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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K 올해의 책우리 교회를 지금을 돌아보면, 우리 교회의 나아갈 바를 몸소 드러내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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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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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위한 교회, 세이비어 이야기
Inward Journey, Outward Journey(1968)
엘리자베스 오코너 / 조성돈 해설, 전의우 옮김(IVP)





 
 
 

“세이비어 교회는 ‘성육신적 교회’로 살고 있는 교회다. 그 이야기를 말해주고 보여준다.”—강은수

“너무 중요한 책. 그러나 너무 늦게 온 책. 그래서 더 늦지 않도록 읽어 마땅한 책!”―김기현

“오래오래 기다린 책. 그러나 아직 실현되지 못한 교회의 전범.”—김진형

“광역화한 한국 사회이지만 한국 교회는 지역을 품고 섬기라는 요구 앞에 여전히 직면해 있다. 세이비어 교회는 주소지가 분명치 않다고 한다. 건물 안에 갇히지 않고 필요한 사역을 흩어져 감당하기 때문이다. 세계 교회가 탐구하고 모델로 삼을 만한 세이비어 교회의 정신과 사역을 한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도전해 줄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김현호

“2005년에 유성준 목사가 쓴 「세이비어 교회」(평단문화사)가 거대한 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비이어 교회를 일목요연하게 알게 해준다면, 이 책은 주님의 긍휼한 마음으로 지역사회 속에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게 찾아가는 사역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들이 몸으로 가슴으로 사회적 섬김에 더욱 분발해야 할 시대적 요청에 좋은 길잡이 되는 책이다.”—유종성 CTK 2017:1/2

 

내면을 담금질하라! 세상을 구하라! 세상을 위한 교회, 세이비어 이야기에서

우리는 내적 여정에 늘 힘을 쏟듯이 외적 여정에도 힘을 쏟는다. 그래야 내면과 외면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에게 의미가 있으며, 서로가 가능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지 않을 때, 자기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 우리가 자신과 소통하는 일이 전에 보지 못한 이웃을 볼 수 있도록 지평이 넓어지는 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자신과 맺은 약속을 재점검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마땅히 세상의 필요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도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공동체가 거짓된 안전에서, 몸을 사리는 의견에서, 뻔히 알려진 길에서 우리를 건져 내지 않으면, 우리는 그 공동체에 쓴 소리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 공동체가 배신했기 때문이다.

   
 

내적인 삶을 키우는 목적은 자신에게 비밀스런 유익을 안겨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조용한 아침 시간에 자기 내면에서 아늑한 자리를 찾는다고 해도, 사람들이 살아가며 부대끼는 현장에서 그 아늑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곳에서 한 말과 그곳에서 빚어진 우리의 모습이 바깥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결국 그 일은 중요하지 않다.

내면의 고요함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외부의 사건과 연관 시키기란 결코 파악하기 쉬운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인생의 단계마다 다르게 이해되기도 한다. 스무 살에는 삶의 물줄기가 외부로 흐르기가 더 쉽다. 마흔은 균형을 이루는 때고, 예순은 삶의 물줄기가 내면을 더 향하는 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화는 위험할지 모른다. 모든 삶의 물결은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스무 살 때, 마흔 먹은 사람은 듣지 못하거나 절대 듣지 않는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신중함을 배울 때에만 유익한 분류다. 신중해질 때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갈망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짐을 지우지 않게 된다. 그뿐 아니라, 내면세계를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노인들에게도 짐을 지우지 않게 된다.

부르심이 전혀 들리지 않거나, 들리지만 반응하지 않거나, 반응하더라도 순종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하고 내적인 삶을 성장시키는 방향과 틀을 제시하는 것은 지금까지 교회의 일이었다. 그러나 몇몇의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교회는 이런 일을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렸다. 진정한 자아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할 때, 개신교에서 도움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 당신이 이러한 내적 여정에서 길잡이를 찾고 있는데 아주 운이 좋게도 자신이 다니는 교회나 사는 도시에서 길잡이를 찾았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그는 스케줄이 하도 빽빽해 당신과 수년간 지속될 관계를 시작하기는커녕 30분간 짬을 내 대화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목회자에게 이 역할을 기대하는 게 자연스러울 테지만 이런 역할을 감당할 만한 목회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더욱이, 목회자들은 겨우 이십 대에 교회를 맡는다. 나이가 지긋하고 내적 여정에서 길잡이 역할을 해 줄 법한 교인들도 여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신학교에서 자신이 지도자라고 배워 온 젊은 목회자는 ‘의로운 회중’ 앞에서 자신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한다.

급진적인 새 바람이 몰아치지 않으면, 계속해서 이 세대는 교회가 알고 있는 경건 생활의 많은 부분이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내적 여정이라고 여길 것이다. 교회가 내면과 외면 간의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면 구제 프로그램과 인권 시위와 지역 조직에 성급하게 참여하고, 세속 도시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숨 가쁘게 찾게 된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세속 도시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거나, 교회가 거기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섬뜩한 진실이다. 교회 여기저기서 이러한 진실을 아는 고통의 신음이 터져 나오면서, 우리는 ‘출애굽을 이끄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지자적 목소리와 삶이 ‘짓밟히는’ 곳이면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목소리를 함께 낸다. 우리는 이 진실을 뒤늦게야 깨닫고는, 뒷걸음질 치면서 세상을 보고 한사코 과학과 맞서려 들며 물질은 거룩하지 못하다고 외치는 종교의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카를 융은 어디선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부분을 희생하는데, 그 부분이 오랜 후에 되살아나 칼을 든 채, 자신을 희생시켰던 대상을 희생시키려 든다.” 세상일에 발을 빼는 데서 참여하는 데로 강조점이 이동하면서, 교회의 외향적 움직임에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여기저기서 칼이 기도를, 내적인 삶을, 수양의 시간을, 하나님을 위협하지 않는가?

내면이 절대로 외면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외면도 절대 내면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변화는 결코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집이 있고 곳간에 양식을 쌓아 둔 사람들은 이것들이 우리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하며, 우리 삶에서 안정제를 내던져 버리게 하지도 못한 다는 것을 안다. 가난한 사람들도 집이 생기고 곳간이 생기면, 이것을 알게 된다. 진자의 추는 발을 빼는 쪽으로, 수많은 종교의 대용품 쪽으로 움직이고, 교회는 이러한 흐름을 따라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칼이 다시 일어날 테고, 이번에는 외면을 겨냥할 것이다.

―이 글은 세상을 위한 교회, 세이비어 이야기의 일부(65~57쪽)이며, IVP의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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