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히브리서가 이야기하는 은혜란 무엇인가? 그리고 히브리서는 책임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은혜란 한마디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옛 언약과 관련된 어떤 것과 비교해도 훨씬 더 우월하다. 율법을 전해준 천사들보다 더 낫고, 옛 언약 백성들을 인도했던 지도자인 모세보다도 낫다. 그리스도는 동물제사를 관장했던 이 땅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하고, 그들이 드린 제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완전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다. 동물제사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었던 우리의 양심과 마음에 있는 근원적인 죄를 없애 주셨다. 내면에 일어난 변화, 이것이 가장 큰 은혜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음과 양심이 깨끗해져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더 큰 은혜를 입은 신약의 성도들은 은혜가 주는 자유를 만끽하며 방종의 삶을 살아도 되는가? 아니다. 구약의 성도들과 비교할 때 더 큰 은혜를 입은 우리는 더 큰 책임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면의 변화를 경험한 성도는 외적인 모습에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품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기에 새 언약의 성도들은 자신의 마음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너무 쉽게 ‘은혜 받았다’고 한다. 기복적 화법의 값싼 추임새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다. 자기만족의 표현일 때가 많다.

 

이 책의 차례에 반영된 히브리서의 짜임새를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모세보다 뛰어난 인도자이신” “레위보다 우월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설명한 다음에 성도를 향한 권면이 뒤따르는 구조다. 히브리서가 이야기하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말하자면, 히브리서의 기독론이 성경의 다른 기독론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인가?

히브리서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히브리서는 시편 110:4을 인용[히7:17]하고 설명하는 유일한 신약성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시편 110: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은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암시되는 구절인데, 바로 뒤의 4절은 히브리서 외에는 언급하는 곳이 없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하늘의 대제사상이심을 연결하여 왕적인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을 그려나간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가장 독특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서의 첫 청중은 대제사장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대제사장이라는 히브리서 설교자의 메시지에 깜짝 놀랐을 것 같다. 아마도 구약의 익숙한 용어와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어?’ 하고 놀라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의 저자는 히브리서의 장르를 ‘설교’로 본다. 따라서 이 인터뷰에서도 ‘히브리서 저자’ 대신 ‘히브리서 설교자’라 적는다.]

히브리서 5~7장에서 예수님의 대제사장이심을 집중적으로 다루는데, 기본적으로 히브리서 설교자가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다’라고 이야기할 때 청중 가운데 어떤 부담 혹은 거부감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는 대제사장이 될 수 없는 계보에서 나셨다는 것은 히브리서 설교자도 청중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바가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고, 또 그의 장인 안나스도 전직 대제사장으로 생존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 히브리서 설교자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시라고 선포한다. 오히려 약점일 수도 있는 족보 이야기를 세 번이나 꺼낸다. 7장의 멜기세덱 이야기가 그렇고, 예수님은 레위가 아닌 유다 지파에서 나셨다(히7:14)거나 이 땅에서라면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히8:4)는, 빤히 아는 사실을 툭 던지면서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이시다”라고 선언한다. 그의 설교를 듣고 있던 청중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이다. 초대 교부 히폴리투스는 히브리서의 이 부분이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이 제사장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예수님의 모계 쪽을 팠다. 그는 히브리서 설교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오히려 당당하게 ‘예수님은 이 땅에서는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더 나은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이다’라고 담대하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이심에 이와 같은 역동성과 깊은 의미가 있음을 오늘의 히브리서 청중도 같이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구약의 제사를 신약시대인 오늘의 예배의 유비로 사용하는 데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브리서를 읽는 많은 독자들이 히브리서의 제사는 구약 제사의 완성이라는 개념으로 많이 이해한다. 연속성에 무게를 두려는 경향이 굉장히 강한데, 히브리서는 이것을 최대한 피해 가려고 한다. 구약 제사의 규정 하나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계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식의 이해에 대해서는 선을 확실하게 긋는다. 구약의 제사와 그리스도의 제사 사이에 유사한 면도 있지만, 히브리서는 다른 점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한다. 그 다른 면의 핵심은 히브리서 설교자가 10장에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는 시편 40:6-8을 인용하며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님의 제사는 구약의 동물제사에서는 찾기 힘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내면의 순종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러기에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도 단지 예배의 자리에 있음으로 만족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필요하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 설교자들이 선호하는 성경구절의 하나다. 이 책에서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해석이 있는, 즉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라고 했다.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나뉘는 구절이다. 종교적인 경험을 통해 이 세상에 대해서는 초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자는 뜻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고, 유대교와의 단절할 것을 강조하는 메시지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나는 이 둘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13장 초반에서 형제사랑, 손님대접, ‘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라’고 권면한 뒤에 13절에 이 권면이 이어진다. 따라서 예수님이 치욕을 당했던 그 자리, 예수님의 수치와 고난이 있는 그 자리로 나아가자는 것은 곧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삶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두 방향의 나아감을 강조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기도와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치욕을 지고 영문 밖,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 곧 설교자를 어떤 정황에 있는 어떤 사람으로 상상하는가? 말하자면, 어떤 설교자로 상정할 때 히브리서의 메시지가 가장 생동감 있게 이해되고 전달될 것 같은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목하기는 어렵겠지만, 신앙의 연륜이 굉장히 깊은, 그리고 어느 정도는 연세가 많은 교회의 지도자가 아닐까? 그래서 과거에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겪었던 고난까지도 다 알고 있는 분, 10장 후반부에 나오는 옥에 갇히고 재산 몰수당하고 하는 그런 아픔을 본인이 겪었을 수도 있고 공동체와 함께 생생하게 목격했을 수도 있는 그런 분, 고난을 함께 견뎠고, 다시 닥친 위기와 핍박 앞에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보이고 영적으로 느슨해진 사람들도 있는 그런 상황에서 그 사람들에게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노인이 권면하는 그런 그림으로 그려진다. 토머스 롱이라는 학자도 나와 비슷한 상상을 했다. 나이 많은 백발의 노인이신 교회 지도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마지막 권면과도 같은 메시지를 토해낸 것이 바로 히브리서라고.

우리가 가는 신앙의 길, 천성을 향해 가는 길은 결코 편하지 않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순례길이다. 이런 상황에서 더 잘 다가올 수 있는 그런 설교자, 그런 메시지, 그것이 히브리서다.
 

히브리서 11장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아마도 성경 전체에서 가장 익숙한 본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을 절반만 보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가장 오해하는 부분이 특히 11장이다. 히브리서 중에서 가장 잘 아는, 가장 대중적인 장인데 반쪽 밖에 모른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11장의 핵심은 39-40절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들이 우리를 통해서 온전해진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말씀이다.

이 두 절은 우리로 하여금 히브리서 11장 전체를 다시 보게 만든다. 믿음의 선진들인 ‘그들은’ 옛 언약에 거하면서도 믿음으로 잘 살았고 실체를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잘 살았다. 그렇다면 이미 약속을 누리고 있고 실체를 본 ‘우리는’ 정말 더 잘 해야 한다. 마치 이어달리기의 마지막 주자처럼 새 언약 백성인 우리가 결승선을 잘 통과해야 이전에 달렸던 경주자들의 달음질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와 같은 믿음의 경주를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즉 믿음의 선진들이 응원하고 있다 (12:1). 이러한 생각은 히브리서 4:2에도 나온다.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번역이 헬라어 원문과 아주 다르게 되어 있는 구절이다. 원문을 살려 번역하면,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들은 자들과 믿음으로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은 광야세대 옛 언약 백성이고, ‘들은 자들’은 새 언약 백성인 우리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는 새 언약 백성의 특권과 고귀한 지위에 대해 알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옛 언약적인 사고에서 탈피하는데 히브리서는 큰 도움을 준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공부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여기 있다.

 

히브리서 11장 외에 설교자들이 오해하고 오도하는 부분이 또 있다면?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의 제사를 이해할 때 구약제사와 그리스도의 제사의 유사성에 관심을 많이 기울인다. 물론 비슷한 부분도 많다. 그러나 아주 다른 점에 대해서도 히브리서 설교자는 분명하게 강조한다. 옛 언약, 옛 제사 시스템을 이야기할 때, 7:11, 18; 8:7, 13; 9:9, 10; 10:1, 4에서 “불가능!” “다 폐하여졌다!” 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 메시지들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구약 제사의 완성 개념 안에서 히브리서를 본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새 언약은 옛 언약을 약간 수정하고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이 차이 속에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가 담겨 있다.

 

개별 그리스도인의 삶보다 공동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훨씬 더 빈약하고 허약하지 않나 생각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교회 안에 전무하거나 희소하기 때문인 것 같다.

히브리서에 “너희 중에” “피차” “서로” 이런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공동체를 전제하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지체 개념이 히브리서에는 정말 잘 드러나 있는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것이 약화되어 있다. “우리”라고 하는 단어는 모두 “나”로 바꿔 읽다 보니까, 모든 성경을 읽을 때, 공동체적인 돌봄이 매우 희박해졌다. 교회 안에서는 물론이고 사회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드러낼 것이냐 하는 가르침과 훈련이 약하다.

교회 안에서나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싸울 수 있도록 계속해서 권면하고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교회를 위한 일꾼을 키우는 데만 열중했다. 히브리서 설교자가 역설하듯이, 이제 각자 자기 자리에 가서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고 훈련하고 가르쳐야 한다. CTK 20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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