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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처럼 우뚝 일어서 본 적 있는가
송길원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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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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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의
행가래 幸家來

‘너닭대가리 맞지?’ ‘그 녀석 저거 닭고집인거 몰랐어?’ ‘닭살이닭!!!’

어쩌다 닭이 이렇게 비아냥거림의 소재에다 비호감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일까? 발음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던 ‘병신년’이 가고 ‘을유년’乙酉年이 눈앞에 와 있다. 닭의 해다.

닭은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었다. 무엇보다 혼례의 자리에서 부부 축복의 심벌이기도 했다. 그뿐일까? 삶이 팍팍하고 가난하던 시절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했고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먼 여행길을 떠나는 객의 동반자였고 새벽을 깨우는 자명종이었다. 집안의 파수꾼에다 파리나 모기의 유충을 잡아먹는 방역관 역할까지 톡톡히 해 냈다.

더구나 닭은 다섯 가지 덕을 갖춘 동물로 칭송되었다. “옛 사람들은 닭의 벼슬을 보고 머리에 쓰는 관을 닮았다고 해서 ‘문’, 발톱은 ‘무’, 적을 앞에 두고 용감히 싸우는 것은 ‘용’, 먹이를 보고 무리를 부르는 것은 ‘인’, 때를 맞춰 새벽을 알리는 것을 두고 ‘신’信의 덕목을 두루 갖춘 것으로 봤다.”(천진기, 국립민속 박물관 학예연구관)

이런데도 ‘닭대가리’니 ‘닭고집’이니 ‘닭살’이니 하니 닭도 많이 억울하지 싶다.

새해부터 뜬금없는 십이지 이야기냐고? 이어령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과연 한국인은 내일을 잃은 민족인가? 아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모레’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일은 한자말이지만 그보다 더 먼 미래를 뜻하는 모레는 순수한 우리 토박이 말이다. 모레뿐인가? 글피도 그글피도 모두가 우리 고유어다. 그냥 고유어만이 아니다. 세상에 그 많은 말이 있어도 글피에 그글피까지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는 없을 것 같다.”

백번 옳다. 언어만이 아니다. 시간을 헤아리는 관점이 서양과는 사뭇 달랐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의 해시계, ‘물도둑’이라 불리던 그리스의 물시계 클렙시드라, 7세기 프랑스 수도승이 발명한 모래시계, 어둠을 밝혀 주며 시간도 함께 알려 주었던 등유시계… 그들이 해시계와 물시계에 시간 눈금을 그려내며 하루, 한 달, 일 년 같은 시간 단위와 달력을 만들고 있을 때 우리는 중국의 율력 체계에서 사용되는 간지에서 뒤쪽에 붙는 열두 가지를 헤아렸다. 12년을 한 주기로 보았다. 스케일이 달랐다. 거기에다 동물을 하나하나 그려냈다. 이 얼마나 기발한 발상인가?

십이지에 온갖 상상이 보태졌다. 시간은 이야기로 태어났다. ‘시간에 시간을 주는’ 시간에 대한 호의였다. 해마다 시간은 다른 존재로 다가왔다. 시간 앞에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쓰고 희망을 새겼다. 자신의 정체성에 생명을 부여했다.

더구나 닭은 기독교의 중요한 상징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에 1930년대까지 말라리아가 유행했다. 1910년대까지 약방이 별로 없을 때, 예수교를 전하는 권서는 쪽복음과 함께 금계랍(金鷄蠟, 어떤 경우에는 金鷄納으로 표기)을 팔았다. 약을 사는 지방 도시와 시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금계랍과 복음서를 함께 샀기 때문에, 복음서나 예수교를 생각하면 금닭(金鷄)이 연상되었을 것이다. 용 부적을 태워 물에 마시던 학질 환자들이 금계랍을 먹고 낫자 복음서를 읽게 된 것이다.”(옥성득 교수)

한마디로 말해 치유의 상징이었다. ‘이런 닭을 천대하는 인간들에게 화가 있을진저…’ (닭복음 1:1. ‘복음’을 경솔히 여긴다느니 제발 그러지 마시길. 웃자고 하는데 죽기로 덤비지 마시길.)

2016년의 화제작이었던 영화 〈곡성〉으로 눈길을 잠시 돌려보자. 평론가 이동진의 말이다(이동진의 ‘어바웃 시네마’). “곡성의 전편에 짙게 깔려 있는 것은 무지에 대한 탄식과 무력감이다. ‘뭣이 중한지도 모르면서 캐묻고 다니는’ 종구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경찰은 뒷짐을 지고 종교는 팔짱을 낀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예수의 말씀을 신봉해야 할 가톨릭 신부는 종구에게 ‘직접 보지도 않고 어떻게 확신을 하십니까’라고 책망하면서 ‘의사를 믿고 맡기라’고 말한다.) 환자의 이상 증세 앞에서 서양의학은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고 한의학은 술 좀 그만 마시라고 한가롭게 타박한다…인간은 자신에게 무력하고 타인에게 무지하다.”

곡성에는 곡소리만 있는 게 아니다. 살아 있을 때와 죽어있을 때가 확연히 다른 금어초, 죽음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할머니, 무당과 굿 그리고 까마귀, 신부 같으면서 신부가 아닌 신부神父… 여기에다 감독은 ‘세 번의 닭 울음’(배신자 베드로는 닭 울음에 자신을 발견하고 돌아선다)을 집어넣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닭이 깨우치는 인간의 무지는 한 둘이 아니다.

닭은 풀어놓아도 어김없이 때가 되면 제 집을 찾아온다. 시간이 되면 정확하게 시보를 알린다. 이런데도 과연 ‘닭대가리’일까? 닭은 “쪼는 순서”pecking order라 하여 먹는 데도 순서를 지킨다. 한번 정해진 순서는 평생을 가도 변하지 않는다. 이런 닭의 신념이나 지조를 지키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닭은 유방(젖가슴) 없이도 체온으로 알을 품어 생명을 잉태한다. 더구나 수탉끼리는 싸워도 수탉이 암탉을 쪼는 일도 암탉이 수탉에게 달려드는 일도 없다. 이것이 닭의 금슬琴瑟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닭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닭의 벼슬은 귀족noblesse을, 달걀은 의무oblige를 나타낸다)의 대명사다. 들 닭이 3000여 년 전 동남아 지역에서 인간에게 길들여진 이후, 닭은 인간에게 아낌없이 주는 가축이 되었다. 손님 접대용과 종교적 제물로만이 아니다. 단백질이 풍부한 고기와 달걀로,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침낭용 닭털로 우리를 감싼다. 심지어 포장마차의 안주감이 되어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달래준다. ‘나’만 있고 ‘남’이 없는 인생들은 닭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병아리를 부화하는 것이 노른자일까? 흰자일까? 흰자다. 노른자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또 있다. 어린아이 완력으로도 쉬 깨뜨려질 만큼 약하지만 세로로는 절대로 깨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달걀의 신비는 한 둘이 아니다. 달걀은 결코 일어서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오뚝이의 기적이 달걀 속에 있다. 흰자의 알눈이 생명으로 자라기 위해서 언제나 노른자의 위쪽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쩌다 알이 뒤집히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 때 노른자의 자리가 변하지 않게 하는 탄력성 있는 두 개의 끈이 노른자를 감아 알막의 양쪽 측벽에 이어 댐으로써 노른자를 매어 달게 된다. 알이 움직이는 데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 이 알끈이 있어 알눈은 오뚝이처럼 언제나 제 위치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양평의 ’청란교회‘를 가보라. 세계에서 제일 작은 원형교회의 크기만이 아니라 법궤 오르간이 주는 공명의 세계는 신비롭기 그지없다.)

새해가 왔다. 아니 닭이 달걀로 찾아왔다.

다시 듣고 싶은 소리가 있다. 역사驛舍에서 기차 안에서 울려 퍼지던 그 소리, “삶은 달걀이요.”

맞다. ‘올 한 해 만이라도 삶이 달걀 같을 수만 있다면…’

“달걀 함부로 먹지 마라. 너는 달걀처럼 우뚝 일어서 본 일 있느냐?” CTK 2017:1/2

송길원 가족생태학자,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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