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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우리를 노려보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기뻐하시고 노래 부르신다.
제레미 트리트  |  Jeremy T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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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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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ORD 나를 바꾼 말씀] No.16 스바냐 3:17

글: 제레미 트리트

   
 

로스앤젤레스 리얼리티 LA의 설교와 비전 담당 목사이며 바이올라 대학교의 신학교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왕The Crucified King: Atonement and Kingdom in Biblical and Systematic Theology의 저자이다.

 

밖에서 우리를 노려보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기뻐하시고 노래 부르신다.

 

등학교 시절 우리 농구팀 코치는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매우 고전적인,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그런 구식 코치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지만, 나는 내가 뭔가 잘못했을 때만 그 소리를 들었다. 내가 공격하다가 실수를 하거나 수비할 때 내 임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어김없이 연습은 중단됐고 나는 창피를 당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입에는 거품을 문 채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그때마다 나는 내 얼굴에 쏟아지는 침을 닦아내야 했다. 그가 농구 연습장 밖에서는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지만, 내가 아는 한 그는 언제나 화가 나 있는 남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 코치와 유사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맘대로 해야 하는 성미 고약한 노인이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고 죄의식을 심어주고 두려움을 갖게 하여 꼼짝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대놓고 떠들지는 않더라도 내심 신자들조차도 하나님을 “나를 잡으려고 밖에 와 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벌을 내릴 할당량을 채우려고 우리가 죄 짓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생각은 우리가 그렇게 배웠거나, 아니면 어떤 교회나 어떤 그리스도인과의 나쁜 경험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연유에서든, 우리가 바라보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 만나게 되는 하나님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노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스바냐 3:17)

 

우리에게 큰 영감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긍정적 사고의 힘” 같은 것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구절을 그저 나에게 영감을 주고 나를 고무시키는 그런 것 정도로 읽는다면, 이 말씀은 값싼 말씀이 되고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흐려지고 만다. 이 구절을 구약의 콘텍스트에서 분리하여 흰 구름과 하얀 비둘기 떼로 둘러싸 그저 막연하게 좋은 소리로만 여긴다면 이 구절이 말하는 기쁨과 즐거움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여기에 들어 있는 노래와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아름다운 기쁨의 노래

스바냐 3:17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진리의 하나를 선포하면서 시작한다: 주님은 구원을 베푸신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 구절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구원을 받았는지를 강조한다. 스바냐 3장은 우리는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쁨을―하나님의 기쁨을―위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 창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기 전에, 먼저 이 질문에 답해 보기 바란다. 당신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실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우리가 머리로는 알고 있더라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망하시고 화를 내시고, 심지어 우리에게 냉담하시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가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진술로 그것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화를 내지 않으신다. 나는 유죄가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와 같은 시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구원받았는지는 간과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내 아이들에 대해서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물었는데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아이들을 싫어하지 않아요.” 맞는 말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나는 내 아이들을 사랑한다. 나는 내 아이들을 보면 기쁘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런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그분은 나에게 화를 내지 않으신다.”

스바냐 3:17은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라고 선언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지만, 스바냐 3:17의 삼중 선언―하나님은 우리를 반기신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꾸짖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신다―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선언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선언의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은 “너를 보고 기뻐하시고 반기신다”이다.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는 인간과 더 자주 연관되는 행동인데, 스바냐는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그림을 그린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실수가 아니다. 하나님은 마치 스크루지 영감처럼 마지못해 자비를 베푸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성경은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며 기뻐하신다고 말한다(미7:18). 주님은 베푸실 은혜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껴서 베풀어야 하듯이 인색하게 베푸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하시다.”(출34:6) 주님은 말 그대로 우리에게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너그럽게 봐주시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선언의 두 번째 부분은 “그의 사랑으로 그는 더 이상 우리를 꾸짖지 않으신다”이다. 주님은 “전능자”이시다(습3:17).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움직이고 하나님의 힘은 하나님의 성품과 항상 조화를 이룬다. 스바냐가 주님은 “더 이상 우리를 꾸짖지 않으신다”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다(습3:15). 이 선언은 변하는 감정들이 아니라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에 뿌리 내리고 있다.

이 선언의 세 번째 부분은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노래 부르신다”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놀랍도록 독특한 관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 철학의 ‘부동의 운동자’가 아니다. 스토아철학의 ‘무정한 신’이 아니다. 주님은 노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직 창조적이고 아름다우신 하나님만이 말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 리듬과 운율을 첨가하신다. 성경의 하나님은 노래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바라보시면서 노래하신다.

내게는 딸이 넷 있다. 한 살, 세 살, 다섯 살, 그리고 여섯 살이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항상 만만찮다. 아이들은 자려들지 않는다. 아이들은 피곤한 법이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가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밤의 일상이 있다. 나는 보통 막내를 품에 안고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잠잠하고 고요해진다. 사랑과 보호와 안정을 느낀다. 스바냐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노래 부르고 그의 품에 우리를 안아주시는 우리의 아버지라고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더 큰 구원의 이야기

어떤 노래든지 그 노래의 작곡자나 밴드의 삶과 땀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할 때 가장 잘 이해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바라보시며 부르시는 노래도 그렇다. 이 구절은 스바냐서의 마지막에 나온다. 이 성경은 대부분 하나님의 심판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이 성경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말끔히 쓸어 없애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시작하며(습1:2), 열방을 하나하나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이 펼쳐진다. 그 다음에, 그리고 오로지 그런 다음에,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선언하신다.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기쁨 사이에는 심오한 역학이 작동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위엄과 자비가 많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시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정의를 행하신다.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는 수치심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선을 죄와 악이 망쳐놓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공평하고 의로운 반응이다. 모두들 내심 정의는 선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약자들이 억압당하고 누군가가 잘못된 대우를 받을 때 정의의 절실함을 느낀다. 범죄자가 풀려날 때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는 잘못된 것들이 간과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는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의 본질적인 면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은 창조세계 전체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분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주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시다.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사람들에게 멋대로 채찍을 휘두르는 분이 아니시다. 성경은 거룩하지 않은 백성을 회복시키시고 창조세계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거룩한 왕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목적하시는 것에 관한 더 넓은 이야기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는 값싼 은혜가 된다. 자비는 포기가 되고, 사랑은 감상이 되며, 하나님은 산타가 된다.

주님은 공평과 기쁨이 넘치는 분이시다. 그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용맹한 전사이시다.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모두 엄중하게 선포된다. 그러나 어떻게 공정하신 하나님이 반역의 백성에게 기뻐하실 수 있을까?

이 긴장은 십자가에서 궁극적으로 해소된다. 여기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드러내 보여주며 의롭지 않는 백성을 죄에서 구해내신다. 예수님은 위대한 대속을 성취하신다. 여기서 그는 우리의 죄에 대한 값을 치르시고 우리는 그의 의로움의 지위를 받는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는 매우 크지만 우리의 구주는 더 크심을 잊지 않게 한다.

그리고 스바냐 3:17은 유다 족속에게 선포되지만, 이것을 궁극적으로 성취하시는 분은 유다의 사자The Lion of Judah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그런 끔찍한 죽음의 수치를 견뎌내시려 하셨을까?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듯이,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다.”(히12:2)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심판으로부터, 그리고 기쁨을 위하여 구원을 받았다.

 

더 좋은 생명의 사운드트랙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좌우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주적 경찰관으로 본다면, 우리는 처벌의 두려움 속에서 떨면서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천상의 소방관으로 본다면, 우리가 어려운 지경에 놓일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바라보시면서 노래하시는 전능하신 전사이시라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단지 우리의 “영적” 삶이나 우리의 질서정연한 세상의 “종교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의 노래는 생명의 사운드트랙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기분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동기를 형성한다. 하나님의 기쁨의 노래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형성하는 몇 가지 방식이 여기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즐거워하심이 그를 향한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종만 요구하시고 우리의 기쁨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시는 우주적 엄숙주의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기를 원하시며, 이것은 하나님은 절제하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쁨과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려면 우리가 고통을 겪어야 하는 제로섬 관계에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한 고난을 통하여 확실히 영광을 받으실 수 있고 또 받으신다(롬8:17-30).

하지만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을 통하여 영광 받으신다. 섹스는 하나님의 아이디어다. 미각과 웃음도 하나님의 아이디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쏟아부어주시는 좋은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선물에 즐거워할 때,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그를 모든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으로 기뻐할 때 영광을 받으신다(약1:17).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의무를 기쁨으로 바꾼다. 신앙이 아직 어렸을 때 나를 이끄는 동기는 죄책감이었고 나를 자극하는 것은 의무감이었다. 나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교회 갔는데, 그것은 “선한 그리스도인”은 으레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를 내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위선적이었고, 그래서 그만큼 나는 비참했다. 그러나 내가 마침내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내 삶은 바뀌었다.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보실 때 나의 죄를 보지 않으신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보시고 나를 보시며 기뻐하신다. 나는 나의 행동이나 영적인 이력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은혜로 나를 인정하신다. 내가 한 무엇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것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한때는 의무였던 것이 이제는 기쁨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 때문에 우리가 일할 때, 신앙의 규칙적인 리듬은 선물이 된다.

셋째, 오늘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은 우리에게 내일의 희망이 된다. 어린 아이였을 때 나는 엄마가 만들어 주시는 쿠키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반죽을 휘저은 다음에 내가 스푼을 핥아먹게 해 주셨다. 정말 맛났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가 고대하는 것은 더욱 커졌다. 초콜릿 칩 쿠키! 우리가 끊임없이 기쁨을 주고받을 때, 우리는 장차 오게 될 영원한 기쁨을 미리 맛보게 된다. 스푼을 핥는 것처럼, 주님의 선하심을 미리 맛보면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기쁨의 충만함을 더욱 고대하게 할 것이다(사65:17-19). CT

Jeremy Treat, “God Is Not Out to Get You” CT 2016:11;CTK 20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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