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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은 사랑이다많은 사람들이 ‘예정’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지만, 바울은 이것이 사랑의 교리라고 말한다.
프랭크 A. 제임스 3세  |  Frank A. James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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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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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ORD 나를 바꾼 말씀No.17 에베소서 1:3-14

   
Jill De Haan

글: 프랭크 A. 제임스 3세
 

   
 

프랭크 A. 제임스 3세 펜실베이니아 하트필드 성경신학원 총장, 역사신학 교수. 교회사: 종교개혁 전부터 현대까지의 공저자이며순교자 피터 베르미글리와 예정론: 이탈리아 개혁자의 아우구스티누스 유산의 저자.


이 사실을 인정하자: 성경은 때로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가나안 족속의 멸망이나 아브라함이 아내이자 누이인 사라를 다른 남자에게 넘겨준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반감을 가진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성경에 엄연히 있고, 우리는 때때로 창피스럽고 불편한 이 이야기들에 들어있는 난제를 극복해내야만 한다. 모든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이미’와 ‘아직’ 사이의 커다란 간격 사이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고심하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영적인 요구 조건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에 기울어 있다. 결국, 야곱과 그 후손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셨다(창32:28): “너의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이는 네가 하나님과 씨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인 유전자에 들어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의 첫 부분을 보면 우리가 해야 할 씨름들이 많이 나온다. 이 중요한 편지는 아낌없이 애정을 부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정한”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을 그가 거론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에베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는 그토록 긴 세월동안―적어도 2000년 동안이나―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앓게 한 단어 하나가 들어 있다. 설상가상으로 바울은 이 불편한 단어를 강조하려고 같은 곳에서 두 번 씩이나 사용한다. 바로 “예정”이라는 단어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것은 어둠의 “세력”과 사악한 다스 베이더를 연상케 하는 단어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 때,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 그를 무시하고 좋은 것만 볼까? 두 손을 부여잡고 절망에 빠질까? 아마도 예정은 훈련받은 신학자들만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바로 여기서 씨름이 시작된다.

“예정”이라는 이 단어가 많은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자유와 개인주의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인 현대 사회의 감수성을 공격하는 말이다. 우리 자신의 운영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어떤 생각도 거부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예정이라는 관념이 당신을 괴롭힌다면, 지난 역사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존 웨슬리는 “자유 은총”이라는 그의 유명한 설교에서 예정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와 진리를 뒤엎는다. 이것은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을 악마보다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세례파 지도자 메노 시몬스는 프로테스탄트의 예정 교리를 “혐오스러운 것들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들조차도 이것이 부당하게 양떼를 괴롭힐 수 있다는 목회적 고려 없이는 강단에서 설교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 교리는 교회의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친구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다.


숨이 멎은 듯

에베소서의 첫 구절들은 관례적인 인사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기쁨에 넘친 찬양이 눈에 띈다. 그리스어 본문에서 이 구절들(엡1:3~14)은 실제로는 긴 하나의 문장이다. 202단어로 이루어진 이 문장은 신약에서 가장 긴 문장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도 가장 긴 문장일 것이다. 찬양과 감사에 너무나 깊이 사로잡혀 있어서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 같다.

바울을 숨 못 쉬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영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하는 무변광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성의 베일을 걷고서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삼위일체 신비(엡1:3-6), 그 계획을 실행하시는 성자 하나님(엡1:7-12), 그리고 그 계획이 완성될 것이라는 성령의 보증(엡1:13-14)에 시선을 보낸다. 이 구속의 파노라마가 너무나 놀라워서 바울은 숨을 쉴 수가 없다.

이 드넓은 시야의 중심에 예정이 있다. 일부 동시대 그리스도인들이 별나다고 느낄 정도로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을 열정적으로 기록한다. 그에게 예정은, 이것을 이방인 독자들과 나눈다는 사실 자체로 숨을 멎게 할 정도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 헤아리고 잴 수 없는 신비를 맨 정신으로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대신에, 바울은 옥상에 올라가서 이것에 관해서 외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이 ‘베라카’는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찬양의 노래와 다름없는 부분에서 바울은 모든 축복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베라카(축복)라고 불리는 유대 문학 형식을 활용한다. 이 베라카에서 바울의 일차적인 목표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면, 그의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아낌없이” 축복을 베푸신다는 것을(엡1:8), 사실상 “모든 영적인 축복을”(엡1:3) 베푸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들에 따르면, 이방인들은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의 장엄한 일부였다. 바울 같은 전직 종교적 테러리스트가 베라카를 이야기하다니, 사람들은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하나님의 많은 축복들―양자삼음, 구속, 죄 용서―을 강조하지만, 이 문장은 실제로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직접 한 백성을 “선택”함으로써 당신의 특별한 애정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유사한 모습을 두 번 채용한다. “선택” 받는다는 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친족 언어는 이스라엘의 자기-정체성의 핵심에 있는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바울이 이 편지의 이방인 수신자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동일한 언어이다. 사실, 바울은 이 이방인 개종자들을 정의하기 위해서 또 다른 대응 관계에 있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입양(5절)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단어―예정, 선택, 입양―는 서로를 강화하는 개념으로, 이것들로 바울은 하나님의 깊은 애정을 이 편지의 이방인 수신자들을 위해 보여준다.

예정이라는 사상이 바로 이 본문에 엄연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 최근의 이방인 개종자들―바울이 실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회람용 편지의 바로 첫머리를 이 말로 시작한다. 놀라운 것은 바울은 그들과 가벼운 인사나 이런저런 얘기나, 아니면 어떤 “좋은 분위기” 같은 것도 보여주지 않고 곧장 예정 교리로 들어간다.

유대인인 바울은 한 백성을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다는 관념에 상당히 익숙했다. 구약성경의 끊임없는 후렴은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것이다. 신명기 7:6-8에서 우리는 이 심오하고 애정 어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언을 발견한다. 그런데 바울은 이전에 유대인들이 독점했던 베라카를 예수님을 따르는 이방인들에게 확장한다. 이것을 선언하는 바울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베라카는 여러분,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것입니다.”


사랑의 교리

하나님의 축복을 이방인들에게로 확장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바울은 왜 굳이 예정이라는 이 “무서운” 개념을 사용하려한 것일까? 입양, 구속, 용서 같은 개념들이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묘사하는 데 확실히 더 적합하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이방인들은 에베소 주변 지역과 라이커스 계곡에 있는 다양한 도시들에 거주하는 주민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이론가인 마르쿠스 키케로는 로마의 서민들을 “비참하고 굶주린 오합지졸들”이라고 그가 묘사한 역사의 이 시기에 도시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참혹한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한 고대 도시의 주민들에게 예정의 축복은 어떤 의미였을까? “근근이 살아가고” 마흔을 넘기는 사람이 드문 로마제국 주민의 90퍼센트에게 이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암울한 사회적ㆍ정치적 두려움들―불의, 억압, 학대, 그리고 물론 어처구니없는 세금―이 바울의 편지의 수신자들의 삶을 좀먹고 있었다. 생존하는 것 자체가 가혹한 일상에서 도전인 이방인들에게 예정이 어떻게 축복일 수 있을까?

바울은 이 이방인 개종자들이 “극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고후8:2).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굶주린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필요하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었다.

1세기 소아시아의 잔인한 현실들을 완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특히 상대적으로 안전한 서양에서 태어나 현대 세계의 수많은 혜택들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런 생활환경들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 목회서신의 수신자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용기와 위로를 발견했다.

짧은 순간이나마 그들은 더 이상 거울을 통해서 희미하게 보지 않았고 영원한 현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랑을 베푸셨고 내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일부라는 말을 듣는다면, 내 숨은 충분히 멎을 만하다. 가장 모진 환경에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평생 전형적인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철학적인 고민이 아니다. 불안과 예측불가능성이 넘쳐나는 세상을 통과하는 길을 찾고 있는 정직한 순례자들에게 이것은 현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이 괴상한 개념은 우리가 종착지에 도착하려면 꼭 필요한 희망의 등불이다.

나는 내 어린 딸 앨리슨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를 사랑했단다.” 내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딸아이는 항상 내가 그렇게 말할 때 미소를 지었다. 앨리슨은 이 말이 측정할 수 없는 사랑의 선언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마음속에 나를 품고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나는 추가도 부록도 추신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용기일 것이다. 바울은 선언한다. “사랑 안에서 그는 우리를 예정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은 예정을 위한 진정한 동기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정되었다는 것을 안다고 참혹한 환경들의 긴박함이나 절박함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예정된 사랑을, 그리고 현재의 고난이 이야기의 끝이 아님을 보장해준다. 결국, 바울은 예정이 사랑의 교리임을 우리가 알기를 원한다. CT

Frank A. James III, "Wrestling with Eternity" CT 2016:12;CTK 20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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