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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와 더불어 살기테러가 만연한 현대사회에서
김기현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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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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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한 젊은 친구가 무려 80명에 가까운 사람을 살해했다. 그 입가에 번지는 미소와 눈에서 빛나는 확신은 소름끼치다 못해 경악스럽다. 테러의 이유는 조국에 무슬림이라는 이교도들이 판을 치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에 대해, 테러에 대해 숙고하도록 요청한다. 무엇보다도 나와 다른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묻는다. 이것은 곧 복음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과 같다.

   
 

복음은 용서다. 하나님은 당신의 원수인 우리를 용서하셨다. 비유하자면, 누군가 나의 자녀를, 또는 내가 누군가의 자녀를 그토록 무지막지하게 욕보이고 죽였다면 그야말로 철천지원수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한 하늘을 이고 같이 살 수 없다. 보복은 당연하고 신성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한 일이 동일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처단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진노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원수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어쩌자고 우리를 용서하신 것인지. 그것이 복음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폭력적으로 심판하지 않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용서하시고, 비강제적으로 초청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원수를 대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이다.
 

예수는 원수들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중략) 그가 온 목적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외딴 은둔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원수들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사명과 일이 있는 것입니다.(「신도의 공동생활」, 대한기독교서회 역간)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 이들에게, 그리고 나의 원수들에게 그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사명이 있다. 우리에게는 누군가가 원수이고, 우리는 또 누군가에게 원수이다. 하여, 우리는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아야 하고,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 원수에 대한 성경의 개념과 예증은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원수를 예수님의 방식으로 조우하는 것은 제자도이자 영성의 핵심이다. 

 

그래서 나는 월터 윙크의 이 말을 퍽 자주 인용하고 곱씹어보곤 한다. “오늘날 궁극적으로 중요한 종교적 질문은, 종교개혁 때의 질문이었던 ‘내가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원수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이다”(「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한국기독교연구소 역간). 하나님의 원수였던 내가 내 원수를 하나님이 내게 해주신 방식대로 대우하느냐 여부가 바로 내 신앙의 바로미터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기독교인입네 거들먹거리며 테러를 일삼는 이들은 애써 십자가의 진실에 눈을 감는다. 십자가는 말한다. 너는 용서받았다! 너는 용서해야 한다. 이것은 당위나 명령이 아니다. 사랑받은 자가 저도 모르게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냥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았던 사람이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였다. 용서받고도 용서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가 유죄일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이유이다. 용서받은 자는 용서한다.

불행하게도 역사는 교회 안에 테러범 브레이빅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십자군전쟁과 종교재판이 그랬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타인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했고, 종교적으로 승인하고 지지했다. 타인의 신념과 신앙을 무시하는 것을 마치 독실한 신앙인 양 착각하곤 한다. 그들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별개인데도 말이다.

이런 교회의 모습이 어디서 기원하느냐를 두고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한다. 하나는 성경 자체에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종종 폭력과 전쟁을 일으키는 분으로 묘사한다. 때문에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도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성경은 결코 폭력적이 아니라고 확언한다. 구약 텍스트를 세밀하게 읽으면 오히려 인간의 살상을 중지하고 평화를 이루라는 것임을 확인한다. 교회와 우리가 복음을 악용했다. 그럼에도 성경을 우리 식으로, 그러니까 우리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읽고 있다는 지적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니까 말이다.

때문에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성경을 빼앗으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의 철저한 평화주의를 따를 의도나 의사가 없이 읽는 것은 백해무익이 아니라 해악이라 했다. 허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평화의 복음이다. 성경은 우리의 해석의 선입견이나 욕망을 능히 꿰뚫고 분쇄하는 능력이 있다(히 4:12). 성경이 아니라 우리가 문제이므로, 성경이 우리를 변화시키기까지 읽고 또 읽을 일이다.

다른 하나는 성경이 아니라 역사적 왜곡으로 보는 견해다. 평화의 신앙이 변질된 결정적 분기점은 콘스탄틴이다. 단적으로 그의 십자기를 보면 안다. 콘스탄틴의 십자기는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죽여 남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하는 하나님의 길이라면, 십자기는 자기 살자고 남도 죽이고 나도 죽이는 세상의 길이다. 십자가에는 나의 피가 묻어있다면, 십자기에는 너의 피가 흥건하다. 세상의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교회는 세상의 폭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실행하는 브레이빅과 그리 멀지 않다.

우리 안의 브레이빅과 싸우는 첫 번째 방법이 성경 읽기라면 두 번째는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였으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교회라고 해서 원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랑할 따름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미리 경험하는 곳인 동시에 그 나라를 연습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따금 교회가 난장판이 되는 것은 한편 하나님께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 용서를 연습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상하지만 혁명적인 말은 교회가 세상의 대안이라는 것이다. 용서받은 공동체인 교회가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90년대 초반께로 기억한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슬로건이 우리 사회의 화두였다. 이제 ‘폭력 없는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의 요체다. 나와 다르다고, 내게 조금 상처를 입힌다고, 내 것을 조금 앗아갔다고 되갚아주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마음이 폭력을 낳는다. 그것에서 9·11과 노르웨이 테러가 자라났다. 나는 하나님의 원수였다. 하나님은 나를 테러하지 않았다. 용서하셨다. 테러는 여하한의 이유에서라도 제자의 옵션이 아니다. 테러까지 불사한 자를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이 원수와 더불어 살면서 원수를 닮지 않고 원수를 사랑으로 이기는 길이다. 예수님 닮는 길이다. 예수님 따라 가는 길이다.
 


김기현은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이며, 로고스교회(구 수정로침례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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